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언저리에 서게 되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객관식이라면 찍기라도 할 텐데, 까다로운 서술형이라 답을 써내려가기가 만만치 않다. ‘나만의 삶’을 꿈꾸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거침없이 답을 써내려가는 사람은 드물다.
한 사람의 긴 세월을 거치며 차곡차곡 쌓아온 인생의 무게와 안목은 내일이 아닌 10년, 아니면 100년 이상의 먼 미래를 내다보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는 데 성공한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영웅’인지도 모른다. 여기 이성원 이사장의 ‘삶과 사랑’, ‘책과 세상’, ‘배움과 인생’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28명이 한마음이 되는 삶
1933년. 충북 청주 북방의 진천에서 중산층 정도의 삶을 영위하던 선비 집안에서 나는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은 증조부가 1940년 86세로 돌아가시면서 남긴 책갈피 속 쪽지다.
“내가 죽은 지 10년 만에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니 살아남기를 바라거든 가족 28인이 한마음이 되어라. 이 쪽지는 하늘의 기밀이 샐까 두려우니 바로 불에 태워 없애려무나.”
28인이 한마음이 되라는 게 무슨 뜻일까. 집안 어른들이 모여 궁리한 끝에 “덕을 쌓으라”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려면 당연히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했고,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소작인들을 위해 베풀고 보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뒤 증조부님이 돌아가신 지 10년 만에 6·25가 터졌다. 증조부님의 쪽지 덕분인지 집이 다 부서지는 공산군의 폭격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분이셨다. 언제나 화평한 얼굴로,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셔도 조용히 듣고만 계셨다. 그런 어머니의 눈에 눈물에 맺히게 한 사건이 하나 있다.
1950년 6·25 때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 몇 달 동안 우리 식구들은 의용군에 끌려갈까봐 숨어 지내느라 애간장을 태웠다.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될 때 나는 나 혼자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어머니께 떼를 썼다.
고등학교 2학년 밖에 안 된 것이 가면 어디를 가겠느냐고 말리시던 어머니도 끝내 나를 말리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내 손을 놓아주셨다. 잡아 두었다가 오히려 일이 잘못 되면 어찌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우셨던 것이다. 그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어떤 어려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고 이겨내실 것 같던 어머니도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쟁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여자였다. 나의 안전을 바라며 놓고 싶지 않았던 나의 손을 놓으시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를 보내셨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성품을 닮으려고 평생을 노력했다.
어린 시절 나의 조국은 앞날이 캄캄한 어둠 속에 있었다. 중학교 입학식 때 교장선생님은 훈시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너희에게는 우리 동포 150명을 먹여 살려야 할 책임이 생겼다.”
해방 무렵 우리나라는 8~9할이 문맹이었다. 중학생만 돼도 당시 3천만 인구 가운데 150분의 1에 속하는 ‘소수 지식인층’이었다. 교장선생님 말씀으로 인해 해방의 감격에 들떠 있던 나의 어린 가슴에는 인생의 커다란 목표가 생기게 됐다.
‘도대체 나는 왜 안 되지’
나는 6·25 직후 경기고등학교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외국계 상사의 기계 세일즈맨으로 취직을 했다. 이 직장에서 당시 공무원 월급의 10배를 받으면서도 1년 내내 기계를 한 대도 팔지 못했다. 나는 나보다 많이 배우지 못한 동료들이 기계를 잘 파는 걸 보면서 도대체 나는 왜 안 되는지 마음이 복잡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는 사교성 좋은 사람이 아니라 혼자 일하는 것이 맞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EQ형 인간과 IQ형 인간이 있다고 했을 때 나는 후자였던 것이다. 인정에 어두워 세상살이에 슬기가 없다. 나는 책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외국계 상사 세일즈맨 생활을 3년 만에 관두고 공채 시험을 통해 현대건설 평사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8년 만에 부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현대건설에서 내가 맡은 일은 ‘기획’하는 일이었는데 IQ형으로서는 적성에 꽤 잘 맞았던 것이다.
부장이 되고 3년 동안 현대에서 무역 업무를 맡아왔는데 회사 일에 조금 진력이 날 무렵 서울대 기계과 동창생이 찾아와 재봉틀에 쓰는 북 공장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바로 현대건설에 사표를 내고 북 공장을 차렸다. 1년쯤 고생고생을 하다가 결국 재봉틀 회사에 넘겨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직장생활은 허무하게 끝났다. 그때 나이가 고작 이립(而立)의 서른이었다.
그후 나는 한국정밀공업을 창업했고 조흥건설을 창업해 수임금의 일부를 자녀들 장래를 위해 저축했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우리나라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50세였는데 내가 50세가 됐을 때는 75세가 됐다. 50세 무렵 생각했다.
‘지금부터는 덤의 인생이다. 뭔가 남을 위한 일에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때 생각한 것이 아내와 함께 사회봉사로 책 보내기 운동을 해보자는 거였다. 아들과 딸들도 선뜻 동의했다. 자신들에게 주어질 유산의 몫을 포기해줬고 그 몫이 바로 청소년도서재단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나의 ‘3분기 인생행로’의 시작이었다.
25세 배움, 50세 일, 75세 봉사
“25세까지는 배우고, 50세까지는 일하고, 75세까지는 봉사한다.”
이것이 바로 ‘3분기 인생’의 요체다.
책 보내기 운동을 하다 보면 가끔씩 출판업계나 기업체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받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정중히 거절한다. 정성 들인 책을 보내기 위해서 아내와 나는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청소년들에게 책을 보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있다. 책을 받은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고 일일이 답장을 보내는 일이다.
성적 때문에 걱정하는 중고등학생, 유격훈련을 받으며 힘들어하는 병사, 인생을 상담하는 대학생 등등…. 각기 다른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젊은이들에게 아내와 나는 일생 동안 배우고 터득한 지혜를 다해 편지를 쓴다. 아들이 군대에 있을 때 1주일에 2-3회씩 꼬박꼬박 편지를 썼던 것이 나의 EQ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아내와의 스토리도 돌아보면 영화 한 편이다. 내 나이 35살에 대학교 4학년 23살인 아내를 만났다. 당연히 장모님은 심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서 걱정된다는 거였다.
결국 우리는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어른들을 모신 가운데 작별파티(farewell party)를 열었다. 그때 아내와 나는 미국의 60년대 가수 슬림 휘트먼의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내가 나이 들어 꿈을 꿀 수 없을 땐)을 부르며 한없이 울었다.
내가 나이 들어 꿈을 꿀 수 없을 땐
당신 모습 기억 속에 간직하리다.
내가 나이 들어 꿈을 꿀 수 없을 땐
당신 사랑 내 맘속에 살아 있으리
결국 아내와 나는 부모님을 설득했고 우리는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 후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띠 동갑으로 만난 아내와 나의 나이 차이가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진 빚을 갚는 삶
책 보내기 사업을 하면서 우리나라는 번역이 잘못된 책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어려운 표현에서는 대부분 엉터리로 해석돼 있다. 읽는 사람들은 자기가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포기해 버린다.
특히 청소년들이 제대로 된 번역을 통해 좋은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번역에도 공인인증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늘도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책을 받고 기뻐하는 얼굴을 상상하며 국내도서는 아내가, 외국도서는 내가 고르고 선택하는 데 분주하다.
최근엔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 의뢰가 들어왔다. 장학생 7~8명에게 1년간 인생 지도를 해달라는 것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나는 어떤 멘토링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너희들은 이제 우리 국민 150명의 대표가 되었다. 너희에겐 앞으로 150명의 동포를 도와야 하는 책임이 생긴 것이다.”
나는 대학교수도, 기업인도, 사회지도급 인사도 아니다. 나의 자원은 시간과 돈과 책, 그리고 젊은이 150명을 도우려는 평생의 목표다. 시간과 돈은 남들도 갖고 있는 항목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보다 조금 더 관심 있고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이 일로 지난 1993년 ‘책의 해’에 이달의 인물로 선정됐고 2005년 제5회 도서문화대상 대한출판학회상 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20년간 도서재단을 운영하며 개성에 따라 나만이 추천할 수 있는 도서목록을 갖추고 있다. 삶 속에서 그 책을 꼭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시중에 없는 책이라면 내 서고를 열어준다.
그 책을 읽고 우리 청소년과 대학생들이 세상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현재 15만 권의 책을 기증하고 있다. 때로는 사람들이 왜 이런 운동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동안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뿐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나이 81세에 무병인 나는 끼니 외에는 먹는 것이 없고 어디든 차 없이 걸어 다닌다.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공인 태권도 5단을 유지하면서 96세까지 살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을 떠나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삶을 옮겨볼 계획도 세웠다. 유럽에서 1년, 남미에서 1년, 일본에서 1년을 살겠다는 계획의 일환이다. 삶 전체가 여행이겠지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은 미래를 계획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진정한 여행(A True Travel)
나짐 히크메트 (1902~1963, 터키 극작가·시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정리/박찬호 객원기자 chanho227@dreamwiz.com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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