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은 없다!
‘초인’은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07.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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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약하고, 의존적 성격”이 아닌 사람은 없다. 아니 적어도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결국에는 서서히 도태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오롯이 자립적이라 자부하는 자는 그만큼 ‘관계’의 형성을 소홀히 하고, 늘 자신만만한 자는 그만큼 ‘협력’을 도외시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만큼 생존의 확률이 낮아진다. 아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 집단들 가운데, 위험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고 상해로 인한 고통도 전혀 느끼지 않는 존재가 있었다면, 그런 자는 사냥터에서 혹은 싸움터에서 가장 먼저 사망을 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유아독존적’이거나 ‘겁 없는 성격’의 유전적 소질은 후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 인간의 조상들은 겁 많고 동료와의 협력에 의존하는 성향을 갖춘 존재로 살아남았으며, 그들의 후손인 우리도 지금 당연히 그렇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심약하고, 의존적인 성격”은 인간 모두의 진화론적 본성이다.

용기라는 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용기는 두려움이 없음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에 대해선 적절한 용어가 따로 준비돼 있다. 무모(無謀)함, 만용(蠻勇) 등이다. 용기는 생물적 본성에 따라 당연히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발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천성(天性 Nature, Natura)이라 하지 않고 미덕(美德 Virtue, Virtus)이라고 한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

니체의 착각

인간이 위험에 당면했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생물로서의 천성이다. 미덕은 찬양돼야 하지만 천성은 찬양이든 경멸이든 그런 평가의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저 그럴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간혹 그 자체를 비난한다. 니체가 그런 경우다.

니체는 인간의 나약한 모든 것에 대해 경멸을 표한다. <안티크리스트>에선 특히 기독교에 대해 가차 없이 멸시를 퍼붓는다. 그는 기독교란 “약하고, 어리석고, 비천한 자들의 불평불만을 모태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도 그 같은 기독교의 또 하나의 변종일 뿐이다. 그는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며, 도덕은 약자들의 방패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삶(Leben)’에의 의지이며 그것은 결국 ‘권력 의지’라 결론 맺는다. 그리고 그것을 갖춘 존재로서의 초인(超人)을 새로운 표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니체가 착각한 게 있다. 두려움에 떠는 나약함은 사실은 생존본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가 뭐라고 하든 삶은 의지 이전에 본능의 영역이다.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없으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해서 두려워질 까닭도 없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두려움 앞에 나약해지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생존의지의 표상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수사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러하다.

생물학적 견지에서 인간을 포함해 그 어떤 동물이든 본능이 먼저 반응하지 않으면 생존 확률은 극히 낮아진다. 조건적이든 무조건적이든 ‘반사 작용’의 기재를 갖고 있는 것은 그것이 생존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급박한 위험이 닥쳐 올 때는 대뇌의 사유작용 이전에 반사 신경이 바로 작동해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지하고 생각한 다음이란 없다. 그는 이미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장이 뛰지 않으면 바로 죽는다는 걸 안다. 그러나 심장은 대뇌가 생각과 의지를 갖고 뛰게 하는 게 아니다. 전혀 나약하지 않으며 전혀 두려움을 모르는 자는 진화론적으로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사기를 치거나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질 수는 있지만 늘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런 자는 그 무모함으로 인해 늘 누구보다 먼저 도태돼 왔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초인’이란 선언할 수는 있어도 실재할 수는 없다.

‘상대적 도덕’은 존재할 수 없다

니체는 본능과 의지를 종종 한꺼번에 말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 본능은 늘 두려움과 함께 하며, 의지는 의식적 용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두려움 없는 용기, 위험을 의식하지 않는 의지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용기란 두려움을 안고 발휘하는 것이며, 의지란 난관을 이해한 전제 위에서만 말할 수 있다. 용기와 의지는 초인이 달고 있는 장식물이 아니라 나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발휘하는 안간힘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론적 나약함은 결코 불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덕의 기반이다.

니체는 도덕을 약한 자의 방패막이라 했다. 모든 인간이 그처럼 나약한 존재라는 점에선 그 말이 맞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덕은 상대적일 수 없다. 그 방패막은 나약한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 즉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집단 내부의 도덕적 질서는 그 구성원 모두에게 더 많은 안정성을 부여하고 내부 결속을 강화시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집단보다 생존 능력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니체는 강한 자의 도덕과 약한 자의 도덕을 구분했다. 하지만 강한 자의 지배규칙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집단은 결국에는 결속력이 취약해져 생존 확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즉 모두에게 보편적이지 못한 ‘상대적 도덕’은 힘을 갖지 못하며 살아남아 전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도덕이란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니체의 자못 비장한 그 모든 외침은 문학적 감상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과학적 검토나 철학적 숙고의 대상은 아니어도 된다. 물론 니체의 태도도 그랬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도덕은 물론이요 근대적 과학적 이성주의 모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 적극적 논증을 시도하기보다는 문학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의 말년의 저작은 철학적 저작이 아니라 이미 시였다.

'최대다수 게르만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며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

공리주의, 홀로코스트, 고려장

절대적 도덕에 의문을 품고 그것을 해체시킨 것은 니체만이 아니었다. 아니 니체 이전에 계몽주의가 이미 그랬다. 계몽주의가 처음부터, 그리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 가치에 대한 계몽주의의 의심과 검토는 그 빛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점차 폭주로 치달아갔다.

도덕의 형성과 발전은 인위적 소산이 아니라 생존 본능과 그 분투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래서 그러한 도덕원리에 기초한 자연법(Natural Law)과 자연권(Natural Law)은 본래 의문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자연’은 좋든 싫든 논쟁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신학을 몰아내면서 자연법과 자연권에 대한 확신도 잃어갔으며 결국에는 도덕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어가기 시작했다.

이성이 신앙을 대신하고 합리가 섭리를 밀어내면서 과학이 정신의 왕좌에 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과학이 모든 것을 대신하면서 ‘가치’도 설 자리를 잃었다. ‘선과 악’의 판별이 아니라 ‘수와 양’이 가치판단의 기준의 자리를 차지했다. 합리주의였다. 그래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윤리적 목적으로 선언됐다. 공리주의였다. 공리주의는 근대 자유주의 체제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 원리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대한 허점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해 낙관이 지배적이던 시절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가 등장했을 때 거기에 악마성이 숨어 있었음이 드러났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말하자면 “최대다수 게르만의 최대행복”을 위한 공리주의적 조치였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버린 결과였다.

고려장(高麗葬)의 설화가 있다. 일정한 연령을 넘은 노인을 산에 내버리는 것이다. 노동력을 잃어 생산에 더 이상 기여를 하지 못하면서 식량만 축내는 부담을 덜어내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 곧 공리주의적 조치였다. 고려에 실제로 그러한 풍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쨌든 세계 도처에는 그 같은 설화가 있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그런 설화가 있다.

그것을 극화한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유산절고)>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아들은 어머니를 나라야마(楢山)산에 버리고 온다. 집에 돌아오니 남은 가족들, 손자와 손녀들은 식량이 남게 되어 좋아하며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국도 노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으며, 노인문제가 간단치 않은 사회문제가 돼 가고 있다. 물론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숫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해결책으로 고려장(高麗葬)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올바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와 과학은 인류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간직해야 할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만의 차원에서 인간은 사실 전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이유가 없다. 호킹(Hawking)은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서, 자연과학적 견지에서 “인간은 자연의 기본입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고 언명했다. 물리학적 진실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당연히 호킹도 그러한 물리학적 결론에 따른 대우를 받길 원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인간의 삶의 의미에 답할 수 없다

인간은 수많은 생물 중의 한 종이며, 화학적 존재이며, 물리학적 존재인 게 맞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단순히 그러한 자연과학적 과정을 진행해 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근대 계몽주의 이래 인간이 과학의 역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것에는 기왕의 종교, 특히 서구문명의 경우 기독교 자신의 탓도 적지 않다. 성경은 자연과학 책이 아니며, 창세기의 창조 설화는 우주 물리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런데 한때 기독교는 그것을 의미의 진술이 아니라 사실을 그린 우주론(Cosmology)인양 내세웠다. 오늘날에도 이런 경향은 여전히 강력한 흐름으로 살아 있다. 그래서 ‘과학 진영’에서는 또 그것을 이유로 그렇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며 핏대를 올린다. 물론 그 또한 사실은 쓸모없는 빗나간 공격이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 또한 창조했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의미론적 이야기이다. 사실 의미론적 차원에서 창조론은 논란의 여지없는 진리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세계란 인간 자신의 의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라는 진실에 대한 확인이다.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의지로 자유롭게 세계에 태어난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창조된 존재 즉 피조물이다. ‘창조론’은 바로 그 점에 대한 확인이다. 창세기는 그렇게 인간이 한계의 존재임을 알려줌과 동시에 그럼에도 열심히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격려한다. 신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고 그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그 격려의 표현이다.

과학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다. 그리고 종교는 자연과학의 법칙을 다루는 게 아니다. 종교가 천동설을 교리화해 지동설을 단죄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는 이제는 그 종교 스스로가 잘 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확신에 가득 차 종교를 공격하는 무신론 진영도 그에 못지않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적개심을 품은 反신론이며, 그들 또한 그 감정과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그 같은 태도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사실은 또 다른 종교로서의 과학주의일 뿐이다. 당연히 과학주의는 결코 과학적 태도가 아니다. 무신론자인 호킹 자신의 표현을 빌린다 해도 모든 과학적 결론은 ‘모형 의존적 실재론(Model-dependent Realism)’에 입각해 있다. 즉 과학적 결론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항상 조건을 전제로 한 제한적 결론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증명하고 모든 것에 답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러한 자신감은 과학적 자세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더욱이 가치와 의미는 완전히 그 한계 너머의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철학과 종교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은 여전히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종교는 몽매주의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지금 매우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무당들에게 가장 영험한 신주의 대상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였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도 예수를 마치 그 무당들이 사도세자 대하듯 영험한 서양 귀신 정도로 여기는 경향은 과연 없는가? 한국의 기독교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독교는 그 설득력과 위엄을 매우 많이 잃었다. 그 힘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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