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⑩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⑩
  • 이춘근 박사
  • 승인 2014.10.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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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근 박사의 전략이야기]

어떤 전쟁일지라도 무섭지 않은 전쟁은 없다. 수백만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 버리는 처절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양식에 따라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이 더 많은 피해를 입는 전쟁도 있다. 전쟁은 승리한 나라일지라도 그 결과 때문에 나라가 쇠잔하고 궁극적으로 몰락, 붕괴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은 제국을 이루고 있던 강대국을 몇 개나 쓰러뜨렸을 정도로 그 충격과 영향력이 대단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 오토만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등 유럽과 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호령하던 대제국들 3개가 붕괴됐다. 그리고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독일 제국 등도 도무지 다시 제국으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

뒤의 세 제국들은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한 전쟁인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두 역사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특히 1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라진 대 제국 중 러시아의 경우는 전쟁이 한 나라의 역사는 물론 지구 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보여줬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러시아 제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탱할 능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적인 반란도 무마할 수 없게 됐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의 세례를 받은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1917년 역사상 최초의 공산국가인 소련(Soviet Union)의 건국에 성공한다. 그리고 소련은 그 후 74년 동안, 즉 1990년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세계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세력이 됐다.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은 러시아

서방측의 학술서적 및 언론은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 1차 세계대전을 분석하고 소련 혹은 동방의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간행했다. 그러다 보니 1차 세계대전은 마치 서유럽 강대국들의 전쟁이었던 것 같은 고정관념이 형성됐다. 1차 세계대전 하면 연상되는 것들 또한 서유럽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독일과 영불 연합군이 만들어 놓은 참호(Trench)들과 참호 속에서 고생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병사들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동부전선보다는 서부전선이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뤄졌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독일이라는 강대국은 세계대전을 두 차례 일으켰을 때마다 동서 두 개의 전선을 형성했는데 널리 알려진 것은 서부전선이었지만 정말 치열한 전쟁이 진행된 곳은 사실 동부전선이었다.

우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라는 1차 세계대전 관련 소설과 영화는 익히 알고 있지만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격렬하게 충돌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연합국 측이 542만1000명,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등 추축국(樞軸國, Central Powers) 측이 420만9000명이 전사해 참혹한 전쟁이었다. 전쟁을 도발한 독일은 203만7000명으로 최대의 사망자를 낸 나라다.

독일을 제외하고 가장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나라는 러시아다. 181만1000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했다. 전쟁 후반에 연합국 편에 참전,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미군 전사자 11만4000명과 비교하면 러시아가 연합국의 승리에 얼마나 큰 기여와 희생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겠다.

연합국 병사 중 총 484만6376명이 포로가 됐는데 그 중 350만명이 러시아 병사였다는 사실은 연합국의 1차 세계대전 승리에 러시아가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다시 강조해 주는 숫자다. 연합국 중 포로로 잡혀간 병사들이 러시아 다음으로 많았던 이탈리아의 경우 53만명이었다.

부상병을 포함한 인명 피해 중 러시아군의 피해는 연합국 전체 인명 피해의 3분의 1이 넘었다. 연합국의 총 인명 피해는 1729만2863명이었고 이중 러시아의 인명피해는 676만1000명에 이르렀다. 약간 과장된 것으로 사료되는 바도 없지는 않지만 소련군 전사자 및 부상자를 910만명으로 추정하는 자료도 있을 정도다.

이처럼 혹독한 전쟁을 치른 러시아는 전쟁을 치르던 중 국내의 공산혁명에 의해 국가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공산군, 즉 붉은 군대(Red Army)는 단독적으로 독일과 강화를 맺으며 1차 세계대전의 전역(戰役)으로부터 스스로 탈퇴해 버렸다. 공산주의 국가가 된 소련이 자본주의-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에 더 이상 남아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독일의 전시 협상

전쟁이 발발한 직후 러시아와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러시아가 신속하게 작전함으로써 독일군의 동쪽 방향을 공격해 달라고 요구했고, 러시아군은 프랑스의 요구를 만족시킬 정도로 작전을 수행했다. 독일군이 상상했던 것보다 러시아군의 진격은 훨씬 빨랐다.

러시아는 렌넨캄프, 삼소노프 장군이 이끄는 2개 군을 투입해 초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이에 독일군 참모총장 몰토케는 동부전선의 8군 사령관을 교체해야 했을 정도였다. 서부전선의 맹장 루덴도르프 장군이 동부전선으로 파견됐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탄넨베르크(Tannenberg) 섬멸전’으로 널리 알려진 대회전에서 승리해 러시아군을 동 프러시아 지역으로부터 격퇴시키며 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신속히 격파하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던 ‘슐리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독일은 러시아와의 평화 교섭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독일 참모총장이던 팔켄하임 장군은 독일의 군사력으로 두 개의 전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러시아와 단독 평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당시 독일 재상 짐메르만과 외무차관 등은 범 슬라브주의(Pan Slavism)를 그대로 놔 둘 수는 없다고 했고 전선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장군은 팔켄하임 장군의 구상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7월, 독일과 러시아 간에 비밀 교섭이 시작됐지만 독일이 폴란드 정부를 수립한 1916년 11월 러시아는 독일과 더 이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러시아는 독일이 지배하는 폴란드의 존재를 놔둔 채 독일과 휴전을 맺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의 100만명 이상의 병력을 잃은 러시아는 속으로부터 곪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이 예측했던 것과 전혀 달리 산업국가인 영국에서가 아니라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었다. 1917년 2월 러시아의 니콜라스 2세는 공산 혁명군인 붉은 군대에 의해 축출됐고 그 직후 독일의 힌덴부르크는 전쟁이 곧 종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됐다.

독일과 러시아는 크로이츠나하에서 1917년 4월 23일 그리고 5월 17~18일 회의를 개최해 단독 강화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혁명군인 붉은 군대(Red Army)는 자신들이 보기에 독일과 별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편에서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권은 전쟁을 더 지속할 여력도 없었다. 결국 소련은 독일과 단독 강화를 하게 된다. 역사상 유명한 브레스트-리토브스크(Brest-Litovsk) 조약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다

1917년 11월 8일,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없었던 러시아의 혁명정권은 ‘평화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에 입각해 트로츠키는 11월 26일 독일에 평화 교섭을 제의한다. 연합국 측도 초청했지만 독일은 찬성했고 연합국들은 거절했다. 12월 15일 브레스트 리토브스크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권이라는 러시아 혁명정권이 자신이 최악으로 미워하는 군국주의 정권과 회담한 것이다.

독일은 브레스트-리토브스크 이북을 러시아 국경으로 하라는 엄청난 요구를 했다. 소비에트 정부 내에는 “독일과는 혁명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저항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레닌은 독일과 협상하지 않으면 소비에트 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18년 2월 10일 재개된 독일과의 교섭에서 트로츠키는 평화 체결을 하지 않은 채 전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 독일을 놀라게 했다. 독일은 다시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2월 18일 소련은 독일이 제시했던 조건을 받아들여 평화조약을 수락했다. 1918년 3월 3일 소련과 독일 사이에 평화조약이 성립됐다.

소련과 독일의 평화조약은 연합국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연합국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새로이 건설된 나라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국가라는 조직은 물론 어떤 조직도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국가의 경우 살아남는 일이란 바로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일이다. 명분보다 이익이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이익인 국가안보를 위해 무슨 일이던 가능하다는 것이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얻게 되는 진리다.

당시 분노했던 영국, 프랑스, 미국은 실제 군사력으로 소련의 새 정권을 붕괴시키겠다고 개입했었다. 극심한 반일(反日)이 우리나라의 안보에 위해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우려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소련의 행동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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