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중국 한(漢)나라 시대 때 흉노족의 수장이었다가 무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던 김일제(BC 134~BC 86년) 후예였다는 주장은 우리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다.
이 주장은 처음부터 학설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김유신 흉노후예설’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사실 추리소설 기법을 동원한 재야 사학자들로부터였다.
1998년 1월 경향신문은 베이징발 뉴스를 통해 중국 산시성에서 유목민인 흉노 김씨의 후예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새로 발견된 흉노족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는 중국 중부 산시성(陝西省) 츠양현(紫陽縣)으로, 이곳에 사는 김 씨는 모두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의 후손들로 확인됐다는 것.
<한서 김일제전>에 따르면 김일제는 한무제 당시 흉노를 격파한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부모 형제와 함께 포로로 붙잡혔는데, 무제는 당시 14세였던 그를 몹시 아꼈다.
무제는 쇠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흉노족의 습속에 따라 그에게 김 씨를 사성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손들은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 지금의 후베이(湖北)·산둥(山東)·산시(陝西) 등지에 분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김일제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 발견은 중국의 민족 융합사와 유목민족의 중국 내륙 이동사의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물론 이 발표가 있기 전까지 김유신의 흉노후예설은 국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철을 다루는 야금술과 함께 신라에 들어와 제4대 임금이 된 석탈해가 흉노족 출신이거나 최소한 흉노족의 국가를 거쳐 신라로 왔을 것이라는 설은 가끔씩 주장된 바는 있었다.
중국 정부가 김일제 후손들이 중국 내에 집단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민족주의 재야 사학자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다. 당시 환단고기 열풍과 함께 1997년 IMF금융위기는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 민족의 조상들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기 좋은 환경이었다.
재야사학자들 ‘김유신=흉노후예설’ 주장
선봉에 나선 이는 소설가 강준식 씨였다. 그는 중국 김일제 후손 집성촌 뉴스가 보도됐던 그해 1998년 8월에 <김씨의 뿌리>라는 역사소설을 펴내게 된다.
강 씨는 이 소설에서 김씨의 난생설을 담고 있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반박한다. 그리고 이들 고서보다 500년 전에 쓰인 신라 문무왕릉의 비문에 주목한다.
문무왕릉 비문은 김 씨의 선조가 투후 김일제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한서>도 흉노의 왕자인 그가 한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최초로 하사받았다고 <김일제 열전>에서 전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
소설은 김일제의 아버지가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었고, 그는 진시황의 5세손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신라 김씨의 조상은 중국 진나라 사람이었다는 것. 저자는 소설에서 신라와 가야의 통치그룹이었던 김씨는 중앙아시아와 몽골, 중국, 한반도, 일본을 지배한 종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렇게 소설로 시작된 ‘김유신=흉노후예설’은 일반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게 되면서 여러 재야학자들의 신라 문무왕비에 대한 무리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사실 문무왕비는 마모가 심해 김유신의 선조가 어떻게 김일제의 후손이 됐는가에 대한 전체적 연관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이 비문에 대한 상상력적 고증을 하게 되면서 ‘김유신=흉노왕족설’은 점차 굳어지게 된다.
사단은 이듬해인 1999년에 일어났다.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그해 4월 신라 김씨인들 스스로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9세기 재당(在唐) 신라인의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덮개돌에 새겨진 비문을 찾아 연합뉴스에 제공했다.
▲ 9세기 대당고김씨부인묘명 |
그 묘지석에는 분명하게도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라고 적고, 그에서 비롯된 “먼 조상 김일제가 흉노의 조정에 몸담고 있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중략) 투정후라는 제후에 봉해졌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로써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여기에는 고대사에 관해 학계로부터 나름 신임을 받고 있던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의 코멘트와 해설이 더 그 신빙성을 더해줬다.
하지만 이 비문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비문의 출토지가 다름 아닌 중국 정부가 발표했던 김일제 후손들의 집성촌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묘지석의 주인공이 대당신라인인지, 아니면 그곳의 중국인으로 살던 김일제 후손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자료를 제공한 권덕영 교수는 묘지명에서 김씨 부인의 조부로 등장하는 김충의와 부친 김공량이 “모두 기존 문헌을 통해 이미 알려진 재당 신라인이라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그런 문헌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
결국 KBS의 <역사스페셜>이 ‘김유신=흉노왕족설’에 가담하게 되면서 오늘날 이 주장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흉노·신라, 연관성 찾기 쉽지 않아
그렇다면 김유신은 흉노왕족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다만, 김유신이 신라를 통일한 후, 김씨 왕조의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중국 내 김일제 후손들의 조상인식 관행을 차용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는 이유는 신라 김씨의 두 주종인 경주 김씨의 김알지와 김해 김씨 김수로 모두 흉노족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들이 존재했던 시기는 김일제의 생존시기로부터 멀지 않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라나 가야에 들어왔을 때 흉노족의 문화, 적어도 이름이나 종교에서 그 흔적이 있어야 한다. 이들이 김씨(金氏)의 성을 갖게 된 배경은 황금알이라는 상징성을 통해 처리되고 있는데, 그런 난생설화는 흉노족의 문화와는 관계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라 문화가 북방 흉노계의 문화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라 금관은 오직 김씨 왕조의 릉에서만 발굴되며, 그 양식과 모티브는 분명히 흉노족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도대체 흉노의 문화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흉노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여전히 국제학계에서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현재도 논쟁 중에 있다. 그들의 언어가 어떤 계통이었는지, 아울러 인종적으로 몽골리언인지 인도-이라니언, 즉 아리안인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다.
▲ 가야금관 |
하지만 분명한 것은 흉노라는 정체성이 특정한 집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범 부족적인 정치적 연대였다는 점에서 그 인종과 문화, 언어마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었을 것이라는 게 오늘날 학자들이 가진 흉노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흉노의 후손이라고 받아들여지는 돌궐이 투르크라는 정치적 연맹체의 이름을 내걸었을 때 중앙아시아의 거의 모든 유목 부족들은 자신을 투르크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신라를 통일하는 데 공헌한 김유신 그룹도 어떤 형태로든 당시 유일한 강대국인 당나라와 일정한 사대적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오랑캐 흉노를 정벌한 중국 왕조의 충직한 가신으로 그 주종관계를 확립하고 있던 김일제 후손들의 역사에 자신들을 같은 김씨(金氏)로 연대를 모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김씨 성은 김일제가 최초가 아니다. 사실 김일제에게 김(金)이라는 성을 하사한 무제, 그의 어머니가 바로 김씨였다. 그녀의 이름은 진왕순(金王孫)이었는데 무제를 낳기 전에 이미 평민과 한번 결혼했던 여자였고, 무제와는 배다른 딸들이 있었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