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은 뜨거웠다. 관객으로서 영화관에 입장하는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사진이 찍히는 경험을 했으니 말 다했다. 지난 6일 오전 11시,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인 ‘다이빙벨’은 해운대 센텀CGV에서 그렇게 떠들썩하게 공개됐다.
티켓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빈자리가 곳곳에 보였고 관객들은 술렁였다.
“야, 아까 이상호 봤어? 이거(영화) 만든 사람이잖아.”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세월호는 아직 바다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극장에 앉아 연예인이라도 구경하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고 있다니. 그래도 되는 걸까.
누군가는 지금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영화에 대담하게도 ‘다이빙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무도 예측 가능한, 그래서 더 ‘슬픈’ 영화
단언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당신의 예상 범위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용부터 목적까지 철저하게 ‘그런’ 영화인 것이다.
시작은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이상호 기자가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며 비아냥거리는 장면부터다. 몇몇의 관객들이 피식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들이 원하는 장면을 보게 돼 기쁘다는 듯. 그 순간 그들에게는 이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였을지도 모르겠다.
현 정권에 대해 불만을 넘어선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은 또 있었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과 김석균 해양경찰청 청장이 유가족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마치 ‘스피드 퀴즈’라도 푸는 것처럼 구조요원이 몇 명이나 투입됐는지를 질문 받고, 마음에 드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자 노골적으로 망신을 당한다. 이때 카메라에 잡힌 장관과 청장 두 사람은 마치 고양이집에 생포된 생쥐처럼 바들바들 떠는 것 같았다.
이상호 감독은 이 장면을 공개하는 게 자신들의 뜻을 전달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건 발생 6개월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많은 관객들에게 이 장면은 ‘불편한 인민재판’처럼 느껴질 확률이 대단히 높아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도 논쟁의 소지가 있다. 이상호 기자는 행진하는 유가족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끝내 그를 눈물 흘리게 한다. 나는 이 장면이 ‘친구가 죽은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던 JTBC의 인터뷰와 근본적으로 뭐가 다른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떤 것이든 유가족의 슬픔과 좌절과 상처와 절망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활용해도 된다는 걸까? 바로 그런 태도야말로 세월호 사건을 대하는 많은 언론의 후진적 태도였음을 이 영화는 모른척한다. 그러면서 다른 언론들을 매도하는 데 집중한다. 전형적인 ‘선한 나, 악한 너’의 논법이다. 이번 영화를 둘러싼 논쟁이 근본적으로 불쾌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애초에 이 영화에서 논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감정에 치우쳐 이성적인 접근 그 자체를 상실한 것도 영화 ‘다이빙벨’의 패착이다. 모든 것은 해경과 정부의 거대한 음모이며 이상호 기자와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철저한 피해자라는 식이다. 그 정점에서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결론은 차라리 ‘충격적’이라고 말할 만하다.
1시간30분여의 러닝타임을 통과하며 이 영화는 다이빙벨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뮬라시옹’이라 해야 할지 ‘하이퍼리얼리티’라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지점 어디쯤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영화적(?) 면모의 전부다.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그들’만 누릴 수 있는 변명의 특권
애초에 다이빙벨이 전국적인 관심을 얻었던 이유는, 그 허술하고 위험해 보이는 장치만이 유속과 날씨에 관계없이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다고 이종인 대표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이빙벨의 성과는 1시간57분 동안 잠수에 성공한 것이 전부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 실패의 모든 책임을 정부와 언론 탓으로 돌리는 게, 그래서 이종인 대표의 눈에는 여전히 예쁘게만 보일 다이빙벨의 명예를 회복하는 게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나 중요했단 말인가?
그저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것만으로 ‘성공’이라는 단어를 허락할 수 있다면 이 영화가 ‘악마’로 규정하고 있는 해경이야말로 진정 성공적인 집단일 것이다. ‘구조자 0명’이라는 선동구호와는 달리 해경은 사고 직후 표류 중인 많은 생존자를 구출해냈다. 해경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을지언정 그 수많은 ‘성공’들이 제값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그들이 이종인이나 이상호만큼 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마저 해경 해체를 선언한 시점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가장 극심한 부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이 모순을 밝혀낼 수 있는 예술가라는 게 과연 한국 영화계에는 존재하기나 할까?
이상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GV) 행사에서 “4‧16 이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지만 그건 신만이 할 수 있다”며 “4‧16 직후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다. 우리는 필요하다면 4‧16 이전으로도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배가 왜 침몰했는지를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앞으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는 유병언의 ㅇ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놓고 이상호 기자는 영화 종료 후 치러진 GV에서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귀결시켰다. 대선에 대해서는 ‘부정선거’라고 언급했는데, 마치 일반명사처럼 당연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의 판단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모든 한국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배가 ‘왜’ 침몰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는 이 현실은 과연 정상적인가?
GV 행사의 질문은 주로 영화의 관점에 동의하는 관객들에게서 나왔다. 그 중에 몇몇은 울기도 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행사 사회자는 “우려와 달리 수준 높은 논의가 진행돼서 다행”이라며 “앞으로도 이렇게만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3차원의 현실에서 있었던 일을 천연덕스럽게 부정하는 4차원의 영화, 그리고 가히 정치 집회라고 봐도 무방한 분위기의 GV가 그렇게 끝났다.
이 모든 우여곡절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관객’의 하나로 남고 싶었던 나는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다이빙벨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명제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 ‘수준 낮은’ 관객으로 살아가겠다고.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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