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원칙의 관철로 독일통일 이루다
헌법 원칙의 관철로 독일통일 이루다
  • 이주천 미래한국 편집위원
  • 승인 2016.08.2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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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천의 知性 아카데미] 독일통일의 역사적 교훈

독일 통일은 자유와 민족자결권 수호, 서독 기본법 정신을 수호하는 것, 그것은 유럽의 통일을 추구하고, 동시에 전체 독일인들에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독일통일과 자유를 완성하도록 촉구하는 것 

독일통일의 성공요소와 원칙 

독일통일의 성공요소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미래한국 편집위원

첫째, 미군의 장기 주둔과 함께 서독과 미국의 상호협력관계가 꾸준히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역대 서독 정부는 미군 주둔으로 안보 비용을 줄이면서 경제성장에 매진할 수 있었다. 또 서독 정부는 미국의 안보 및 대(對)유럽 정책에서 거의 대부분 열성적으로 미국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둘째, 유럽 열강 중에서는 소련 고르바초프 정권의 협조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동독 탄생의 배후세력인 소련은 동독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 군부가 독일통일에 강하게 반발한다거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치가 실패하면 이것이 통일의 강력한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콜은 고르바초프와의 인간적 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나아가 고르바초프를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그의 국내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이는 독일 문제에 대한 소련의 내정 불간섭으로 이어졌다. 

셋째, 콜 총리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도 돈독한 협력관계를 쌓았다. 당시 독일은 유럽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에 콜은 미테랑에게 프랑스와 협조관계를 이뤄 유럽 통합으로 함께 갈 것을 강조했다. 미테랑은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유럽 열강들은 통일독일이 나토(NATO)에서 탈퇴하여 독자노선을 가는 통일독일의 중립화에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그것은 통일독일이 불안정한 유럽의 핵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감이 있었다. 유럽 열강들은 모두 통일독일의 나토에의 잔류를 희망했고, 서독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넷째, 콜 정부는 동독 주민들의 집단 탈주로 인한 통일의 결정적 순간 헝가리 네메트 총리의 개혁정치를 지지했으며 헝가리의 서독에 대한 우호적 태도에 큰 도움을 받았다. 1989년 9월 10일, 헝가리 정부는 동독에서 탈출한 동독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며칠 뒤 동독 탈출자 숫자는 무려 10만에 이르렀다. 

네메트 헝가리 총리는 그들의 국경 통과를 허용함으로써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를 도왔다. 콜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에 5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비자 면제, 유럽연합 가입을 위한 독일정부의 지원을 약속했다. 

다섯째, 서독 정부는 1950년대부터 체제 전복을 기도할 가능성이 있는 내부의 적들을 정리했으며 이들의 활동을 꾸준히 감시, 사찰해왔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에 대한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간직한 서독의 기민당과 보수 정치인들은 집권 초기부터 집안 단속을 철저히 하여 국론분열을 사전에 차단했으며 극좌·극우세력이 준동·발호할 기회와 구실을 주지 않았다. 

서독 정부는 1950년 후반에 헌법재판소를 통해 극우·극좌 정당을 해산, 정리했다. 서독의 불법 정당 해산 과정은 철저했다. 위헌(違憲) 판결을 받은 단체는 출판·집회 등 기본권을 뺏고 위헌 정당이 이름을 바꿔도 끝까지 추적해 해체시켰다. 

예를 들어, 동방정책을 편 빌리 브란트 총리는 동독에겐 웃으며 대했지만 서독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솎아냈다. 서독 시절 위헌 단체를 모두 해산했고, 또 통독 후 지금까지도 위헌 단체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독일은 통일 이전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의 기본 정신을 해치는 단체들은 법적으로 뿌리를 뽑아 버렸다. 이것이 독일이 통일된 후 이념적 혼돈이 없었던 이유다. 

여섯째, 서독 정부는 독일의 슈타지(비밀경찰) 피해 사례가 기록된 잘츠기터에 중앙조사처를 설립하여 동독 공산정권의 폭력 행위와 인권 침해를 조사하여 그 행위자에 대해 형사소추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동독 정부에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동독의 국경 수비대들로 하여금 탈주자들을 정조준하지 않고 옆으로 총을 쏘게 했으며, 많은 정치범들을 고문에서 지켜주는 효과를 가져다주었기에 동독 주민의 인권 보장에도 기여했다. 

돌이켜보면, 서독 정부가 건국 초기부터 기본법에서 자유와 민족자결권이란 통일의 기본원칙에 대한 천명(闡明)이 있었고, 이를 끝까지 고수했던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949년 9월 15일에 출범한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는 통일의 기본원칙을 천명한 바, 서방측이 단합하여 힘의 우위를 확보함으로써만이 소련에 압박을 가하여 통일 문제에 양보를 얻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아데나워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1953년 6월 17일 소련이 그들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동독 노동자들의 봉기를 탱크로 진압했을 때, 아데나워 정부는 서독이 서방 세계와 통합하는 것 외에는 정치적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아데나워 정부는 서독의 재무장과 일반 병역의무 도입 및 군대 창설, 서유럽 군대 및 나토 참여에 대한 결정을 밀고 나갔다. 1949년 서독은 건국 초기부터 ‘단독대표권’을 주장하여 동독의 정부수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동독이 자유선거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동독을 국가로 승인하는 것은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외무성의 서기관 이름을 딴 ‘할슈타인-독트린’이 도출되었다. 

서독은 다른 국가들의 동독 승인을 막기 위해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여 외교적으로 동독의 고립을 시도하고, 동독에 대한 대결정책을 고수했다. 1969년까지 이 원칙은 지켜졌다. 

이에 반발한 동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설치했으며, 동독 대 서독의 냉전체제가 고착화되었다. 1945년 이래 동독을 떠난 동독인들은 270만 명을 넘었기에 동독으로서도 주민 이탈 방지책이 필요했다. 

▲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의 브란덴부르그 개선문. 김정은에 호의를 보이면 평화와 통일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아데나워의 놀라운 통찰력 

요약·정리하면, 독일 통일은 국내적으로 극우·극좌 정당을 위시한 반체제 세력을 정리하고, 유럽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위시한 국력을 배양하면서 기회를 꾸준하게 엿보다가 소련과 동유럽의 개혁 및 민주화 분위기와 더불어 국제정세의 유리함을 포착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콜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제정치적 발전이 독일인들에게 통일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을 때 기본법 속에 부여된 그 같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온갖 힘을 모았다.” 

동독의 운명을 좌우하던 소련이 경제·체제적 위기가 가중되고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극적으로 통일의 문이 잠시 열렸을 때 독일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8년 동안 장기 집권하면서 통일을 달성한 콜 총리에 대한 찬사는 1990년 6월 7일, 하버드 대학 졸업식에서 터져 나왔다. 콜 총리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데릭 복 하버드대 총장은 콜에게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소수의 사람에 속한다”고 격찬했다. 

1989~1990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통일의 여정에서 인내와 긴 호흡으로 동서 간 갈등을 극복하는 데 정책 목표를 둔 아데나워 총리의 통찰력이 옳았음을 확인시켜주었다. 

통독 이후 수많은 진실들이 밝혀졌는데, 동독의 경제력이 과대평가 된 부문이 많았다는 점이나, 콜이 “동독이나 소련에 어정쩡한 호의를 보이면 통일이 하루빨리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은 것은 환상”이라고 회고한 점은 타산지석으로 새겨야 할 대목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체제에 호의를 보이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것이라는 천진난만하거나 위험천만한 생각을 가진 지도층 인사들이 적지 않다. 남북한 긴장완화와 한반도 평화정착이란 대의명분을 핑계 삼아 자유통일의 기본원칙을 훼손하려는 무리를 엄중하게 경계해야 한다. 

독일 통일은 자유와 민족자결권 수호, 서독 기본법 정신을 수호하는 것, 그것은 유럽의 통일을 추구하고 동시에 전체 독일인들에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통해 독일통일과 자유를 완성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서독헌법에 들어 있는 통일조항 원칙을 콜 정부는 끝까지 지켰다. 

독일 통일의 주체세력은 기독교를 신봉한 기민당 중심의 자유(민주)세력이었다. 서독 정부는 전후복구사업의 지원을 받기 위해 미국 및 서방 세계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했으며, 한때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했던 주변국 국민들에게 과거의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였다. 통일 후에도 유럽 통합에 기여할 것이라는 점 등에 대해 주변국들이 신뢰하도록 성실하게 행동으로 실천했다. 

동서독 교류에서도 공짜는 없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서독이 돈을 주면 동독 정부는 동독의 정치범을 풀어주었고, 동독은 방문 허가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또 통일에 도움을 주는 인접 국가들에게는 그에 상응한 보답을 했다. 소련과 헝가리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대표적인 예다. 

끝으로 콜의 회고록(김주일 역, <헬무트 콜 총리 회고록: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을 읽으면서 느낀 흥미로운 점은 좌익의 행태는 독일이나 한국이나 유사했다는 점이다. 거짓말을 잘하고, 유언비어를 잘 유포하고, 진실 되지 못한 점이 공통점이었다. 

사민당과 녹색당, 좌익 언론의 행태는 한국의 경우와 너무나 유사했다. 6·25 동란과 냉전 분위기에서 1950년대 말에 극좌 정당인 독일공산당이 소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 서독 정부는 잔존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사찰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방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는 좌익세력이 상존했다. 

우리도 통일의 장정을 원활하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그들을 여론에서 분리, 억제시켜서 정리해나가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동독을 붙들고 있는 소련의 원심력이 자체의 경제난과 체제 위기로 약화되었고, 동독 주변국가인 헝가리와 폴란드 등 주변 국가들이 서독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면서 통일정책을 지원했다.

한반도의 경우 북한을 붙들고 있는 중국의 원심력이 동독을 붙들고 있는 소련의 원심력보다 훨씬 강하기에 통일이 늦어지고 있다. 중국의 대북 원심력을 얼마나 약하게 만드는가가 통일의 관건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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