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삼국의 평화체제 고민
동양 삼국의 평화체제 고민
  • 미래한국
  • 승인 2015.08.28 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경귀의 고전 읽기 / 안중근 著, <동양평화론>

올해로 대한민국 건국 67주년을 맞는다.

이 땅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우리는 1948년 8월 15일 비로소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국민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북한 공산당의 무력남침을 물리치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세계인의 찬탄을 받는 자랑스러운 나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병합의 마수를 뻗치고 있을 때, 그리고 36년간 일제 시기에, 자주 독립과 평화를 위해 외교전과 무장투쟁을 벌인 숱한 독립운동가의 희생과 노심초사를, 그리고 미군정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을 잊어선 안 된다. 

안중근 의사 또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사형선고를 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으로 고귀한 삶을 마쳤다. 그는 죽기 전 항소를 포기하는 대신 <동양평화론>을 썼다.   

철학자와 현인이 남긴 지성의 기록만이 고전일 수는 없다. 인간의 웅혼하고 고결한 정신과 기개가 담겨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책이 있다면 이 역시 생명력 있는 고전일 터. <동양평화론>이 바로 그런 책이다. 자주 독립과 평화를 갈구한 안 의사의 식견과 통찰, 그리고 민족을 사랑한 뜨거운 열정과 체취가 담겼다.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1905)은, 황제의 옥새도 없이, 총리대신의 승낙도 없이 한국민을 기만하여 체결된 것이므로 불법 무효라고 주장한다.

1907년의 정미7조약 역시 칼로써 황제를 협박하여 강제로 체결된 것이라며 분개한다. 이에 “한·일 두 나라의 친선을 저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 이토를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제거”했다고 밝혔다. 

안 의사는 처형 직전까지 동양평화 구상의 일단을 밝혔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중국의 3국 간 경제, 교육, 군사적 협력공동체를 모색했다. 현실적으로 당시 모든 면에서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을 배제하고 동양평화를 논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삼국 황제의 독립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는 이미 외교권과 군사권을 일제에게 박탈당한 지 오래되었고, 합방 당하기 직전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일본을 일단 인정하되, 한국의 자주독립국 위치를 확보한 후 동양 삼국의 평화체제를 만들어 보고자 분투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숨지게 했지만, 일제의 거대한 마수를 물리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을 불법 강점하여 국권을 박탈하고 중국을 넘보던 일제의 흉계와 야욕을 국제사회에 명확하게 환기시켰다.

또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대한 남아의 기개를 보여줌으로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저격에 성공한 후 안 의사가 삼창한 ‘코레아 후라(大韓萬歲)’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감방에서 죽음을 앞두고 촌각을 다투며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안 의사의 절박한 심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아무런 참고자료도 없는 감옥에서 동양평화의 거대한 구상을 글로 옮기던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동양평화론>이 미완성된 탓에, 국제 정세에 대한 안 의사의 안목과 평화체계 구축을 위한 예지와 판단력을 더 깊이 느낄 수 없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