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권에 집착한 공산주의자
재산권에 집착한 공산주의자
  • 이원우
  • 승인 2014.07.0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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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① <‘빨치산 경제학자’박현채를 해부한다> 下

대한민국 야당사(野黨史)의 대부분은 ‘반대를 위한 반대’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박정희가 뭘 하건, 전두환이 뭘 하건 일단 반대표를 던진 뒤 이유는 나중에 찾아온 역사다.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은 한국정치사에 이 ‘반대를 위한 반대’의 금자탑을 쌓아 올린 인물이다. 1926년 출생해 2009년 사망한 그의 정치 인생 자체가 곧 하나의 ‘거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하향곡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스토리였다면 김대중의 꾸준한 반대는 선견지명으로 추앙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 수많은 마찰과 파열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놀라운 각도의 우상향을 이룩했다.

상승의 변곡점 사이사이에 틈날 때마다 반대를 했던 김대중의 주장이 모두 실현됐다면 현재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풍요도 전부 남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대중의 반대사(史)를 이제 와 돌아보는 데 지나치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미 역사의 힘에 의해 기각되고 말소된 과거의 에너지이므로.

그들이 고속도로 위에 드러누운 이유

대한민국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기를 박정희 정권으로 잡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이른바 ‘박정희 산업혁명’의 대표작이다.

이제 와선 경제발전의 필수 요소로 여겨지지만, 두 사업은 당대에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다. 근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포항제철의 경우 ‘한국경제에는 종합제철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게 유럽 경제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세계은행의 경우 1969년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을 공식적으로 반대했고 미국 수출입은행 역시 경제성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차관 공여를 거부했다. 누굴 탓할까. 세계인들의 눈에 한국은 그저 전후(戰後) 극빈국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다. 박정희가 포기했다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 정부가 의뢰했던 IBRD 용역보고서에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강행된 것은 박정희 1인의 의지 덕분이었다. 당연히 야당은 반대했다. 포항제철 계획에 반대했던 국내 언론과 야당은 경부고속도로의 경우 더 극렬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야당 신민당의 맹주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 반대의 행렬에 빠질 리는 없었다. 건설 현장의 굴삭기 앞에 드러누워 반대시위를 벌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외침은 일종의 레토릭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가용족(族) 부자들의 전용도로 건설을 위해 쌀농사를 둘러엎어버리고 혈세를 낭비하려 한다”는 김대중의 반박에는 그가 어떤 경제관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코드가 숨어 있다.

포인트는 ‘쌀농사를 둘러엎어버리고’ 부분이다. 고속도로 건설이 농업을 말살시킬 거라는 피해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농본주의(農本主義)의 열정 앞에서 우리는 다시 박현채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박정희의 산업정책 하나하나에 딴죽을 걸었던 ‘반대를 위한 반대’의 열정에 박현채는 중대한 이론의 축을 제공했던 것이다.

김대중의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된 1968~1970년은 김대중과 박현채가 접점을 만들어간 시기와 일치한다. 둘의 첫 만남은 월간 ‘사상계’를 통해서인 것으로 알려진다. 박현채는 1970년 1월호 특집호에 ‘농공병진(農工竝進)에로의 환상과 농업 문제의 핵심’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원고는 운명적이게도 김대중의 글(‘70년대의 비전: 대중민주체제의 구현’)과 함께 수록된다. 자신의 글이 실린 잡지를 읽다가 박현채에 감명을 받아 ‘대중경제론’의 골격을 의뢰했다는 것이 ‘박현채 평전’의 저자 김삼웅의 서술이다. 박현채 역시 그해 가을 창간된 월간 ‘다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대중의 글을 실으며 친분을 쌓은 모양이다.

‘대중경제론의 골격을 의뢰했다’는 건 무슨 말일까. 사실은 그냥 ‘써 달라’고 했다는 게 중론이다. 1971년은 7대 대통령 선거에 있는 해였고, 40대의 김대중은 박정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력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성장에 코드가 맞춰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경제 브레인이 김대중으로서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게 박현채였다.

대선 후보가 된 김대중은 자신이 세운 대중경제연구소의 젊은 학자들에게 경제정책의 방안을 의뢰했다. 김경광 소장과 박현채 정윤형 정흥대 임동규 등은 온양의 한 여관에 투숙객으로 가장하고 들어가 보름 동안 합숙하며 원고를 썼다.

그렇게 완성된 책이 ‘김대중 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이다(1971). 자신의 이름[大中]과 대중(大衆)을 접목시킨 탓에 김대중이 경제이론을 스스로 고안한 것처럼 오해되고 있지만 사실은 숨겨진 고수들의 대필 작업이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은 이 책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작업했음에도 한 사람이 만든 것처럼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민족경제론’의 大히트 - 세상 밖으로

컴퓨터를 이용해 글을 쓰다 보면 가끔씩 원고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중간 중간 저장해두는 걸 잊었던 과오를 반성해봐야 날아간 원고는 돌아오지 않는다. 앞이 캄캄해진다.

흥미로운 건 이 암담한 심리를 이겨내고 다시 원고작업에 돌입하면 의외로 글이 잘 써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심지어 손실 이전보다 더 좋은 원고가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미 머릿속에 사전작업이 돼 있는 상태에서 다시 썼기 때문일까.

이 메커니즘을 박현채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70년대 초반을 통과하며 자신의 이론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있던 그에게 김대중의 경제이론서를 대필하는 작업은 상당히 좋은 사전 작업이 된 모양이다. 7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결국 낙선했지만 한 차례 자신의 생각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박현채는 1978년 ‘민족경제론’을 출간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대학 생활을 했던 세대에게 이 책은 순식간에 캠퍼스의 필독서가 됐다.

그런 만큼 박정희 정권의 견제를 받아 출간 3개월 만에 판금(販禁) 딱지가 붙는 수모를 당했지만 이미 초판 5000권은 판매된 이후였다. 게다가 판금 딱지라니, 사실은 이처럼 좋은 홍보 수단도 없었던 것이다. 책의 파급력은 계속 커졌고 박현채는 경제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현채의 명성은 1980년대의 담론지형이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으로 재편되면서 다시 한 번 상승한다. 시발점은 1985년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한 ‘현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 단계에 관한 연구(1)’이라는 논문이었다.

사구체 논쟁에 대한 현재 좌익들의 평가를 보면 상당히 추상적인 표현이 동원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회운동의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 지성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식인데 정작 박현채의 주장과 예측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이유가 뭘까. 박현채의 예측이 틀렸기 때문이다. 약간의 오류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과녁을 빗나갔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의 주장을 들먹여봐야 서로 민망해질 뿐이다. 그가 의지한 종속이론과 주변부 자본주의론에 의하면 한국경제는 악화일로를 걷다 결국 멸망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 이후 한국경제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번영의 궤도로 진입하자 한때 박현채와 같은 길을 걸었던 안병직과 같은 학자는 ‘중진국 자본주의론’ ‘구조적 역부족론’ 등을 발표하며 대오에서 이탈했다. 안병직에게는 훤히 보였으나 박현채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박현채의 눈을 가리고 있었을까.

한편 박현채와 함께 사구체 논쟁을 이끌어갔던 젊은 학자로는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있다. 2014년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별안간 출마해 39.08%의 득표율로 당선된 바로 그 사람이다. 마르크스경제학의 대부와 함께 사구체 논쟁을 총망라했던 사회학과 교수가 서울시교육감이 돼서 초·중·고등학생들의 생활을 책임지게 된 이 ‘개방적’ 상황을 박현채가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DJ하고 손 끊었다”

“김대중 후보는 보수 정치인으로서는 변화의 가능성을 최대한 추구하여 운동의 보호막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지해야 한다. 후보 단일화는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이고, YS로 단일화해도 노태우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대선 30일 전에 분당한 DJ가 600만 표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비전이 있다.” (박현채 추모집 ‘아! 박현채’ 中)

위 내용은 80년대 후반 김대중에 대해 박현채가 피력한 견해다. 친분이 있는데다 서로의 정신세계에도 영향을 준 사이이니 지지하는 게 일견 당연해 보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 말을 한 시기가 87년 대선 직후였다는 점이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한 좌익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최초의 직선제 대선에서 두 사람이 단일화에 실패하는 바람에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속된 김대중에 대한 지지는 박현채가 김대중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믿음의 크기는 배신당한 이후에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일까. 90년대가 되자 김대중에 대한 박현채의 인식에는 극단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불과 5년이 지난 1992년 박현채가 김대중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를 들어보자. 다음은 ‘노무현의 경제교사’로 불리는 정태인 前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이 2007년 8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1992년 여름 박현채 선생이 저를 서교호텔로 불렀습니다. “DJ하고 손 끊었다.” 72년 대선 때 ‘대중경제론’을 쓴 이래 줄곧 숨어서 정책을 보좌했던 인연을 끊은 겁니다. 이유는 92년 대선 때부터 이미 김대중 후보가 ‘뉴DJ플랜’ 같은 신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서로의 든든한 파트너였던 박현채와 김대중은 왜 갈라서게 된 걸까. 권력을 원했던 김대중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의 신념을 바꿨지만 진실을 원했던 박현채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현채에겐 자신의 구축해온 학문적 세계의 단단한 경계 밖으로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현실이 그의 이론을 부정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김대중과의 결별을 차치하더라도 90년대의 출발은 박현채에게 충격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유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소련의 붕괴 때문이다(1991년). 소설가 조정래는 “내가 본 선생님 모습 중에서 가장 불행해 보였을 때가 소련이 붕괴됐을 때였다. 한 6개월 정도 허탈해하시는데, 거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공동체 중요하지만 ‘내 재산’ 더 중요

소련이 붕괴된 후 4년 만에 그는 사망했다. 한때의 파트너이자 애증의 대상이기도 했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은 결국 보지 못했으니 행운이라 해야 할까 불운이라 해야 할까.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방식을 굽히지 않은 박현채에 대한 좌익 후배들의 현재 논조는 찬사 일변도다. 지금도 한미 FTA나 골목상권 개방 같은 민감한 이슈가 나올 때 ‘반대를 위한 반대’의 원류를 박현채에게서 찾는 논객들이 자주 보인다.

그들이 짚어내는 박현채 사상의 핵심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공동체(코뮌) 정신이다. 공동체라고 하니까 자못 고상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담론이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고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실제로도 박현채는 ‘유토피아’의 작가 토머스 모어를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부분도 재미 있는 지점인데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책의 주인공 라파엘 히슬로데아우스(Raphel Hythlodeaus)의 이름은 ‘헛소리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역설로 가득 찬 이 책을 좋아했던 박현채의 말년에 한 가지 거대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사망 직전의 박현채는 상당히 풍족한 삶을 누린 것으로 전해진다. 1991년 3월 중국여행을 다녀온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7개월 전엔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서유럽을 여행했다. 이때 박현채 부부와 동반한 것은 ‘태백산맥’으로 당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정래 작가 부부다.

박현채는 평생 재야에서 활약하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많은 좌익들의 회한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인물인데, 베스트셀러 작가와 서유럽을 여행할 수 있는 여유는 어디에서 생겼을까?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시점에서 서유럽 여행은 서민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치재’였다.

박현채의 생애를 다룬 저서들은 이 국면에서 엉뚱하게 ‘민주화 덕택’이라는 명분을 들이민다. 민주화가 가난한 경제학자 박현채를 갑자기 부자로 만들어 주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게 좋은 민주화가 왜 다른 빈곤층은 구제하지 못한 것인가?

다른 가설을 찾는 게 빨라 보인다. 박현채의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 박경모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공무원을 했고, 박현채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 잡혔을 당시 무릎을 꿇고 돈을 전달해 아들을 구출했다. 어머니 오순희가 뇌물로 전달한 30~50가마니 상당의 쌀 역시 서민으로서는 구하기 힘든 재물이다.

결국 말년의 박현채가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부가 상속됐다는 점에서 찾는 게 상식적이다. 재산권을 부정한 대학자가 자본주의의 핵심 개념인 재산권과 상속의 수혜를 받아 풍요를 누렸다는 이 거대한 모순.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심지어 박현채는 상속된 재산에 상당히 집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수많은 동생들과 상속 분쟁을 치열하게 치러냈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것이다. 박현채의 생애를 미화하기 바쁜 이들은 그 누구도 일언반구 말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이 분쟁이 그의 뇌졸중으로까지 이어져 62세 젊은 나이의 박현채를 쓰러트렸다는 ‘설’이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거대한 모순과 표리부동을 설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한 인간의 내면에 강인한 신념이 존재할 때 그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명제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 신념이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양심적인 판단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실이 자신의 이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있음에도 끝까지 아집을 굽히지 않았던, 그래놓고 말년엔 자신의 이론과 반대되는 재산권에 탐닉했던 이중적 경제학자 박현채. 두 얼굴로 점철된 그의 이름 세 글자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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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섭 2018-03-06 22:30:07
좋은 내용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