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민족주의는 자유를 침해한다
과잉 민족주의는 자유를 침해한다
  • 김인영 한림대 교수
  • 승인 2016.05.08 16: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각의 틀 깨기] ‘민족’과 자유

개인 없는 ‘민족’의 지나친 강조는 개인권의 침해이자 자유주의의 말살 내지는 진실의 왜곡 

민족주의란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한 대로 고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실재적 집단이 아니라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자 “상상(想像)의 정치 공동체 의식(意識)”임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하지만 그 상상의 공동체 의식은 상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하며, ‘전통’과 섞여 현실에서 살아 숨 쉬며 작동하고 있다. 

▲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동아시아 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문제는 민족주의가 공동체를 대내적으로 단결시키는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민족’의 과잉이 가져오는 대외 팽창, 그에 수반된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침해라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누구도 더 이상 민족주의의 시대라고 지칭하고 있지 않는 세계화, 지구촌화의 시대에 ‘지나친’(?) 민족주의가 한국과 한국 정치에 가져온 문제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1979년 첫 발행된 고등학교 국정 국사교과서의 목표는 ‘국사 교육을 통해 올바른 민족사관을 확립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고등학교 역사교육 모두 국난 극복의 정신을 강조하고, 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중흥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이혜원, “군사정권 시절 국정 한국사 살펴보니…모두 ‘올바른’ 역사교육 강조,” 뉴시스, 2015년 10월 15일). 

국사(國史)와 민족사(民族史)의 동일시 

역사 교육이 민족사를 중심으로 한 교육이 된다는 것은 한 민족의 역사를 외부 민족과의 관계를 문화와 경제교류 등 상호 영향을 주는 섞임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침략의 관계나 배타적·적대적 관계에 치중하게 한다. 이러한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지닌 각자의 민족주의는 동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전체를 유럽경제공동체나 유럽연합으로 진행하는 데 방해로서 작용하고 있다. 

또 과거를 잊자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이웃 국가를 ‘악마화’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의문이다. 그 가장 극단이 히틀러의 등장, 독일 나치의 독일민족 피해의식, 그리고 독일민족 순혈주의가 만들어낸 유태인 학살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지나친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사례로 알려주고 있다. 

이를 근거해서 본다면 지금은 많이 극복되었지만 단일민족에 대한 강조, 그리고 마치 고구려·백제·신라와 가야가 있었던 시기에까지 민족 개념을 확대하여 과거부터 하나의 단일민족성을 강조하는 사관은 역사에 대한 왜곡일 뿐일 것이다. 

민족주의 강조되면 국수주의적이고 배타적 국제관계로 흘러 

지금까지 국사학계는 국사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아직도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일제에 점령당했던 과거를 순진한 피해자로 미화하고, 일제의 모든 제도 개혁과 개선을 의도적으로 비하 왜곡하는 사관이 아직도 사학계를 지배하고 있고, 언론과 학계가 동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식민지 수탈을 지어내고 그것을 정사(正史)로 만들고 있으며, 그에 동조하지 않으면 반민족 분자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그렇다면 19세기 말 제국의 틈새에서 잃어버린 조선에 대한 대안으로 민족을 내세우고 민족의 위기를 호소한 단재 신채호의 ‘민족 수호’를 위한 민족사학이 21세기 지구화 시대에도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적용되어 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큰 문제다. 지금의 시대성 내지는 세계화라는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민족사’에 국사학이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타자(일본)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시키며 한민족을 순진한 피해자로 만드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인지 갈등을 크게 한다는 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등 일본 문화에 대한 수용과 일본인에 대한 증오가 모순된 상태로 병존하게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자유 무역의 시대에 맞는 것은 타자에 대한 열린 개방성, 즉 일본 기업과 일본 제품 등에 개방적이어야 경제 교류가 가능한 것인데 ‘외국 자본’ 특히 일본 자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해괴한 비난이 아직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만든 원인을 반일 민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롯데그룹 승계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 그리고 롯데를 민족기업이 아닌 일본기업이므로 “롯데는 한국을 떠나라”, “롯데 제품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정도의 댓글이 순식간에 수천 개씩 달리는 인터넷 공간의 현상을 보면 반일 민족주의 감정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느끼게 된다. 

이는 결국 한국의 동아시아 외교를 국가이성(理性)에 근거한 국익(國益)이 아니라 민족감성에 근거한 대결로 이끌게 함을 우리는 박근혜 정부 초기 대일 외교에서 충분히 보았다.

독도문제에 대한 지나친 민족주의적 접근은 현실적 지배를 강화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외교적 접근을 방해하고, 경제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적임에도 ‘과거사 문제’로 일본의 더 깊은 사과를 요구하며 2년이나 외교관계의 진행을 멈췄던 박근혜 정부의 외교 실패 역시 민족주의적 감성을 국익 위에 존치한 때문이었다. 

이런 사례는 박근혜 정부 초기의 외교에서 볼 수 있다. 일본과 과거사 해결을 전제로 한 정상외교 단절, 그리고 사회에 형성된 반일 극단화는 작년 말 일본과 과거사 문제에 대한 외교적 타협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소녀상’ 건립 확대와 ‘소녀상 수호하기 운동’라는 반발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나아가 한국의 민족주의적 국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강함과 ‘만주 벌판 지배’로 대국적 면모를 강조하면서 일본 식민지 기간에 대한 보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이 역시 중국과의 외교 관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하기 힘들다. ‘만주 고토(古土) 회복’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민족주의적 주장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과거에 사로잡혀 이웃 국가를 ‘악마화’하는 민족주의는 자유의 억압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독일민족의 피해의식과 순혈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한 히틀러와 나치가 대표적인 경우다.

통일 지상주의를 만들어 내는 민족주의 

왜 통일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한민족이므로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대답이 일반적이다. 하나의 민족은 한 나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허상을 만들어 낸 것이 민족주의다. 이렇게 민족을 강조하면 통일을 위해 개인과 사회는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생활권’이 필요하다는 정책은 동부 우랄 산맥까지 도이칠란트의 영토를 팽창시키고자 했으며, 히틀러는 이를 위해 우랄 산맥 서부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을 우랄 동부로 추방을 하려 했다. 결국 민족주의는 팽창주의와 침략주의와 식민주의를 옹호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통일에 대한 지나친 감성적 접근과 통일지상주의에 빠지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즉 한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로서 한국 민족주의가 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방법과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개입하게 되면 통일이 되었을 때의 내용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가 되어야 함을 망각하도록 개인과 국가 이성을 마비시킨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경우 북한이 주장하는 인민민주주의가 실제로는 김일성 주체사상에 다름이 아닌 권위주의 독재임에도 일부 운동권 좌파세력은 민족감정을 내세워 “민족끼리의 통일”로 미화하고 왜곡시켰다. 민족으로 계급혁명을 감춘 것이었다. 

나아가 통일이 일방적으로, 그리고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아젠다가 되어 버린다면, 또 같은 민족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접근이라면 개개인의 이익 보호가 전제된 실질적 통일,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로의 통합은 이룰 수 없게 된다. 

통일보다는 하나의 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국가로 인정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적인 규범을 지키기를 요구하고, 경제적으로 필요한 교류를 지속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다른 문화적 차이를 전제로 공통의 우리의 문화를 찾아가는 작업이 실질적 통일의 과정이 될 것임을 무시한 것이다. 

남북한 통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서로 동일한 민족임을 찾아가다 서로 다름과 갈등 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민족통일 속의 분열이 아니라(민족주의적 통합), 서로 다른 것 속에서 동일한 것을 찾아가면서 다름 속에서 하나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기능주의적 접근을 민족 지상주의가 막아버린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민족을 위한 희생 강조되고 개인의 영역 축소 

국내에 100만 명의 외국인이 함께 살아가는 일정한 수준의 다문화 사회이며, 700만 명의 동포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지구촌 적 연계 속에서 한국 사회 순혈주의와 민족적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아가 나치와 파시즘의 사회민족주의 전개로 볼 때 민족이 개인 앞에 존재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훼손되는 결과는 민족주의의 필연적 결론으로 보인다. 개인주의와 사회민족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투쟁해 왔고, 역사의 발전은 개인의 자유의 확보로 결론지어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민족주의 역시 내부적 단결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민족만을 위한 그 무엇을 국가가 요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분명 ‘개인’과 개인의 자유라는 또 다른 인류 보편의 가치와 충돌하게 된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대항하는 논리를 대부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찾았고, 강한 저항 민족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자유주의 부재’의 전통은 남북한에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남북한 모두 자유주의를 외면했던 역사는 북한에서는 김일성주의로 국가를 운영하고, 남한에서는 건국 세력과 산업화 세력이 모두 반공국가를 만들어 ‘방어적 자유민주주의’를 세웠고, 대신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의 ‘반공’에 근거한 민주주의 탄압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의 회복을 자유주의 정착보다 우선시 했기에 대한민국에는 여전히 자유주의가 자리 잡을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처럼 꽃 피지 못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와 자유화가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다. 이 시대 이 시점에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다. 더 크게는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 이후 이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와 자유화라는 측면에서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개인 없는 민족의 지나친 강조란 개인권의 침해이자 자유주의의 말살 내지는 진실의 왜곡을 가져올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