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중국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한국으로 직수입됐을 가능성
지난 5월 18일 인도의 모디 총리가 방한했다.
인도 개혁을 외치는 모디 총리는 서민 출신이었고, 누구보다 경제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어서 우리로서는 반가운 손님을 맞은 셈이다.
이 과정에 모디 총리를 가슴으로 반기는 한국인들이 또 있다.
바로 가락종친회. 허 씨, 이 씨, 김 씨 3성(姓)의 종친회가 모여 만든 가락종친회는 2000년 전 한반도를 찾아 왔다는 김수로 왕의 부인 허황옥을 종조(宗祖)로 모시는 단체다. 모디 총리도 이런 한(韓)-인도 교류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고대 인도 아요디아국 출신의 공주로 머나먼 동쪽의 나라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결혼해 황후가 된 허황옥. |
인도 정부는 가락종친회와 함께 허황옥의 고향인 우타라 프라데시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
2000년 전 허황옥이 정말로 인도에서 해로(海路)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 왔는지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이 문제를 40여년 붙잡고 연구했던 김병모 박사(한양대 명예교수)는 김수로 왕의 왕릉 대문에 그려진 한 쌍의 물고기, 그리고 왕비의 무덤 앞 능비에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이라고 새겨진 글자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인도와 동남아시아 유럽, 미국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결과 김 박사는 허황옥의 선조들이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서 처음에는 중국으로 갔다가, 거기에서 가야로 오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마치 한편의 판타지 영화와 같은 이 스토리는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 왜 허황옥은 가락국이라는 나라를 선택했을까 라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에 가장 신빙성 있는 대답은 이미 허황옥 집안에서 가락국을 잘 알고 있었고, 적어도 가락국의 지배층과 어떤 교류가 있어 왔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가락국-중국 간의 교류가 아니라, 어쩌면 가락국과 인도 간에 오래된 교류의 연장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인도에서 직접 한반도로 불교 전래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라는 문헌에는 한반도 최초의 불교 사찰이 신라 남해왕 원년(AD 4년)에 창건된 것으로 등장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고구려 소수림 왕 2년(372년) 전래설보다 370년 빠르고, 불교가 처음 중국으로 전래된 것보다 63년 빠르다.
허황옥이 가락국에 온 시기를 추정해 보면 대략 1세기경이니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온 허황옥은 배에 석탑을 싣고 오는데, 이 탑이 불탑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또, 수로 왕(AD 42~199)은 불교적 행동을 한 기록이 있고, 그 아들들은 승려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공식적인 전래로 보는 연도보다 300년가량 앞선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허황옥의 가락국 도착 이야기는 중국이 아닌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함께 전승된 신화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이러한 공주, 또는 왕비 전래 신화는 남방 아시아에서 보편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가락국에 불교가 인도에서 전래되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중국보다 앞설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 점부터가 본격적인 역사 탐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인문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천독(天毒)이라고 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학자들은 천독이라는 국명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천독은 천축(天竺)이라 불렸던 Sindu, 그러니까 인도 지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풍수지리의 대가로 사기(史記) 지리지를 주해했던 곽박(郭璞)의 해석이기도 해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도대체 고조선 옆에 인도를 뜻하는 ‘천독’이 함께 있었다는 점은 수수께끼였으나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적극적인 해석이 보류되어 왔다.
학자들이 보류한 역사 해석에는 상상력이 필요하게 된다. 산해경의 이 구절 다음은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其人水居),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人愛之)”로 끝맺는다. 그렇다면 산해경의 해석을 달리 해볼 수 있다.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라고 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 천독(天毒)인 그 사람들(其人)은 물가에 살며(水居),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天毒其人水居人愛之).”
이렇게 해석하면 고조선 사람들의 정체성을 천독이라고 산해경이 지시했다는 설명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이들이 2000년을 넘는 시기에 언급되었다면 천독의 정체는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청동기 문화를 전파한 인도-아리안인들로 볼 수 있다.
사실 천축(天竺)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인도라기보다는 인도의 북부지역, 즉 허황후 조상들의 고향이었다는 우타라 프라데시와 가까운 우즈베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가까운 곳이고, 이 지역은 실크로드를 따라 쿠샨 상인들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곳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고조선 초기에 퉁구스인들의 지대에 교역을 하던 인도-아리안들도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어쩌면 환인(桓因)의 아들 桓雄(환웅)족들이고, 고조선에 청동기 문명을 전파한 주인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추정해 본다면 어째서 한국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과는 달리 시베리아와 알타이 지역, 카라수크와 같은 인도 아리안들의 것들과 유사한지 설명될 수 있다.
▲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석탑돌. 불탑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불교가 한반도에 공식 전래된 시기(서기 372년)보다 300년 가량 앞서 들어왔다. |
이들 천독인들을 통해 불교와 친연성이 있던 미트라교(미륵신앙)가 고조선 지배층의 종교를 형성했고, 이후 고조선의 유민이 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세력 가운데 가락국에 중국식 불교가 아닌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성격을 띤 불교가 들어오면서 마치 고향의 정신을 만난 것 같이 가락국과 신라, 백제의 지배층들은 불교를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중국에서 불교를 가져온 원효는 이미 강릉 지역에 관음사상이 널리 퍼져 있던 점에 의아해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역사적 공백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우고 나면 관련된 팩트들을 다시 한 번 새로운 방법으로 검증해 보게 된다.
즉 고조선의 조선의 3000년 전 한자음은 지금과 같은 ‘조선’이 아니라, 한어고음표(漢語古音表)에 의하면 ‘de-sa-r’로 발음된다는 것인데, 이때 ‘데사/데시’는 산스크리트어나 힌두어로 나라 또는 지역을 의미한다.
인도-한반도 잇는 문명의 교역로
그래서 허황후 조상들의 고향인 우타라 프라데시는 ‘위에 있는 프라 지역’이라는 뜻이다.
또 환웅이 머물렀다는 고조선의 아사달(阿斯達)의 한어 고음(漢語古音)이 A-sa-ta-t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산스크리트어나 힌두어로 ‘Asta’ 즉 ‘고향’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한 조선의 유민들이 바로 신라 6촌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가락국도 그들과 같은 문화적 DNA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허황옥 이동경로 |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오랜 문명의 교역로가 있었을 거라고 가정해 본다면 그것이 바로 청동기의 전래 루트이자 불교의 전래 루트이고, 동시에 알타이 문명의 전래 루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락국 지배층들과 이미 먼 부족적 친연관계에 있던 허황후 사람들의 방문 루트였을 것이다.
그런 흔적은 우리 전통의 떡살 무늬와 다식(茶食) 무늬가 다름 아닌 인도 아리안의 상징 문양들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음이 말해 준다.
인도 모디 총리 방한으로 주목받는 2000년 前 사랑
모디 총리는 방한 첫날인 5월 18일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가진 국빈(國賓) 만찬에서 고대 인도 아요디아국(國)출신의 공주가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 왕과 결혼해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된 과거 역사를 언급하면서 “인도인들이 한국에 매료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있는 ‘허 황후 기념비’ 개선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해 이와 관련한 양국 교류 상징물의 재정비사업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양국 정상이 회담을 가진 같은 날 가락중앙종친회도 2001년 3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P) 주 아요디아시(市)에 세운 ‘허황후 기념공원’이 UP 주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재정비된다고 밝혔다.
‘허황후 기념공원’은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인도 교류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삼국사기 가락국기에 따르면 배를 타고 고대 가락국(가야)에 도착해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 왕과 결혼한 황후 허황옥이 고대 인도 아유타(阿踰陀, 아요디아)국 출신으로 전해진다.
허 황후는 이후 김해 김 씨와 김해 허 씨의 시조가 됐다.
한국에 있는 그의 후손들은 2001년 3월 초 한국어와 힌디어로 쓰인 허 황후 추모비와 함께 현지에 기념공원을 세웠다.
더불어 그해부터 매년 3월 허 황후의 고향 아요디아시를 찾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종친회에 따르면 허 황후 기념공원과 매년 열리는 추모제는 현지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매년 봄 김수로 왕을 추모하는 춘향대제(春享大祭) 시기와 맞물려 종친회원들이 현지를 찾아 한국 전통 제례를 선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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