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中의 아프리카 패권 경쟁
日·中의 아프리카 패권 경쟁
  • 미래한국
  • 승인 2014.01.28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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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부대 주둔 남수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지난 12월 22일 평화재건 임무를 위해 남수단에 간 한빛부대가 유엔을 통해 일본 자위대로부터 탄약을 빌렸다. 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은 이 문제를 철저히 국내 정치에 활용했다. 한빛부대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1월 10일 합참이 C-130H 수송기에 실어 보낸 탄약과 식량, 장비들을 보급 받고 일본 자위대에 빌렸던 탄약을 모두 갚은 뒤에야 사라졌다.

그런데 3주 동안 한빛부대에 관한 국내언론 보도 중 남수단 내전이 왜 일어났는지, 미군이 왜 한빛부대를 도울 수 없었는지, 수단과 남수단, 그리고 배후에 있는 국가와 우리나라 간의 관계를 설명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50년 내전 역사 살펴야

남수단과 수단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나라의 내전을 알아야 한다. 수단은 1956년 영국과 이집트로부터 독립했다. 수단은 이슬람계가 주류인 북수단, 기독교계와 토착종교를 믿는 남수단을 포함한 지역이었다.

남수단은 2011년 2월 수단으로부터 독립했다. 북수단과 남수단 사이의 종교·민족 분쟁은 해묵은 갈등이다. 수단 내전은 독립 직후부터 15년 동안 계속됐다. 이 1차 내전으로 100만여 명이 살해됐다.

1983년 남수단의 독립을 요구하는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새로 등장하면서 2차 내전이 시작됐다. 2차 내전은 30년 넘게 이어졌지만 세계는 내전보다는 수단 정부가 후원하는 ‘테러 캠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조직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테러 캠프는 90년대 후반 사라졌다.

수단이 다시 세계의 주목을 끈 것은 2000년대 중반이다. 2003년 수단 정부가 수단인민해방군을 소탕한다며 친정부 이슬람 계열인 잔자위드 민병대를 동원해 남수단 부족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 일은 2006년부터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다 2007년 ‘다르푸르의 학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5년 동안의 학살 동안 사상자는 30여만 명에 달했고 270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서방 언론들이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소유한 공기업이 수십억 달러를 수단 정부에 지원하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잔자위드 민병대에 무기를 공급한 사실을 폭로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단 정부의 ‘학살’을 지원한 건 ‘국가전략’ 차원이었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던 중국은 자국 기업의 생산효율성을 높이기보다는 제3세계의 자원을 돈으로 독차지하려고 시도했다. 첫 대상은 아프리카였다. ‘서방의 압제에서 해방하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수단은 풍부한 석유와 금, 다이아몬드 등을 가진 나라였다. 수단을 눈여겨 본 중국 정부와 인민해방군은 거액을 지원했다. 이 돈과 무기가 남수단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들어간 것이다.

중국은 수단 정부가 남수단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눈감아주고 지원하는 대신 석유와 금, 다이아몬드 등을 독차지하려 했다. 수단에 거대한 농장도 건설했다(이 무렵 우리나라 대기업도 북수단 지역에 68만 헥타르 규모의 밀 농장을 구입했다). 하지만 ‘다르푸르 학살’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중국의 아프리카 전략은 큰 손실을 입었다. 서방 강대국들은 수단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남수단’이라는 나라가 생겼다.

수단과 중국 정부는 남수단이 독립할 경우 문제가 심각하다고 봤다. 북수단 지역에는 유전이 없었던 것이다. 원전 대부분은 남수단 지역에 있었고 북수단은 이를 채굴해 정제하고 수출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드러난 중국의 속내

남수단이 독립하기 전 중국은 공산당 소유 공기업인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를 통해 남수단 현지 석유업체인 그레이터나일 석유(GNPOC) 지분 40%를 확보했고 남수단 곳곳에 송유관을 깔아주기도 했다. 들어간 비용은 수백억 달러로 추산된다.

냉전 시절 수단의 후원자였던 아랍연맹의 눈치를 보면서 수백억 달러를 지원하고 꾸준히 공을 들였던 중국 입장에서는 남수단이 독립하면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2011년 2월 결국 남수단은 독립한다. 이때 잽싸게 일본이 ‘숟가락’을 얹었다.

일본은 치안부재상태인 남수단에 공식 대사관을 개설하고 주변국과 분쟁을 일으키던 남수단에 거액을 투자하며 후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남수단에서 케냐를 거쳐 우간다까지 이어지는 송유관이다.

남수단은 독립한 뒤 이웃 나라 케냐에 ‘접경지역 1만3300㎢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케냐는 남수단의 송유관 사업에 반대하며 분쟁까지 각오했다. 내륙국가인 남수단은 이웃 나라들을 통하는 송유관을 만들지 못하면 경제를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일본이 나섰다. 일본은 꾸준한 협상과 투자 약속을 통해 케냐를 설득했다.

2013년 9월 12일 日교도통신의 보도 중 일부다.

“도요타 통상은 남수단과 케냐를 잇는 송유관 건설을 위해 빠르면 2013년 내에 남수단과 케냐, 우간다 3국 정부와 공동으로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송유관 공사는 이르면 2014년에 착공한다.”

이 사업에 드는 비용은 50억 달러. 대부분은 일본 기업이 조달할 예정이다. 일본 언론은 이 사업을 ‘중국에 대항해 아프리카 진출을 강화하려는 일본의 대외전략’이라고 해석했다.

 

호전적인 남수단 종족

수단-중국 對 남수단-일본 간의 관계 외에도 생각해야 할 점이 남수단 부족의 호전성이다. 독립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남수단 정부는 접경 국가들에게 ‘영토를 내놓으라’며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있다.

앞서 언급한 남수단-케냐-우간다 간의 송유관 건설 사업이 무산될 뻔했던 것도 남수단 정부가 케냐에 먼저 접경지역을 모두 내놓으라고 한 탓이다. 이 갈등은 일본의 대규모 투자로 무마됐지만 불씨는 지금도 남아 있다.

남수단 정부는 탱크 한 대 없으면서도 수단 국경마을을 침공해 점령하기도 했다. 2012년 4월 11일 남수단군은 수단의 헤글리그 지역을 기습 공격했다. 이에 수단군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무력을 내세워 헤글리그 지역을 탈환했다. 수단군은 보복으로 4월 23일 남수단의 도시인 벤티우를 공습했다.

이 전투로 남수단군 수백여 명, 민간인 수십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주변국에 먼저 시비를 걸고 그때마다 얻어터지면서도 남수단 정부는 꿋꿋하게 주변국에 영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우간다와의 갈등 조짐도 보이고 있다.

내부 종족 갈등도 문제다. 이번 남수단 내전은 지난 12월 15일 딩카족 출신인 살바 키르 대통령이 누에르족 출신인 리크 마치르 부통령을 해임하자 부통령을 지지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누에르족이 대부분인 남수단군 8사단을 주축으로 반군이 남수단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고 한빛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보르市 인근까지 점령하게 된 것이다.

 

남수단의 치안도 심각하다. 현지를 취재한 외신 기자들에 따르면 소 한 마리를 차지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살해하고 외국인이나 부유해 보이는 사람이 경호원 없이는 돌아다니다가는 납치·살해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남수단이라고 한다. 국방부와 외교부 등은 이런 남수단 상황에 대해 잘 알고 한빛부대를 보낸 걸까.

한빛부대가 유엔을 통해 일본 자위대에게 탄약을 빌렸을 때 일각에서는 “왜 미군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세계의 경찰’ 미군도 남수단에는 적극 개입할 의사가 없다. 현재 남수단에도 미군은 있다. 병력은 45명. 남수단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美아프리카사령부에서 급파한 특수부대 병력이다.

이들 또한 남수단 치안 부재와 내전 때문에 철수하려 한다. 지난 12월 22일 미 대사관 직원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한 ‘MV-22 오스프리’ 수송기가 반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美해군 특수부대 SEAL 대원 4명이 총상을 입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사령부가 있는 美아프리카사령부는 남수단 내전이 심해지자 보병 1개 여단을 파병할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美육군 소속 신속대응팀 병력 150여 명은 남수단 인근 지부티의 전진기지에 머무르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미군도 남수단에는 가지 않는다?

지난 1월 4일 미국은 남수단 수도 주바市에 머물던 대사관 직원 20여 명을 해병대 KC-130 수송기로 철수시켰다. 지금도 미군이 남수단에 개입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미군만 남수단 내전에 개입하기 싫어하는 게 아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남수단에 평화유지군을 추가로 파병하기 보다는 아프리카에 주둔 중인 기존 평화유지군을 남수단으로 재배치하기로 했다. 잘못 파병을 했다가는 ‘제2의 소말리아 사태’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이미 남수단에서 평화유지활동 중인 나라 부대들은 주둔지에서 아예 나오지 않고 있다.

일본 자위대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규모의 평화유지병력을 보냈지만 전투 병력이 거의 없는 데다 내전이 격화되자 주둔지에서 아예 나오질 않고 있다. 한빛부대를 지켜준다는 인도군과 네팔군 또한 내전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고 난민 구호활동만 펼치고 있다고 한다.

 

남수단 내전, 한빛부대만의 문제 아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 한빛부대의 상황은 크게 심각하지 않다고 한다. “유엔군에 적대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는 유엔남수단평화유지임무단(UNMISS) 사령부의 요청을 남수단 반군이 받아들였다고.

한빛부대는 보르市에 있는 주둔지 내에서만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1월 8일 한국에서 보낸 식량과 장비, 자재 등을 수령했고 10일에는 탄약까지 수령, 일본 자위대에서 빌린 1만여 발의 5.56mm 탄약을 모두 갚았다. 합참은 한빛부대에 수만 발의 탄약과 7.62mm 기관총, 기타 지원물자를 보냈고 TF를 구성해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 중이다.

우리 정부와 언론은 한빛부대의 안전에만 관심 있지만 남수단 내전은 동아시아 패권 경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남수단 내전은 정부군과 반군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보르市와 남수단의 수도 주바市 사이 120km 거리 지역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양측은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다. ‘동아프리카 정부간 개발기구(IGAD)’의 중재로 지난 1월 4일부터 벌이고 있는 정전 협상은 양측의 입장 차이로 큰 진전이 없는 상태다.

이 가운데 중국 공산당 정부는 지난 1월 8일 양측을 중재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지난 60년 동안 중국 공산당이 표방한 ‘내정 불간섭 정책’을 파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1월 6일 아프리카 순방에 나선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중국의 아프리카 특사가 현재 남수단과 수단, 케냐, 우간다, 에티오피아 등을 돌며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국의 이 같은 행보는 자신들이 거액을 투자한 수단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최근 독립한 남수단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은 1993년 10월 ‘도쿄아프리카개발회의(TICAD)’를 연 뒤 ‘아프리카를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NEPAD)’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동안 아프리카 개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던 일본은 2000년대 중반 중국이 아프리카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해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을 본 뒤 다시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남수단에 대사관을 마련하고 송유관 건설에 5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한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1월 9일에는 아베 신조 日총리가 코트디부아르, 모잠비크, 에티오피아 순방에 나섰다.

즉 남수단 내전은 단순한 종족 간 갈등이 아니라 마치 19세기 말 영국의 3C 정책과 독일의 3B 정책이 충돌하는 것처럼 중국과 일본의 패권 경쟁을 보여주는 전쟁이라는 말이다. 영국의 3C 정책과 독일의 3B 정책은 1차 세계대전의 이유로 발전하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을 이웃에 둔 우리나라가 남수단 내전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전경웅 객원기자 enoch205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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