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아들’로 기억되길 원했던 남자
‘인민의 아들’로 기억되길 원했던 남자
  • 미래한국
  • 승인 2014.08.22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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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탄생 110주년

지난 8일부터 중국은 ‘개혁·개방의 총사령관’ 덩샤오핑(鄧小平) 탄생 110주년(8월 22일)을 맞아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견인시킨 덩샤오핑의 일대기와 그가 주도한 개혁개방 운동을 재조명하는 48부작 다큐드라마 ‘역사적 전환기의 덩샤오핑’을 방영중이다.

중국 공산당 중앙문헌연구실, 쓰촨(四川)성 위원회가 조직, 지도하고 북경 화영 문헌영사문화유한공사와 중국 CCTV가 공동 제작한 이 드라마는 촬영에만 5년이 소요됐으며 중국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이 총출연한다.

중국에서 덩샤오핑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어느덧 그의 탄생 110주년이 지났다. 중국의 지난 110년이 ‘결정적인’ 시간이었다면 그 이유의 상당 지분은 바로 덩샤오핑 덕택일 것이다.

2011년 10월 에즈라 보걸(Ezra Vogel)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덩샤오핑 평전’은 2013년 1월 중국 본토에서 번역 출간돼 65만부 이상 팔리며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한국에는 2014년 1월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보걸 교수는 1930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1958년 하버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부터 2000년 퇴직할 때까지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93년부터 1995년 2년간 잠시 대학을 떠나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동아시아 문제 분석관으로 활동했다.

레이건 美대통령과 덩샤오핑

“덩샤오핑 평전은 힘든 도전”

현재는 하버드대 명예교수로 재직하며 동아시아 문제 관련 학술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덩샤오핑 평전’ 외에 1979년 출간된 ‘세계 제일 일본(Japan As Number One)’과 2000년 출판된 ‘아직도 일본은 넘버원인가?(Is Japan Still Number One?)’를 미국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한국과 관련된 도서로는 아직까지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박정희 시대: 한국의 전환’(The Park Chung Hee Era: The Transformation of South Korea)이 있다.

덩샤오핑 평전의 서문에서 보걸 교수는 자서전을 기록한 적이 없고 말수가 적었던 덩샤오핑의 성격 탓에 그의 인생과 시대에 대한 책을 집필하는 것은 힘든 도전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못 말리는 워커홀릭’(driven workaholic)이라고 소개한 보걸 교수는 여러 차례 베이징을 비롯한 덩샤오핑의 고향 쓰촨성 관안현(廣安縣)을 방문해 중국의 역사학자, 덩샤오핑의 자녀들, 덩샤오핑 밑에서 일했던 간부들을 만나 ‘인간 덩샤오핑’을 심도 있게 취재했다. 더불어 덩샤오핑을 직접 만난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미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등 미국 관리들도 인터뷰했다.

이렇게 태어난 ‘덩샤오핑 평전’은 총 1100여 페이지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덩샤오핑의 삶과 업적, 중국 현대사, 그리고 앞으로 중국이 해결해야 될 과제를 풀어낸다.

보걸 교수가 리콴유, 호치민 등 뛰어난 동아시아의 지도자들을 뒤로 하고 덩샤오핑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걸 교수는 현재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최대 화제는 ‘중국’이며 현대 중국의 성장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덩샤오핑이라 평가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시절이던 1975년 5월 덩샤오핑은 새로운 기술과 선진 조직 관리를 위한 전략을 구체적으로 배우기 위해 산업, 수송, 경영, 과학 등 각 분야의 고위급 간부들과 함께 5일간 프랑스로 해외연수를 떠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돌아온 덩샤오핑은 해외연수의 신봉자가 된다. 그는 닫혀 있는 중국을 열기 위해 관리들을 해외로 파견하고 외국 전문가들을 초빙했으며 외국 서적 번역을 장려한 장본인이다.

그는 중국이 여러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음을 판단하고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 각 분야 전문가들이 현대적인 선진국에서 직접 보고 배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얼마 후 마오쩌둥(毛澤東)의 죽음과 문화혁명 당시 권력을 휘두른 4인방(Gang of Four)의 체포로 중국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이 여파로 한동안 활발한 해외연수는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1978년을 시작으로 많은 고위급 간부들이 20여 차례에 걸쳐 50개국으로 해외연수를 떠났다. 스위스, 서독, 덴마크, 벨기에 등 서유럽 국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간부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된 11기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 개시된다.

이 회의에서 당시 중국 국가주석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쩌둥은 허락하지 않던 외국의 차관, 첨단기술, 그리고 상품을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는 중국 개혁개방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으로 분석됐다.

美 텍사스에 방문한 덩샤오핑

중국의 ‘터닝포인트’ 만들다

세계은행은 중국의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세계은행 총리인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중국이 없는 세계은행은 진정한 세계은행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을 방문한 맥나마라는 덩샤오핑과의 회담에서 중국이 세계은행과 협력해야만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회담 후 중국과 세계은행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개혁개방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얼마 뒤인 1980년 중국은 세계은행의 정회원국 자리를 얻게 됐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과거 외국과 거래가 거의 없었던 중국의 경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계은행은 유례없는 작업을 시도한다. 경제, 농업, 공업 기술, 보건, 교육 분야의 30여명의 전문가 조직을 3개월 동안 중국에 파견해 중국 사회를 연구토록 했다. 중국도 이에 힘입어 전문가 조직을 구성해 그들과 함께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는 중국 경제에 긍정적인 성과를 냈고 중국의 경제 상황은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1978년 농민 1인당 평균 수입은 134위안에서 1984년에는 355위안으로 늘어났다.

개혁개방이 가속화되면서 인민들의 생활도 눈에 띄게 발전했다. 1984년 국경절, 덩샤오핑에 대한 대중의 지지율은 정점에 달했다. 그날 베이징 대학 학생들은 ‘니하오 샤오핑’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렬했다. 길가의 군중들도 자발적으로 행렬에 가담했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 방문한 덩샤오핑

니하오 샤오핑!

과거 마오쩌둥 시절 “주석 만세”라고 외치며 존경을 표하던 방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왜 중국 인민들은 국가주석의 성을 부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을까. 보걸 교수는 고통스럽고 처절했던 문화혁명을 종식시키고 식량문제를 해결한 덩샤오핑에 대한 진정한 고마움의 표현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으로 1978년부터 2007년까지 30년간 100만 명이 넘는 중국 학생들이 해외에서 공부했다. 그 중 약 4분의 1의 유학생들이 중국으로 돌아와 조국 발전에 힘쓰고 있다. 덕분에 현재 중국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입지는 더 커지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을 가능케 했던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도함과 동시에 중국 인민들의 삶의 질까지 개선하는 데 힘썼다. 격동의 시기 중국의 현대화를 이룩했던 덩샤오핑은 유언으로 자신의 각막과 장기를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기를 원했고 자신의 장례식은 검소하게 치르라고 지시했다.

살아생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평범한 ‘중국 인민의 아들(son of the Chinese people)’로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덩샤오핑은 1994년 2월 19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중국 인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으며 국제사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석상에서 덩샤오핑의 죽음에 묵념하며 그를 기렸다.

보걸 교수는 저서를 통해 덩샤오핑이 이뤄낸 중국의 현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덩샤오핑의 공적에 더 많은 중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그의 삶을 돌이켜보는 데 의미가 있다.


양희경 인턴기자 hkyang1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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