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과 판박이 상태가 된 東北亞
120년 전과 판박이 상태가 된 東北亞
  • 미래한국
  • 승인 2015.07.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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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그 후 120년

“일본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만이 문제이겠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도 어쩌겠는가?”(양계초, <조선의 망국을 논함> 중에서) 

▲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은 개혁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비록 쇠퇴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시아 최대, 최강의 노대국(老大國) 중국에 노골적인 도전장을 내밀었다.

1894년 8월 1일 발발(선전포고일 기준), 1985년 4월 17일까지 8개월 2주 2일 간 지속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대국 청국을 굴복 시킬 수 있었고, 일본은 국제 정세의 영향을 받던 나라로부터 국제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영국의 주간 잡지 <펀치(Punch)>가 만화를 통해 일본이 중국을 이긴 것은 꼬마가 거인을 이긴 것으로 묘사한 것처럼 일본의 승리는 이변(異變)이었다(그림 참조). 그러나 당시 일본의 목적은 청국을 격파하는 데 있지 않았다. 당시 아시아는 이미 서구 열강들, 특히 영국과 러시아의 세력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 영국의 주간잡지 <펀치>에 실린 청일전쟁 관련 만화.

때문에 늙은 청국을 격파한 것만으로는 아시아의 패자가 될 수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래 강대국이 되기로 결심한 일본은 청국이 아닌 러시아를 마지막으로 파멸시켜야 할 적(敵)으로 상정하고 있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국제 권력 정치가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했다. 피나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서방 강대국들은 일본의 우세한 지위를, 특히 만주 지방의 이권 획득(요동반도 할양)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중국과 일본의 강화조약, 즉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되자마자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의 요동반도 획득(조약 2조)에 시비를 걸고 나왔다.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빼앗은 요동반도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청국에 다시 반환하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독일은 군함까지 파견, 일본을 위협했다.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나라는 요동반도를 탐내고 있었던 러시아였다. 영국은 일본 입장에 우호적이기는 했지만, 전쟁을 불사하고 일본 입장을 지지할 의도는 없었다. 영국은 다만 러시아의 간섭 동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수준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 후 불과 2주일여가 지난 5월 5일, 요동반도 전면 반환을 통고하고 말았다. 여우(일본)가 사냥한 토끼를 늑대(러시아)가 빼앗아 버린 꼴이었다.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의 빌미 제공 

여우는 늑대를 파멸 시키지 않으면 동북아의 패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처절하게 실감했다. 이후 10년 동안 일본은 와신상담하고 적극적인 군사력 증강을 도모했고, 결국 1904년 러시아와 일전(러일전쟁)을 벌여 또 다시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서구 열강은 일본을 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격’, 즉 세계열강 클럽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이 아시아 패권국으로 나가기 위한 첫 번째 전쟁이 청일전쟁이었는데, 아직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은 조선이었다.

국력이 일취월장하는 일본은 아직도 서구 열강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물론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은 채 중국과의 전쟁을 도발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이들 서구 열강들도 한반도와 중국에 대해 이익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야기된 어이없는 일들은 결국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을 감행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보다 300년 전 임진왜란 당시에도 그랬지만, 일본이 중국과 개전(開戰)하겠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고, 일본의 확실한 목적은 한반도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청일전쟁은 한국을 쟁탈 대상으로 삼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의 쟁탈지역은 한국(조선)이었다. 청국의 사실상의 식민지인 조선을 지속적으로 차지하기 위해, 일본은 중국의 속국인 조선을 빼앗기 위해 싸웠다.

일본은 중국을 격파할 경우 조선을 차지함은 물론, 중국 그 자체를 대상으로 다른 열강과 각축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계획은 궁극적으로 러시아를 격파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세기 말 일본의 강대국화 대전략은 19세기 중반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전략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오늘 일본의 침략 정책을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지만, 이미 세계의 강대국이 되기 위해 장기적인 국가 대전략을 수립하고 시행해 나가는 일본을 막을 힘이 전혀 없었던 조선의 무능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300년 전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던 조선은 19세기 후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이미 조선의 손을 떠나 있는’ 처절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나라가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우리의 운명은 열강 대결의 최후 승자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국제정치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종속변수가 되고 만 것이다. 

▲ 1894년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해 체포된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가운데).

조선 지도부, 참혹한 리더십의 실상 

개혁 개방한 일본의 국력이 날로 성장하고 있던 동안 조선의 국가 리더십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나을 바 전혀 없는 세력의 손아귀 속에 있었다. 1870년대 중반 조선 조정의 황당한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청일전쟁의 발발 원인, 그리고 조선 멸망의 큰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다. 당시 왕비인 민비는 대단한 권력자였다. 

“민비 측에서는 대원군을 해치기 위해 점쟁이 무당 등의 치제(致祭)와 굿이 자주 있었다. 그중에는 서대문 밖의 이름난 점쟁이가 민비의 부탁으로 대원군이 병들어 죽게 하는 치성을 드려왔다.

이 일을 알게 된 대원군은 그 점쟁이를 운현궁으로 불렀다. 그런대 대원군 손에 죽을 줄 알았던 그 점쟁이는 오히려 운현궁에서 여러 날을 머물면서 후한 대접을 받고 선물까지 받고 나왔다. 이를 알게 된 민비는 그 점쟁이가 대원군에게 매수된 것으로 알고 죽여 버렸다.”   

“민비는 세자(순종)의 복(福)을 빌기 위한 기도 행사에 나라의 재정을 많이 낭비했다. 금강산 1만2천봉마다 돈 1천 냥, 쌀 한 섬, 비단 한 필씩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하며 매년 여름에는 한강에서 수신제(水神祭)를 올려 쌀 5백석의 밥을 지어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을 먹였다고 한다.” 

한강에 500석으로 지은 쌀밥을 물고기 먹으라고 내다 버린 민비는 군졸들의 식량에 모래를 섞어서 지급했다가 봉변(임오군란, 1882년 6월)을 당한 그런 나라의 국모(國母)였다. 군란 주동자 중 한사람인 정의길이 군란 중 민비를 붙들고 실랑이를 할 때(정의길은 민비를 알아보지 못했다.

임오군란 당시 민비는 일반 궁녀 차림으로 변장하고 있었다) 민비를 자신의 누이 홍 상궁이라 둘러댄 후, 민비를 업고 도망쳐 민비를 구출한 홍계훈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차후 민비의 주선으로 승승장구, 1894년 4월 동학군 토벌 총사령관인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가 되어 출정했다. 

애초 장군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홍계훈은 동학군과 싸움도 하기 전에 ‘경군(京軍) 만으로는 도저히 동학군을 대항할 수 없으니 빨리 청병(淸兵)의 원조를 청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서울에 타전했다. 한 국가의 정규 군사력이 낫과 죽창으로 무장한 농민군을 제압하지 못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SOS를 날린 것이다. 

<조선의 망국을 논함> 

현장 상황을 알 길이 없는 조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결국 고종은 자신의 신민(臣民)인 조선 농민들의 반란을 제압해 달라고 남의 나라 군사력을 초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 군사적인 진출을 열망하며, 중국과의 일전(一戰)을 학수고대했던 일본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들은 한반도 및 주변 해역에서 치러졌다. 평택 앞바다 풍도 부근의 해전에서 일본은 예상을 뒤엎고 훨씬 막강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청국 해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전쟁에 승리했지만 열강 3국의 간섭으로 이득을 취하지 못해 분을 삭이지 못하던 일본은  1895년 8월 민비를 참혹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을미사변). 

당시 조선은 일본 깡패들이 왕궁 한가운데서 왕비를 살해하는 것도 막지 못하는 수준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물론 당시 경복궁에는 경비대가 있었다. 경복궁 경비대장은 바로 13년 전, 위기에 처한 민비를 누이라고 둘러대고 업고 도망쳤던, 나중에 동학군 토벌군 사령관이 되었던 바로 그 인물 홍계훈이었다. 그도 일본 병사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앞에서 인용한 일화들은 오래 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던 역사학자의 책에서 읽은 글이 아니라면 도저히 믿기 힘든 황당무계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젊은 시절 우리나라가 멸망하던 무렵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순간순간들에 좌절한 적도 많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나?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래 된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한반도 주변 정세가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120년 전과 점차 흡사하게 변하고 있다. 최근 현대어로 번역된 중국의 지식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지은 <조선의 망국을 논함>이라는 책에 우리를 뼈아프게 하는 구절이 있다. 

“일본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것만이 문제이겠는가? 조선이 망하는 길을 취하지 않았다면 비록 100개의 일본이라도 어쩌겠는가?” 

맞는 말이다. 국제정치라는 영역에 도덕은 없다. 강한 나라를 비판하는 것은 마치 동물의 세계에서 맹수를 비난하는 것과 같다. 국제정치는 아직도 그 수준이다. 우리는 강대국도 아니면서 살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양계초의 말대로 조선의 독립과 자존을 위한 노력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어치우려는 노력의 100분의 1도 되지 못했는지 모른다. 

1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가? 

급부상한 중국이 공세적으로 나오는 것은 국제정치상 아무런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막강해진 중국 앞에 일본이 저러고 있는 것 역시 국제정치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이웃에 막강한 나라가 등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 역시 국제정치의 정상적인 현상이다. 

자신의 한국어판 번역서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주는 서문에서 존 미어세이머 교수는 현재 한국에 와 있는 미군의 목적은 중국을 견제하는 것임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60년 전 한국에 온 미군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왔었으며, 지금 견제의 대상은 소련 아닌 신흥 강대국 중국으로 바뀌었다. 냉전 시대 한국은 미국의 소련 견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한미동맹은 최고의 동맹이었다. 

지금도 그런가? 혹시 아니라면 한미동맹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현재 일본은 미국의 대전략, 즉 중국 견제 전략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나라다. 베트남, 인도, 호주,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 대부분도 중국이 무섭다며 미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미국 학자가 재미있는 계산을 했다. 미국의 중국 견제 전략에 적극 동참하는 3개국인 일본·인도·베트남의 인구, 경제력, 군사력 합계가 중국의 인구, 경제력, 군사력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은 중국 견제 전략에서 느긋해졌다. 게다가 에너지 혁명으로 국력이 급격하게 증강하는 미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국제정치로부터 관심을 줄이라고 조언하는 경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과 동맹국이라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최대, 최고의 전략자산이다. 한미동맹을 빼면 우리나라의 처지는 청일전쟁 무렵보다 더 좋을 것도 없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인 한미동맹을 모르는 사이에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종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관에 약 1년간 피신해 있었다(俄館播遷). 당시 러시아는 열강 모두로 부터 부정적인 인식을 받던 나라였다. 아관파천은 열강들로 하여금 조선이 러시아와 가까워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게 한 일이었다.

당시 강대국들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몇 년 후 일본의 한반도 합병을 눈 감아 준 것은 아닐까? 오늘날 강대국 정치에서 120년 전 러시아와 유사한 인식을 받고 있는 나라는 혹시 중국이 아닐까? 

억지로 꿰맞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생각이 복잡해져 골치가 아프다. 강대국 국제정치 속에서 늘 당하고 살았던 대한민국의 국제정치학자 한 명의 과민 반응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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