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華的(중화적) 질서를 경계한다
中華的(중화적) 질서를 경계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6.1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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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대륙 중국의 공식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고 대만의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다. 공통적으로 중화(中華)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국인의 정체성이 집약돼 있는 용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한 고유성 이상의 어떤 의미가 함축돼 있다. 주변에 대한 우월의식이다.

나라 이름은 대개 지명이나 어떤 역사적 인명에서 유래하는 경우가 많다. 아메리카는 그곳이 신대륙임을 확인한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했고, 러시아도 루스라는 바이킹 계 종족 명칭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중화는 그런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하나의 관념이다. ‘중화’는 주변 이족(夷族)을 전제로 하는 상대적 개념이며, 그것을 야만으로 간주하고 자신을 문명으로 자부하는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그런 식의 구분이 중국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자신을 문명으로 그리고 그 주변을 야만으로 간주하는 관념은 ‘문명’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을 헬레네스(Hellenes) 그 주변 이민족을 바바로이(Barbaroi)라고 차별적으로 구분했다. 로마도 마찬가지로 주변 이민족을 바바루스(Barbarus)라고 칭했다. 야만인을 뜻하는 영어 Barbarian의 어원이다.

중국문명이 동아시아의 최초이자 가장 앞선 문명이기도 했던 만큼 우월관념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오늘의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가려 한다면 문제가 된다.

중국의 바람이 어떻든 오늘날 ‘중화적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는 없다. 패권에 대한 저항감 때문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중화’가 삶의 양식의 측면에서 현대적 ‘보편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업토지문명적 삶의 양식과 현대적 상공업문명과의 부조화다.

패권국가는 어느 시대고 늘 있기 마련이며 언제나 일정하게는 저항에 봉착한다. 그 저항을 넘어 자신의 헤게모니를 관철시키는 성공적인 패권 국가는 물리적 ‘힘’ 이상의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기꺼이 수용하고 싶은 삶의 양식, 모방하기만 해도 안정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듯이 보이는 문화는 패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강한 설득력으로 작용한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중국문명도 한때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다.

중화적 양식과 질서의 이념적 뿌리는 공자가 이상화했던 주나라 정전제(井田制)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천하를 9주(州)라고 칭했다. 이것은 토지를 9등분하고 그 가운데 중토(中土)에 지배자가 위치하는 정전(井田)의 구획 개념이 확대된 것이다.

중토(中土)에 위치하는 나라가 중국(中國)이고 그 주인공이 바로 중화(中華)족이었다. 그 바깥에 위치한 족속이 이족(夷族)인데,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흉노 등의 유목민이었다. 중화는 ‘성’을 쌓아 그들과 자신을 ‘구분’ 짓고 자신의 공간을 보호하고자 했다.

확장을 포기하고 지키는 데 치중했지만 중원의 거대함이 그 소극성과 폐쇄성을 상쇄하고 보상했다. 때문에 중화는 가장 폐쇄적일 때도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힘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규모가 부여한 예외성이었다.

소중화 조선의 실패

조선은 ‘중화적’ 양식과 질서를 받아들인 대표적인 주변국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은 내적으로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과 주자학적 예학을, 외적으로는 화이(華夷) 질서에 입각한 사대(事大)를 기본 원리로 했다.

그러면서 문화적으로는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자처해도 소중화가 중화가 될 수는 없었다. 원판과 복제본의 차이가 아니었다. 본질적인 조건이 달랐다. 무엇보다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작은 나라였다. 농업생산력을 아무리 끌어올려본들 중국은 물론 일본의 수준에도 비교가 될 턱이 없었다. 농자를 천하대본으로 한다면 ‘한반도 국가’는 영원히 경제적으로 그 아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현대의 격동을 거치는 동안 오랜 세월 한반도를 규정했던 중화적 질서는 무너졌다. 그런데 무너진 것은 단지 국제질서로서의 ‘중화’만이 아니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중화적 양식 또한 퇴장했다. 농경과 토지에 묶인 삶이 아니라 상공업이 전면적으로 개화하는 시대가 열렸다.

오늘 한국이 이만큼이나마 부를 누리는 것은 화이질서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중화적 결박에서 풀려난 덕분이다. 이런 원리는 한국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현대의 모든 국가들이 다 마찬가지며, 중국 주변의 동아시아 국가들도 당연히 그렇다.

농업은 토지의 크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상공업은 토지의 크기에 좌우되지 않는다. 적절한 조건을 갖춘 거점과 그것을 연결하는 망이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현대세계의 삶의 양식은 토지에 결박되지 않고 적절한 조건의 지역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던 유목적 생활양식과 매우 닮아 있다.

오늘의 세계는 상공업적 측면에서는 육지와 바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마치 담벼락 없는 초원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제목대로 “세계는 평평하다.”

대지의 법과 계약의 법

농경적 세계에서는 토지가 신성화되고 그 질서는 그 신성한 토지와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공간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마드(Nomade. 유목민)적 세계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 질서의 기본이 된다.

공업 생산물을 상품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업도 그와 마찬가지로 거래 당사자 사이의 계약을 질서의 기본으로 한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농경의 비중은 매우 절대적이었다. 동서의 거의 모든 문명이 농경이 이루어지는 토지를 둘러싼 규칙을 사회적 국가적 질서의 핵심적 요소로 했다. 중화적 양식과 질서도 그 전형의 하나였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 문명이었다. 이스라엘은 정착지가 없는 유목종족이요 방랑의 종족으로 시작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갔지만 그것을 갖기 전 먼저 율법을 탄생시켰다.

그들의 법은 ‘대지의 법’이 아니라 ‘계약의 법’이었으며, 그 신성함은 땅과의 관계가 아니라 ‘신과의 관계’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 간주됐다. 히브리-이스라엘-유대는 그 등장 초기부터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기를 땅을 갖지 못한 채 떠돌았다. 그러나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간의 계약의 율법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가 만개하기 전 대지에 뿌리를 갖지 않은 유대적 삶의 양태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적 원리의 세계다. 그 원리는 한때는 반유대주의적이었던 기독교 문명권과 견고히 결합해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 원리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중화문명의 주역이었던 중국이 다시 용틀임을 하고 있다. 경제적 관계나 역사적 문화적 친연성에서도 그렇지만 남북관계 문제를 감안할 때도 중국과의 관계는 유혹이다. 그러나 과도한 기대는 물론, 정도 이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더욱 금물이다.

우리 민족은 중화적 질서 속에서 살아오다 멸망을 맞았고, 해양 기독교문명과 만나면서 재생과 부흥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했던 구분의 울타리를 허무는 게 돼선 안 된다.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중화가 아니라 해양과 서방에 있기 때문이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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