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주의의 어제, 한국 보수주의의 오늘
미국 보수주의의 어제, 한국 보수주의의 오늘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4.02.10 10:13
  • 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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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준의 Book & World: 도널드 크리츨로우의 <보수주의의 우세>(The Conservative Ascendancy)를 읽고
 

11년 전인 2003년 1월 초. 광화문 교보빌딩 뒤에 위치한 한 음식점. 20∼40대 남성 1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얼핏 보면 여느 회식 모임과 비슷해 보였지만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각자 자기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자유전사, 마보, 개보, 활화산 등등. 자기 소개가 끝난 뒤 소주잔이 한 순배 돌았다. 조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잠시 후 대한민국의 장래를 우려하는 울분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모임은 당시 ‘자유전사’란 아이디로 활약하던 김필재 기자의 제의로 이뤄진 인터넷 ‘우익전사’들의 오프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애국청년단’(약칭 애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곧 인터넷과 아스팔트에서의 우익청년 선봉대가 됐다. ‘애청’은 훗날 대중성에 보다 강조점을 둔 ‘무한전진’과 행동성을 강조했던 ‘자유개척청년단’(자청)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무한전진’은 ‘한국자유연합’으로, ‘자청’은 ‘자유청년연합’으로 각각 발전·계승됐다.

자생적 청년 우파 조직의 태동

자생적 우익청년조직의 효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애청’의 첫 모임을 떠올리게 된 것은 얼마 전 어느 보수모임에서의 대화 때문이다. 한 저명 보수인사는 “나는 보수가 아니다. 단지 대한민국파일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보수 대 진보, 우익 대 좌익이라는 구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이었다.

이 분에 따르면 올바른 구도는 “대한민국 대 반(反)대한민국”이다. 분명 현재 정치대립의 중심구도는 “대한민국 대 반(反)대한민국”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보수가 아니다”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보수’란 한국어 단어가 지닌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전술적으로 사용하지 말자는 취지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현재 우리 운동이 ‘보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보수’(conserve)하는가? 바로 ‘대한민국의 가치와 체제, 그리고 그 삶의 양식’이다. 한국 보수운동은 ‘애청’ 조직 태동에서 보여준 것처럼 특정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8년 8월 건국하고, 6·25전쟁에서 피로써 수호하고, 60∼80년대에 땀으로 건설해낸 위대한 대한민국과 그 가치가 2002년 노무현 집권으로 침탈당하기 시작하자, 이에 맞서 대한민국과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보수운동이다.

즉 대한민국과 그 가치를 지키려는 자들과 그 체제와 가치를 파괴 혹은 변화시키려는 자들과의 싸움이 현 정치투쟁의 본질인 것이다. 보수는 결코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건국의 가치는 독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가치를 수호하려는 과정에서 이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자유민주주의적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원래적 가치를 복원·회복 혹은 지키려는 보수운동의 속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4·19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건국이념으로 심어놓은 것이며 4·19세대의 주력은 바로 그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으로 교육받고 성장해 ‘자유민주주의’로부터의 이탈에 대해 저항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4·19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이승만 건국이념으로의 복귀 혹은 회복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5·16 이후 산업화 과정 또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 대한민국 건국이념을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요소’의 후퇴에 대한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유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닉슨독트린 이후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세력의 강화라는 국제적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과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일시적 비상대권”이란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대한민국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민주화운동’세력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70년대만 하더라도 민주화운동세력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수호세력’이었으며 이들이 원한 것은 대한민국 체제의 변혁이나 혁명이 아닌 “대한민국 체제의 수호” 내지는 “위기에 놓였다고 판단된 대한민국 가치의 회복”이었다.

보수운동을 출현시킨 反 대한민국세력

1980년대 들어오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체제 변혁(혹은 전복)세력이 ‘민주화’의 탈을 쓰고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혁운동’ 세력은 날로 강화됐으며 점차 ‘민주화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7년 IMF 위기 속에서 이러한 ‘대한민국 변혁세력’과 연합한 김대중 정권이 탄생된다.

김대중 정권만 하더라도 ‘변혁’ 일변도는 아니었다. 구(舊)자유민주주의 민주화 세력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으며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친미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채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본질적이라기보다는 전술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체제 변혁 세력의 노골적 도전은 2002년 노무현 집권으로 시작된다. 대한민국 체제 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이 체제 변화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애청’도 그 중 하나였다.

‘애청’의 구성원들은 필자를 제외한다면 노무현 정권 출현 이전까지 사회운동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사회운동과 전혀 관계없던 평범한 젊은이들이 정치와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노무현 정권의 출현과 노무현 정권에 의한 대한민국 체제 뒤흔들기였다.

김대중 정권 때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하던 많은 사람들이 속속 새로운 사회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에게 붙여진 ‘보수’란 명칭은 ‘변혁세력’에 의해 ‘경멸조’로 사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사회운동으로 뛰어든 것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보수’란 표현은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보수운동 초기만 하더라도 보수진영에서도 ‘보수’란 용어 자체를 싫어하는 경향이 컸다. ‘진보’하면 뭔지 모르게 세련된 것 같고 ‘보수’하면 낡은 고집불통쯤으로 연상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 건국 가치’는 전혀 낡은 것이 아니며, 그 가치의 본질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대한민국 가치’가 아니라 ‘대한민국 가치로부터의 이탈’이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 보수운동은 ‘반(反)대한민국 세력’은 물론 대한민국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비(非)대한민국 세력’과도 차별된다.

물론 현실정치운동에서 주적인 ‘반대한민국 세력’을 고립·격파하기 위해 ‘비대한민국세력’과의 일시적 연대 혹은 이들의 중립·무력화가 전술적 상황에 따라 필요할 것이다.

최근 필자는 ‘보수주의 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이 호칭에 긍지를 느끼면서도 항상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미국 현대보수주의’를 소개하는데 그칠 뿐, ‘한국 현대 보수주의’는 이러한 것이라고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한계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독자적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선진기술을 도입, 수입대체산업화를 꾀하는 단계도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지적 풍토를 살펴보면 ‘정치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아니 소개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경제적 보수주의 혹은 ‘리버테리아니즘’(Libertarianism)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제법 소개되었다. 그러나 미국 현대 보수주의에 대한 소개는 사실상 전무하다. 이러한 지적 공백은 하루속히 메워져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보수주의 운동 차원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로서 현재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이다. 그런데 그러한 국가의 가장 큰 축을 형성하는(최소한 양대 축의 하나인) 미국 현대보수주의가 소개조차 되지 않고 있는 대한민국의 지적 풍토는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현대보수주의는 反 뉴딜에서 시작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도널드 크리츨로우(Donald Critchlow)의 <보수주의의 우세>(The Conservative Ascendancy)를 읽었다.

이 책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보수주의 운동이 어떻게 형성돼 미국의 ‘리버럴 컨센서스’(Liberal Consensus)를 극복하고 1980년대 레이건 보수주의 혁명을 이룩해 소수 지식인의 아이디어였던 ‘미국 현대보수주의’를 미국의 주류 이념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1990년 클린턴 시대도 문화·도덕 영역을 제외하고는 ‘미국 현대 보수주의’의 이념적 헤게모니 속에서 진행된 시절로 파악한다. 빌 클린턴이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명백한 이념적 회귀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이른바 ‘새로운 민주당 노선’이란 기치 하에 레이건의 정치·경제·안보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보수주의 헤게모니’의 위기가 도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오바마의 집권으로 미국 보수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집권으로 미국의 건국이념 혹은 헌법적 가치가 위기에 놓이게 됐으며 따라서 이를 ‘보수’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반(反)뉴딜운동으로 시작됐다.

당시 대세였던 뉴딜과 이에 따른 ‘미국 현대 리버럴리즘’에 대한 반발은 크게 3가지 흐름으로 나타났다. 첫째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의 가치를 중시하는 고전적 리버럴리즘 혹은 리버테리안적 흐름이었다. 둘째는 루스벨트의 친소유화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셋째는 ‘미국 현대 리버럴리즘’의 ‘대중 민주주의’와 ‘몰가치적 서구 문명 부정’에 반발한 전통주의자들이었다.

이 세 흐름은 1955년에 창간된 <내셔널리뷰>에서 융합되어, ‘미국 현대 보수주의’로 재탄생된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가 대중운동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첫 계기는 1960년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YAF)이라는 청년 보수주의 조직의 건설이다. 이 조직을 통해 ‘미국 보수주의 운동’은 “정치철학에 기반한 지적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단순한 “현상유지 세력”(defenders of the status quo)이 아니라, “미국의 창조자”(creator of the future)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리고 1964년 보수주의자 배리 골드워터를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게 만들면서 현실정치 운동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로써 “무이념 기득권층의 결합체”였던 공화당을 “이념(ideas)와 행동(action)”의 정당으로 만들려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지난한 투쟁이 시작된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은 배리 골드워터의 대통령 선거 패배로 잠시 주춤하게 된다. 그러나 1965년 ‘미국 보수주의 연맹’(American Conservative Union, ACU)을 결성, 공화당과는 별도의 미국 보수주의 운동 중심을 만들어낸 뒤 대중과의 대대적 재결합을 시작한다.

보수주의가 싸워야 할 ‘철의 삼각지대’

1970년대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중심은 ‘뉴라이트 운동’(New Right)이었다.(미국의 뉴라이트 운동은 이름만 같을 뿐, 한국의 뉴라이트 운동과는 다른 성질의 운동이다.) 미국 뉴라이트 운동은 스스로를 “급진적”(radical)으로 불렀다.

기존의 보수주의 운동이 지식인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면, 미국 뉴라이트 운동은 대중의 “풀뿌리 운동”에 기반 한 “반(反)기득권 운동”이었다.

리처드 비규어리(Richard Viguerie), 하워드 필립스(Howard Phillips), 폴 웨이리치(Paul Weyrich) 등이 주도한 이 운동은 운동의 중심 인물들이 1960년대 보수주의 학생운동 출신들로서 낙태 반대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를 중심에 놓기 시작했으며 ‘리버럴’ 뿐만 아니라 공화당 기득권층에 대해서도 “즉각적 감정에 호소”를 바탕으로 한 “포퓰리스트적” 공격을 단행했다는 점에서 다소 점잖던 ‘올드 라이트’(Old Right)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뉴라이트에 의한 보수주의 운동의 대중화는 1973년 헤리티지재단 설립 등으로 대변되는 ‘싱크탱크’(Think Tank) 운동, 그리고 유대계 전향파가 중심이 된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 운동과 결합되면서 1980년 레이건 혁명을 이룩하게 된다. 레이건 혁명 이후 보수주의자들이 싸워야 할 주전선은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로 불리는 반(反)개혁 3자 연합세력과의 싸움이었다.

의회 내 민주당 세력, 연방 관료, 노조 등 이익집단 등으로 구성된 ‘철밥통 연합’의 저항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철밥통은 깨어지지 않는다. 다만 찌그러질 뿐”이라는 이들과의 싸움은 기동전이 아니라 건물 하나, 블록 하나씩 장악하며 전진해야만 하는 스탈린그라드형 시가전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정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위대한 성전(聖戰)은 문화·역사·철학, 그리고 도덕의 영역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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