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개혁이 한국 사회 개혁의 출발점
한국 교회 개혁이 한국 사회 개혁의 출발점
  • 김성봉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11.17 03: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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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한국 교회와 기독교 신앙에 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무신론과 다종교시대의 영향으로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과 믿음이 성경으로부터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그 결과, 우리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 할 것인가. 믿음과 구원의 정초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종교개혁은 기독교 개혁이었고 교회개혁이었다. 교회사가 필립 샤프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은  “초대 기독교의 재천명이었으며, 근대 기독교의 개시였다.” 요즈음처럼 다변화된 사회 속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처럼 다양한 종교가 섞여 있는 분위기에 익숙한 안목을 가지고서는 500년 전 종교개혁 당시의 개혁의 의미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당시 유럽 사회에 있어서 사회 전체를 떠받치는 기본이 종교였는데, 이 때 말하는 종교는 곧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기독교 곧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시대의 종교였다. 그 때문에 종교개혁은 기독교개혁이었고 교회개혁이었으며 사회 전반을 갈아엎는 사회개혁이었다.  

종교의 관심은 구원이다.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신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가? 신이 계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은 사후에 그 신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그 시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옳다 인정함을 받고 영생 복락에 들어가거나,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하고 영사 고통에 처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떻게 신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목적을 위하여 일생 동안 진지하게 매진하지 않을 수 없다. 곤잘레스에 의하면, 젊은 수도사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가 제시한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는 분명히 은혜의 종교임에도 중세 천년을 거치면서 당시 기독교는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로 바뀌어 있었다. 예수 믿는 믿음은 기본이고 그 믿음 위에 무언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만한 우리의 선행이 있어야 된다고 그 때 그 당시 교회는 가르쳤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 그런 가르침에 얼마나 자신이 매여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그런 가르침을 받는 일반 성도들의 경우 그 가르침 때문에 종교적 노예가 되지 않고도 진지하게 살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하지만 그 때 그 당시에는 정반대의 경우가 일어났다. 가르치는 자들은 그런 가르침에 구애받지 않았고, 배우는 자들은 그런 가르침 때문에 종교적 노예가 되었다.

교회사가 커닝햄에 의하면, 16세기는 “로마 교황청에 영락한 노예로 처해 있는 거의 모든 교회로부터, ... 가장 총체적인 무지, 미신, 그리고 부도덕으로 잠겨 있는 교회의 모든 몸으로부터”시작한다. 젊은 수도사 루터에게 있어서 “죄를 해결하고 그 죄의식을 덜어 주어야 할 고행의 성례가 오히려 그 반대로 절망의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성경의 권위를 회복했던 루터의 종교개혁

이런 종교적 현실 앞에서 뜻 있는 사람들은 묻게 되었다. 과연 그런가? 교회 부패의 현실 앞에서 과연 성경이 그런 원리들을 보장해 주고 있는지를 살피게 되었다. 신실한 성경교사들이 발견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교회 가운데서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성경의 가르침의 중요성이 있다. 과연 교회 가운데서 성경의 위치는 어디인가? 물론 성경을 존중히 여긴다. 하지만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정도로는 안 된다. 성경과 함께 다른 권위를 용납하는 순간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오직 성경”이란 종교개혁의 원리적인 선언이 나오는 것이다. 당시 교회를 받쳐온 권위는 교황과 추기경 회의의 결정들이었다. 물론 성경에 대하여 당연히 그 권위를 인정한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과 함께 다른 권위를 단 1%라도 말하게 되면 성경의 권위는 상대화되고 그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하고 만다. 그 때문에 배타적인 표현을 쓰면서 “오직 성경”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을 논의의 근거와 권위로 붙들게 되면 구원에 관한 논의도 제 자리를 잡게 된다. 구원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하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성경에 의하면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고 사람이 그 은혜를 받는 방식이 믿음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것도 보태어져서도 안 되고, 보태어질 수도 없다. 여기에 “오직 은혜” 혹은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이다. 이미 기독교 초기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그토록 세심하게 가르쳐졌던 내용들이 1500년 시대를 격하여 다시금 강조되게 되었다. 

당시에 로마서,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 서신들이 연구되고 가르쳐진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1515년 가을에 작센에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박사는 학생들에게 로마서를 강해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가 그가 그 대학 교수진에 합류한 지 3년 째 되는 해였고, 95개 조항을 붙이기 2년 전이었다. 

그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마을마다 골목마다 교회당이 있었고 기도처가 있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에 교회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큰 예배당,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 신비롭고 엄숙한 예식들이 기독교 종교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과연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만한 징표들이 있는가를 그 시대의 개혁자들은 물었다.

그들은 어떤 것들을 교회의 교회다운 징표로 여겼던가? 그것들은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시행, 권징의 바른 실시 등이다. 이 징표들이 있으면 비록 작고 초라하여도 교회이지만, 그것들이 없으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여도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 개혁자들은 참 교회의 표지로 '성례의 시행'을 꼽았다. 또 개혁자들은 성례는 반드시 성경대 로시행해야한다고주장했다./ 사진제공= 부산세 계로교회

무신론, 무신앙의 현대사회 믿음의 정초는 어디에?

오늘날은 다변화된 사회요 다원화된 사회이며 다종교 사회이다. 그 때 그 시대는 종교적인 사회였으나 오늘 우리 시대는 세속적인 사회이다. 오늘날에는 종교가 인류의 삶 가운데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지 전체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 때 그 시대에는 종교라 할 때에 그것이 기독교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오늘 우리 시대에는 종교라 하면 그것은 기독교를 포함하여 여러 다른 종교들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영적 현실이다.

이런 시대에서 종교개혁을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오늘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이 종교 전반을 포괄하는 사회개혁인가, 아니면 기독교 종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개혁인가? 

오늘날은 전반적으로 무신론과 무신앙의 시대이다. “죽음 이후 신 앞에서의 심판”과 같은 말에는 심지어 기독교인조차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무신앙의 시대에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에는 당연시 되었던 종교적인 관심이 오늘날에는 치밀한 변증을 거쳐야 겨우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철저한 내세관, 심판관, 영생관이 없는데, 이신칭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종교개혁 시대의 핵심 교리가 오늘날에는 무의미한 추상적인 용어로 전락되고 말았다.    

오늘날은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는 객관적인 판단 권위가 더 이상 없는 시대이다. 기껏 자연과학적인 진리 판별의 기준이 어느 정도 권위를 가지고 통용되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제 더 이상 전 분야를 총괄하여 권위를 가지는 것이 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때 그 시대에는 성경이 진리 판별의 기준이었고,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유일 기준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에 대한 자세는 어떤가? 비종교사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사회 속에서도 여러 경전 중의 하나로 이미 상대화되었다. 

더욱이 성경은 기독교 종교 내부로부터 비판 받아 온 지 이미 오래이다. 인류 사회 속에서 성경이 더 이상 진리 판별의 객관적인 권위로 여겨지지 않는다. 전에 당연시 선포되었던 성경의 권위가 이제는 세밀한 변증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전혀 의미 없는 말로 여겨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시대 속에서 무엇을 표준으로 삼아 개혁을 말할 수 있을까?

오직 믿음, 오직 은혜…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 시기의 관심은 구원이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 문제였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혹은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편으로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날 이 같은 종교개혁의 기본 교리가 다방면으로 도전 받고 있다.

그에 대하여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연 그런가?” “과연 성경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가?” “과연 바울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을 바로 이해했는가?” 심지어 실천적인 면에서조차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의 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를 두고 마치 그 원인이 교리가 잘못된 데 있는 양 문제를 제기하며 몰아가고 있다.     

오늘날 다변화, 다원화, 다종교화 된 이런 사회 속에서 그 입지가 너무나 많이 제한된 시대에서라도 굳이 교회개혁을 말한다면, 교회개혁의 핵심은 우선적으로 다음 세 가지에 집중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설교 개혁, 성례 개혁, 권징 개혁. 설교 개혁이란 단순히 예배 순서에 설교 시간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과연 성경이 제대로 읽혀지고 해석되고 설교되고 적용되는가의 문제이다.

성례 개혁이란 단순히 세례와 성찬을 행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례와 성찬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권징 개혁이란 교회 가운데 권징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가운데서 시행되는 권징이 과연 성경의 교훈을 따라 사사로움이 없이 공의로 시행되는가의 문제이다. 

위와 같이 말해 놓고도 여기에 부가하여 교회개혁을 위한 보다 구체적인 제안을 한 두 가지 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구성원은 사람들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로는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의 직분자들 뿐 아니라, 다수의 일반 성도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 목사와 장로가 개혁되어야 한다. 목사를 배출해 내는 신학교가 개혁되어야 하고, 목사가 개혁되어야 하고, 장로가 개혁되어야 하고, 당회가 개혁되어야 한다. 신학교의 수준, 교육 내용, 훈련 과정, 목사의 임기, 장로의 임기, 보다 합리적인 당회 운영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다변화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인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다. 먼저 이런 정신이 우리 각자가 속해 있는 교회 가운데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교회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건물, 사람 수, 재정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개혁자들이 말하였던 교회의 교회다운 표지가 제대로 드러나는가의 문제이다.

말씀이 건전하고 바르게 선포되고 있는가? 성례(세례와 성찬)가 미신적인 것 없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시행되고 있는가? 권징이 사사로운 감정 없이 공명정대하게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시행되고 있는가? 우리 각자가 이런 교회에 속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통한 이 사회에 대한 작은 영향력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현장에 착근한 기독교적 신앙 회복 

오늘날 기독교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으로부터 실천적 삶이 요구되고 있는 때에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사람에게 보여서 인정받고자 하는 그런 유의 신행은 기독교 본연의 신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 6:2)고 하셨는데, 오늘날 우리는 작은 구제 행위를 신문이나 방송에 떠벌리려고 한다. 그런 자세를 취하게 되면 세상에 잘 보이기 위하여 구제는 했을지 모르나 우리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선행은 여전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 6:3) 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다 보니 어느 날 나도 모르는 새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고 있는 것-이런 것이 본래 기독교 종교가 추구해야 할 선행이다. 선후가 바뀌거나 주객이 바뀌어 버리면, 선행은 선행인데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적인 선행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가 설혹 세상이 감동할 만한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세상은 교회가 고백하는 그 신앙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주일날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다운 교회에 속하며 교회다운 교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주일 예배에 참여하여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에게 허락된 사회의 각 분야에서 건전한 말씀의 교훈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오늘날 기독교 일각에서 외쳐지고 있는 소위 “일터 신학”은 바로 이런 면에 대한 자각에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와 같은 교회의 직분자들은 이런 일에 있어서 본을 보일 분들이다. 

모범적인 직분자는 어떤 분일까? 지난 주일에 강단에서 선포되었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맡겨진 삶의 현장에서 한 주간 내내 그 교훈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는 분이다.

이런 분들이 도처에 있게 될 때에 한국 교회의 장래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위로부터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런 분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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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자 2016-11-19 13:44:28
세계가 폐한 십일조타령하며 신자들을 협박질 해대는 돈의 노예간 된 목사들 부터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이며 경영학 이론을 교회에 덧입혀 온갖 방법으로 교인들을 교회(목사)의 노예로 만드는 헛짓거리부터 없앤 후 진리를 얘기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