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60년, 사라진 세계 적화의 꿈
KGB 60년, 사라진 세계 적화의 꿈
  • 미래한국
  • 승인 2014.03.0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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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3월 13일은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KGB의 탄생 60주년이다. KGB는 러시아어 키릴 문자 표기를 알파벳으로 옮긴 것으로 원 발음은 ‘카게베’다. 영어로는 Committee of national security, 영어 약자는 CNS가 될 것이다.

KGB는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일단 해체되고 그 조직과 기능은 러시아 공화국 KGB로 이어졌다. 러시아 KGB는 다시 연방보안국(AFB)을 거쳐 1995년 4월 이후부터는 연방보안청(FSB)이 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KGB 계승조직과 소련 시절의 그것은 성격을 달리 한다. 소련 KGB는 무엇보다 세계 적화라는 뚜렷한 이념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KGB는 그런 목표 하에 냉전 시절 내내 미국 CIA와 세계적 차원에서 자웅을 겨루며 첩보기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래서 때로는 KGB가 CIA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KGB는 단순히 그런 대외 정보기관에 그치는 조직이 아니었다.

KGB는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기관이었다. 소련 국내의 비밀경찰을 겸하고 있는 전체주의 통치기구였다. KGB는 그 역할을 위해 국내적으로도 막강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수많은 수용소를 관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경경비대를 관장하는 군사조직의 역할도 했다. ‘국가 내 국가’라 일컬어지기에 충분했다.

 KGB창설자 펠릭스 제르진스크(1877~1926)

테러 조직이 된 비밀경찰

그런데 KGB의 이 같은 특성은 1954년 창설 당시 갑자기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최초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단계의 변천을 거치면서 계속 강화돼 온 것이었다.

출발은 이미 10월 혁명 당시부터였다. 이념적으로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조직의 측면에서도 그랬다. 체카(CHEKA)가 그것이었다. 이념적 독선과 전체주의적 폭력성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던 조직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특히 내전 기간 몇 년은 가히 유혈의 지옥이었다. 체카는 그 한복판에 있던 마왕이나 다름없었다. 그 체카가 바로 훗날의 KGB의 첫 번째 前身이었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왕국에 흰 장갑을 끼고 잘 닦인 바닥 위를 통해 들어가는 게 아니다.” 10월 혁명 성공 뒤인 1917년 12월 3일 全러시아 농민 대표자대회에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트로츠키는 약간은 냉소를 섞어 그렇게 선언했다.

빈 말이 아니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의 거친 길을 가기 위해 손을 기꺼이 피로 붉게 물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체카를 탄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1917년 10월 25~26일 새벽까지 임시정부를 모두 점령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산하에 곧바로 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특별부서 하나를 창설했다. 책임자는 제르진스키(Dzerzhinsky).

1917년 12월 17일 군사혁명위원회는 해체됐지만 제르진스키의 특별부서는 없어지지 않았다. 12월 20일 레닌은 러시아 인민위원회 의장의 이름으로 ‘반혁명 및 사보타지 단속을 위한 비상위원회 설치에 관한 포고’에 서명하고 그 임무를 제르진스키의 조직에 맡겼다. ‘全러시아 비상위원회’ 체카(CHEKA)는 그렇게 탄생했다.

체카의 존재는 처음에는 공식화되지 않았다. 출범 5년만인 1922년 2월 6일 일단 해산되고 새로운 명칭의 조직으로 발전적으로 개편됐다. 그러나 체카를 탄생시킨 법령은 그로부터도 다시 5년이 지난 1927년 12월 18일에 가서야 공표됐다.

체카가 비밀경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테러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찬란한 이상을 내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불가피하다고는 하나 유혈의 테러가 자랑할 만한 일일 수는 없었다.

체카의 창설 당시 권한은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첫째 반혁명과 파괴 활동을 찾아내는 것, 둘째 파괴행위자와 반혁명분자를 혁명재판소에 넘기고 법정 자료를 준비하는 것, 셋째 진압에 필요한 경우에는 사전수사를 행할 것 등이었다. 형의 집행은 물론 선고의 권한도 없었다. 위협적인 비밀경찰이긴 했지만 일단은 그냥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 약간의 조심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깨졌다. 혁명의 최고지도자 레닌 자신에 의해서였다. 체카를 설치한 지 한 달 뒤인 1918년 1월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태한 자들은 10명 가운데 1명은 그 자리에서 사살해야 한다.” “러시아 땅에서 해충을 없애버려라.”

체카의 요원들은 레닌의 명령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수행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체카는 1918년 상반기 6개월간은 단 22명의 죄수를 처형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레닌은 1918년 9월 1일 체카에 중대 범죄자들을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효과는 곧 나타났다. 체카는 공식집계만으로도 1918년 하반기에만 6000여 명을 처형하고 다음해 1919년에는 한 해 동안 1만여명을 처형했다.

 KGB 본부

최대 희생자는 노동자 농민들

차르 시대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 오흐라나(Okhrana)도 마음대로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은 있었지만 어쨌든 체포한 피고는 공판을 위해 법정에 넘겨야 했다. 그러나 체카에겐 이제 그런 제한이 없었다.

체카에 즉결처분권이 주어지던 1918년 9월 붉은 군대의 기관지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일말의 자비도 동정도 없이 우리는 수백 명의 적을 죽일 것이다. 아니 수천 명을 죽일 것이다. 그들이 흘러넘치는 피 속에서 익사하게 하자. (…) 부르주아의 피바다로 만들자.” 체카는 그 말대로 했다. 경찰? 체카는 이제 테러조직이었다.

1919년 10월 21일부터 체카는 산하에 특별 혁명재판소가 설치, 단순 절도나 투기까지 단속하게 됐다. 체포에서 형 집행까지 모든 권한을 한꺼번에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이 사회 全분야에 걸쳐 철권을 휘두르게 된 것이다. 무소불위의 체카는 거리낌 없는 적색 테러의 질주를 이어갔고 그러는 동안 러시아는 볼셰비키들이 바라던 대로 피바다가 돼 갔다.

당시의 희생자 수에 대해선 오늘날도 논란이 분분하다. 전직 체카 요원 마르틴 라치스(Martyn Latsis)는 희생자 수를 1만2733명이라고 한 반면 전문가들은 이 수치는 크게 축소된 것으로 본다. 최초로 러시아 혁명에 대해 쓴 역사가이자 혁명의 목격자이기도 한 체임벌린(W.H Chamberlain)은 1920년 말까지 체카가 5만 명의 사형을 집행했으리라 추정했다. 희생자가 50만 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숫자가 어찌됐든 그 희생의 피는 결코 부르주아만의 피가 아니었다. 가장 많이 희생된 계층은 오히려 농민과 노동자 즉 러시아의 민중이었다.

하지만 레닌은 1920년 1월 12일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수천 명을 쏘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그리고 1921년 5월 14일 레닌은 당 정치국에서 체카의 즉결처분권을 더 확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

체카는 출범 당시에는 2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3년도 지나지 않아 상근요원만 25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조직이 됐다. 체카는 이미 괴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자체가 내재하고 있던 폭력성의 발현이었다. 유토피아적 망상을 현실에서도 고집한다면 그런 폭력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1922년 체카가 폐지됐다. 뒤이어 게페우(GPU 국가정치보안부)가 출범했다. 체카가 폐지된 표면적 계기는 신경제정책(NEP)이었다. 미국과 차관 교섭을 시작하면서 레닌은 1922년 2월 6일 체카 폐지를 발표하고 그 대신 2월 8일 엔카베데(NKVD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국가정치보안부’ 설치를 포고했다. 내전을 거치는 동안 체카에 대한 대외적 비난이 높아져 있었던 터였다. 원활한 대외 교섭을 위해 옷을 바꿔 입은 것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세계 적화의 추진이었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일단은 한숨 돌리자 사회주의 혁명 본래의 원대한 목표가 다시 지평으로 부상했다.

이미지 쇄신도 필요했지만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조직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개편이었다. 게페우의 초대 장관이 체카의 수장이었던 제르진스키가 그대로 유임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명칭의 변화는 분칠의 성격이 강했다. 체카 때부터의 국내 비밀경찰의 역할도 그대로 이어졌다.

KGB의 후신 SVR 前요원 안나 채프먼이 2012년 터키 패션쇼에 참가하고 있다.

게페우와 엔카베데

하지만 새로이 강화된 것이 있었다. 바로 해외부문이었다. 게페우는 출범하면서 그간 코민테른에서 관장하던 대외첩보활동의 대부분을 이관 받았다. 이렇게 해서 게페우는 이전의 체카와는 달리 해외에서의 첩보활동과 세계혁명을 위한 공작활동의 임무도 적극 수행하게 됐다.

거기에는 스파이 활동과 첩보망 부식은 물론 공산주의 선전과 (지하당) 토대 구축을 위한 조직공작과 파괴공작까지가 다 포함돼 있었다.

당시 게페우의 해외공작은 우리와도 무관치 않았다. 1923년 1월 3일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는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하고 온 여운형도 참석했다.

소련은 이 대회에 20만 루블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지원했는데 역시 코민테른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정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이었다. 게페우의 공작이 개입돼 있었음은 물론이다.

1923년 7월 소비에트연방공화국헌법이 공식 채택되면서 게페우는 그해 11월 15일 다시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분리돼 오게페우(OGPU 합동 국가정치보안부)로 개칭됐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의 변화는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장관도 그대로 제르진스키가 맡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KGB의 국제적 측면의 틀이 갖춰져 갔다.

한편 1934년 7월 10일 비밀경찰 OGPU는 다시 엔카베데에 흡수됐다. 이후 엔카베데는 명칭과 조직에서 많은 변화를 거쳤다. 1938년과 1939년 사이에만 3번의 조직 개편을 실시했다. 그리고 1941년 2월 3일부터는 소련군의 군사정보를 담당하게 됐다. 이때 내무인민위원회에서 국가안보총국(GUGB)이 분리돼 국가보안인민위원회(NKGB)로 이름을 바꿨다.

카게베(KGB 국가보안위원회)의 탄생

2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는 소련 내무부로 이름을 바꿨고 국가보안인민위원회는 국가보안부(MGB)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는 사이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었다. 국가보안부와 내무부는 베리야에 의해 다시 합병됐다. 그러나 베리야가 전격으로 체포. 처형되면서 국가보안부와 내무부는 1953년 다시 분리됐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경찰과 교정시설을 담당하는 소련 내무부와 정치사찰, 요인경호, 해외첩보, 비밀교신을 담당하는 국가보안위원회(KGB)로 분리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렇게 해서 1954년 3월 13일 공식적으로 KGB가 출범했다.

KGB는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와 함께 등장했다. 흐루시초프는 나중에 스탈린을 격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KGB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비밀경찰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의 국제적 확산을 꾀하는 작업은 오히려 KGB 시대에 들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화됐다. 단지 더 세련되고 교활해졌을 뿐이었다. 이념적 독선과 전체주의 폭력성에 더해 기만성 또한 더 깊어졌다.

KGB는 냉전 시절 내내 그에 어울리는 활약상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그래도 결국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은 붕괴했다. 거짓과 허위의 몰락은 비밀경찰이 아무리 막강하고 첩보기관이 아무리 뛰어나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강호 편집위원
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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