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에 직면한 대한민국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에 직면한 대한민국
  • 홍순기 한남대 역사학과
  • 승인 2016.08.15 17: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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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발언대] 8·15 건국 특집

문제가 많다면 그 문제에 절망하고 비관하며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도전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 그리고 문화를 자랑하는 나라다. 20세기 들어 대한민국의 역사는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유일무이한 법질서와 체계를 새로이 확립하며 그 진가를 발휘했다. 

▲ 홍순기 한남대 역사학과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압축하고 병진한 한국혁명을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선조들이 일으킨 셈이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은 괄목할 만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세계가 경제적 수렁에 빠짐과 동시에 대한민국 역시 나락에 빠지고 있다. 그러나 나락에 빠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나락에 빠졌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대처하여 도약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말이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저서 <자유론(On Liberty)>에서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렇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간의 시조 격으로 세계 4대 성인(聖人)으로도 불릴 만큼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간직했다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로 살아야지, 어찌하여 뒤룩뒤룩 살이 쪄 먹고 자기 바쁜 돼지의 형상으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느냐는 밀의 인류에 대한 직언(直言)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 문구는 앞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생략, 의역한 내용이다. 앞의 내용까지 모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being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이렇게 배고프고 배부른 것만이 아니라,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않느냐 역시 인간과 돼지의 구분 척도로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역사학도로서 이 문구를 적용시켜 냉철히 바라보자면 산업화, 민주화 시기에는 정확히 들어맞았다고 생각한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을 선택한 박정희 대통령 

우리의 선조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인간으로 살며 희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던 그 배경에도 바로 당신들은 배고픈 인간으로 살지언정, 후세대에게 그 배고픔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실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1월 17일에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라는 명연설을 했던 것이다. 

또 이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선조들은 산업화 시기에 민주화를 열망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몸을 날려 투신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청년 세대는 무기력하게도 쇠고랑과 수갑을 찬 채 마틴 셀리히만이 주창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상태에 빠져 있다. 

쉽게 말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저항과 도약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말이다. 아니, 잃어버렸다기보다는 엉뚱한 곳에 낭비하거나 그 정신이 자신들에게 있는지조차, 있었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이 보다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낭비가 이뤄지고 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로만 살고, 정작 배부른 돼지가 되길 원하고 있지 않은가?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와 배고픈 인간이라는 담론으로 각각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했다면, 지금 우리 세대는 불만족스럽기만 한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가 되고자 하는 비전과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돼지가 동시에 될 수 없다. 

얼마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사람은 사석에서 민중을 개, 돼지에 빗댄 영화의 명대사를 빌려 이에 공감하는 발언을 했다. 비록 사석이었으나 공직자로서 그의 발언은 신중치 못했고 언론인 앞에서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그렇기에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보자면 그의 말에는 일면 타당한 면도 없지 않다. 앞서 기술했듯이 우리 세대는 배부른 돼지가 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발언은 우리 마음 한구석에 가지고 있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 논란이 거세졌는지도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하여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새로이 쓴 선조들은 우리 세대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 

그런데 정작 그 희생의 산물로 만들어진 우리 세대는 감사한 마음을 잊고 단지 불평불만만을 나타내며 배부른 돼지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헬 조선’, ‘수저론’도 그런 사고 방식의 근저에서 탄생한 이 시대의 비극적 용어일 것이다. 

불평불만만 하는 우리 세대의 배부른 돼지들 

우리나라에 문제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압축적인 산업화를 이루다보니, 압축적인 민주화를 이루다보니 그 산통이 만만치 않았다. 정치에 대한 불신, 기득권에 대한 불신, 양극화로 인한 사회적 갈등,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자랑함에도 사상 최고의 실업률을 자랑하는 등 무수히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문제가 많다면 그 문제에 절망하고 비관하고 주저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도전을 할 생각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나락에 빠졌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나락에 빠졌을 때 어떻게 그 위기를 대처하여 도약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 젊은 세대는 사회적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감성이 아닌 이성적으로 냉철히 분석해 우리의 미래를 꾸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왔던 그 불굴의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건 수용하고 비판할 건 비판을 해야 진정한 도약을 이뤄낼 수 있다. 

지금처럼 무조건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는 사고 방식으로는 현실을 긍정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미래로 도약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가 존재한다. 그래야만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대한민국은 또 다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정상에 우뚝 솟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의 세대가 물려준 단물만을 빨고 있을 것인가? 물려받은 것보다 더 멋진 세계를 창조할 도전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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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2017-01-14 1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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