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고난과 핍박의 역사
유대인, 고난과 핍박의 역사
  • 미래한국
  • 승인 2014.05.2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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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에서 예루살렘까지
 

마사다(Masada)는 요새다. 히브리어 원 뜻이 그렇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사해(死海) 서쪽 해안의 바위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기준으로는 20m가 채 못 되지만 사해 기준으로는 434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일대 전체가 해수면보다 420m 낮기 때문이다. 유대 광야와 사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은 벼랑이다. 그러면서도 정상에는 길이 최장 620m 너비 320m의 평지가 펼쳐져 있다. 천혜의 요새가 될 만했다.

마사다를 철옹성으로 만든 이는 헤롯왕(재위 BC 37~AD 4)이었다. BC 37~31년 헤롯은 정상에 38개의 탑을 갖춘 높이 5m 둘레 1300m에 달하는 성벽을 쌓고 궁궐과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회당)는 물론 목욕탕, 식량 창고, 술 저장고 등 각종 편의시설에 대규모 물 저장고까지 갖춘 요새를 구축했다. 특히 물 저장고는 75만 리터에 달하는 양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버틸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헤롯은 그 시스템을 시험할 기회가 없었다.

마사다에 운명을 맡긴 이들은 로마에 대항한 반란군들이었다. 66년 일어난 반란은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 마사다는 최후의 거점이었다. 72년 로마의 장군 플라비우스 실바가 마사다를 포위했다. 당시 그곳에는 반란군의 일파인 시카리(Sicarii, 자객이라는 뜻)들과 피난민 등 모두 967명이 피신해 있었다.

지휘관은 엘르아살(Eleazar)이었다. 함락은 쉽지 않았다. 포위가 해를 넘겼지만 항복의 기미가 없었다. 천혜의 조건에다 장기항전에 대비해 식량과 물을 충분히 비축해 놓았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엘르아살은 동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마사다 최후의 날, 5월 2일

“나의 고결한 동료들이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결코 로마인들의 노예는 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소. (…) 우리의 그 같은 각오를 실천에 옮길 때가 이제 다가왔소. (…) 우리가 먼저 처자식을 죽인 다음 우리도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읍시다. 이렇게 자유를 누리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스러운 기념비가 될 것이기 때문이오.” (요세푸스 Josephus, <유대전쟁사>)

동요가 있었지만 저항군들은 결국 엘르아살의 제안을 실행에 옮겼다. 모두 960명이었다. 로마군이 마사다로 진입했을 때 그들을 맞은 것은 죽음의 정적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두 명의 여인과 5명의 아이들이었다. 요세푸스는 살아남은 여인 한 명이 내막을 설명해줬다고 전하고 있다. 유대력으로 산티쿠스 니산(Xanthicus Nisan)월 15일, 서력으로는 73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941년 전이었다.

유대의 반란은 그로부터 59년 뒤인 132년 한 차례 더 일어났다. 로마제국 5현제 시대의 3번째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때였다. 시몬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반란군은 한때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3년을 버텼다. 그러나 2번째 반란은 유대의 운명에 대한 또 다른 결정타였을 뿐이었다. 1차 반란의 결과는 정치적 붕괴였지만 2차 반란의 결과는 고대 유대문명 자체의 해체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아예 그리스 폴리스 식으로 재건축하고 이름도 아이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바꿔버렸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이주해 왔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출입마저 금지됐다.

또 다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대가 왔다. 바빌론 유수로 인한 디아스포라는 50여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이번의 디아스포라는 매우 오래 갔다. 유대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귀환하기까지는 거의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야 했다.

박해와 고난의 역설

유대인들은 정치 군사적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를 갈망했지만 그런 메시아는 결코 오지 않았다. 헛된 기대의 끝은 도성과 정치의 상실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상실로 인해 아니 바로 그 때문에 유대는 불가피하게 학문의 시대로 들어가게 됐다. 1차 반란 때 예루살렘을 탈출했던 랍비 요하난이 로마 당국으로부터 예루살렘 서쪽에 종교적인 율법 중심지 설립의 허가를 얻었다. 예루살렘을 잃고 유대의 국가는 종말을 고했지만 대신 랍비들로 구성된 종교회의가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검이 잊혀졌고 펜이 지배했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이리하여 유례없는 독특한 문명, 땅과 정치 즉 국가를 갖지 않으면서 오로지 정신문명으로만 정체성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형성됐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중세를 넘어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2천년 가까운 세월을 통과해 왔다. 그러나 국가라는 보호막을 잃은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집할 때 박해는 피할 수 없었다. 기독교 유럽의 세계에서 유대인의 고립은 불가피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슬람 또한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일했으며 이슬람은 유대인을 ‘경전의 백성’으로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나긴 역사를 경유하면서 상황이 바뀌어갔다. 이슬람 세계는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자 점차 유대를 포용하는 분위기가 약화돼 갔다. 반면 기독교 유럽 세계에서는 오히려 근대를 경유하면서 점차 유대인들의 공간이 확대돼 갔다. 물론 유럽에서 반유대적 분위기가 결정적으로 사라진 건 아니었다. 흐름은 여전히 완강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있었던 수차례의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는 역설적 결과를 낳고 있었다.

1492년부터 본격화된 박해로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들은 네덜란드 등으로 향했다. 1648년 동유럽에서 있었던 유대인 대학살의 여파로 유대인들이 영국과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의 유대인의 역사로 볼 때 예상치 못한 행운이 됐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순서를 이어가며 근대 유럽의 선두주자가 됐고 영국과 미국은 이후 차례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에서 유대인 사회가 비교적 순조롭게 자리 잡은 것은 그 나라 특유의 좋은 여건 덕분이었다.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반유대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대영제국 전성기 총리의 한 명인 디즈레일리도 유대계였다. 미국에는 유대인을 위한 더 강력한 기반이 준비돼 있었다. 자유였다.

미국은 1663년 이미 뉴잉글랜드에서 선포된 칙허장(Royal Charter)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평화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종교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벌을 받거나, 불안해하거나, 심문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독립 후 수정헌법은 “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물론 유대인을 위한 조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사회는 교리보다는 윤리를 중시했다. 프로테스탄트적 보편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일부다처제를 포기한다면 몰몬교와 같은 신흥종파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유대인들도 그 수혜자였다.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시온주의의 태동과 홀로코스트

1881년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일어난 유대인 박해의 파장은 조금 다른 각도로 발전했다. 박해의 결과 매년 거의 5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러시아를 탈출해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 향했다.

특히 프랑스에는 12만의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유대인들은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를 믿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유대인들의 희망에 드레퓌스 사건으로 답했다. 유대인들은 절망했다. 그렇게 절망한 유대인 가운데 한 명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었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이었던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한 언론사의 파리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당초 그는 프랑스에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은 유럽사회에 완전히 동화 흡수돼 소멸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를 목도한 헤르츨은 기대를 접었다. 1896년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라는 책을 발간, 유대인 문제는 오직 독자적인 민족국가 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시온주의의 본격적 태동이었다. 그 다음 해 1897년 스위스에서 제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다.

열광이 일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 각국의 부유층 유대인들은 물론 랍비 등 종교지도자들도 반대했다. 지역적으로는 특히 독일 유대인들의 반대가 강했다. 독일의 성공한 유대인들은 독일민족과 유대민족의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독일 유대인은 독일에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독일의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독일을 지지했다. 그들은 지난날 자신들을 박해했던 러시아를 ‘조국 독일’이 응징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내놓은 답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였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600만의 유대인이 학살됐다. ‘참혹’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할 수 있는 악행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처절함의 끝자락에서 역설적이게도 기회가 마련되고 있었다. 유럽 세계에서 반유대주의가 적어도 표면에선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고, 나아가 유대 독립국가 창설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퍼즐 혹은 섭리

이스라엘의 건국에 이르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퍼즐과도 같다. 박해에 따른 결과가 차근차근 누적돼 가며 결과적으로 1948년을 향해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기독교 문명 자체의 도덕적 응답이었다. 종교개혁의 요람이었던 독일이 히틀러의 가공할 학살극의 총본산이 돼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 문명 세계 전체의 심대한 도덕적 훼손이었다.

섣부른 오해와는 달리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그 자신이 늘 천명한 대로 고대 아리안 문명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기독교까지를 포함한 범 셈족 정신문명 전체에 대한 반대였다.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反기독교적 입장을 거리낌 없이 천명했다. “순수한 기독교는 (…) 인류를 전멸하게 만드는 형이상학으로 포장된 진정한 공산주의다.” “언젠가는 전쟁은 끝날 것이다. 바로 그때 나는 종교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충실한 심복 힘러는 총통의 뜻을 받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기독교를 뿌리 뽑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히틀러와 불가침협정을 맺었던 소련이 나중에 연합국 진영이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은 이른바 ‘반파쇼’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매우 알량했다. 볼셰비즘은 나치즘과 함께 입장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걷어차여 연합국 진영으로 향하게 된 것 뿐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더 깊숙한 본질은 기독교문명으로서의 유럽문명 자체의 위기였다. 세속화의 문제가 어떻든 유럽문명의 정신적 근간은 여전히 기독교적 가치였다. 히틀러의 아리안주의는 그에 대한 근원적 부정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문명은 스스로의 정신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도 히틀러를 반드시 패배시켰어야 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도덕적 훼손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도 히틀러를 파멸시켜야 했다. 그렇게 히틀러를 패배시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이 없었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독교문명은 유대인을 오랫동안 박해했다. 그러나 그들을 구해낸 것도 결국 기독교문명이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원한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정치군사적 존재였다. 예수와 같은 영적 구원의 메시아는 받아들이기는 커녕 이해할 수도 없었다. ‘말씀’만으로 도대체 무엇을 구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2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이스라엘을 부활시킨 힘은 ‘문학적 수사에서든 종교적 차원에서든’ 결국에는 바로 그 영적 메시아의 힘이었다.

예수라는 영적 메시아를 머리와 심장으로 삼고 있던 영미 기독교문명 국가가 결국 히틀러를 패배시키고 이스라엘의 건국에까지 이르도록 했기 때문이다. 영적 메시아가 국가의 옷을 입고 정치 군사적 메시아의 역할을 한 셈이었다.

1948년 5월 14일, 그리고 그 이후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 1886~1973)은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 민족의 본래적인 권리에 의하여 그리고 UN 총회의 결의에 힘입어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의 창립을 선언하는 바이며, 이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아니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날 밤 이집트의 공습을 시작으로 아랍권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이후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한 기나긴 투쟁의 역사를 또 밟아가야 했다.

나중에 소련과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탄생이 자본주의자와 제국주의자의 음모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사실은 반대였다. 처칠과 트루먼은 유대 독립국가 창설을 분명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와 영국 외무부는 반대 입장이 완강했었다. 영미의 석유자본의 입장에서도 아랍 산유국들이 원치 않는 이스라엘의 탄생은 재앙이었다. 음모가 있었다면 오히려 소련 쪽이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를 늘린다는 점에서(이스라엘 건국 주역들은 원래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국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에 찬성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트루먼은 ‘사실상의 승인’을 했지만 스탈린은 한 발 더 나아가 ‘법률상의 승인’까지 하고 무기 공급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죽기 한 달 전인 1953년 2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히려 이집트에 무기를 공급하기로 했다. 아랍의 反이스라엘 기류에 기대어 중동에 반영 반미 흐름을 강화시키겠다는 선택이었다. 엇갈렸다. 유대인의 신생 독립국가 이스라엘 곁에는 이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문명 국가가 있었다. 과거 유대인을 박해했던 기독교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동반자가 됐다.

한때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바다로 쓸어 넣겠다고 적개심을 쏟아내며 소련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아랍의 反이스라엘도 적어도 현재까지는 전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섭리일까? 아무튼 이 모든 것이 다 ‘역사’인 것은 분명하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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