격동하는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변하지 않는 가치가 그리워진다. 작금(昨今)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근간으로 삼은 우리나라 집권 여당으로 소위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을 깨고 자기 살 곳만 찾겠다는 정치권의 소식은 비극이다.
보수 정당이란 헌법을 보수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보수하고 있는 백성들을 대표로 만든 정당이다. 그것이 자신의 유·불리를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면 국민은 비참해진다. 칼 마르크스는 자기의 사회 이론을 이데올로기라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주관적 정치 이념의 집합을 이데올로기로 봤고, 그 잘못된 이데올로기들은 사회의 생산관계에 기인된 상층 구조들로 간주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짓된 것은 종교(특히 기독교)로 봤다.
따라서 기독교를 종교로, 공산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마르크스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이유는 그것이 종교적 독단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의 사상체계로 기독교와 대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상이성(相異性)도 있다. 소외 개념이 두 사상의 유사성이었다면 그 소외 개념의 내용으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곧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외다. 인간은 그 죄를 극복할 의지도, 힘도 없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뿐이다. 소외의 극복은 근본적인 변화뿐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의 소외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그 속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소외는 부정이 스스로를 다시 부정하고 처음의 긍정보다 한층 더 높은 차원의 긍정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면 이것은 변증법적 부정이다. 공산주의의 소외는 이런 성질의 부정이요 그 부정의 부정인 혁명은 그 소외의 극복이다.
오랜 군사 정권으로 인해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으로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사실상 야당이 승리했고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통과되었다. 서울대생이었던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1월 14일 있은 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6월에는 연세대 이한열 군의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 전국 30여개 시.군에서 연인원 400만 내지 500만이 참가한 가운데 조직적인 항쟁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는 민정당 대표로서 8개항의 수습안을 발표했다.
그해 12월 16일 개헌안에 따라 노태우가 직접선거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민주화를 이끌어낸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은 절차 민주주의에 따라 낙선했다. 그들은 민주화 투쟁의 직선제는 끌어냈으나 절차 민주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1992년에야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의 가치는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야 한다. 다수의 군중을 업고 세를 과시하는 것은 참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Democracy(Demos:백성, Kratos:힘)는 백성으로부터 힘을 삼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수가 힘이라는 이론은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가나안 땅을 점령할 시 이스라엘의 영도자 모세는 12지파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보냈다. 10대 2로 들어갈 수 없다는 의견이 다수였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뜻대로 진군을 명해 약속의 땅을 점령했다.
거리의 몰려든 군중이 몇 명이니 내가 정의라는 등식은 반드시 정의라고만 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보수하는 보수의 가치를 존중하는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신념을 우리나라가 갖출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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