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두 개의 로마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두 개의 로마
  • 미래한국
  • 승인 2013.05.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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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자주는 아니지만 로마 가톨릭이 거의 확실하게 세계적인 뉴스의 초점 중 하나가 될 때가 있다. 교황이 선출될 때다.

이 때면 전 세계 매스컴의 카메라는 일제히 로마의 바티칸으로 향한다. 세계 각지로부터 소집돼 성 시스티나 성당으로 향하는 추기경들과 광장에 운집한 엄청난 인파의 모습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지난 3월 16일부터 18일, 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기까지 28시간 동안 그 광경이 전 세계인들의 안방까지 중계가 됐다. 그동안 사람들은 평소에는 접하기 힘들었던 어떤 용어를 거의 매일 매시간 들을 수 있었다. 콘클라베(Conclave)다.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의 선거회의를 뜻한다.

콘클라베는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관심거리가 될 만한 대목이 많다. 교황 선출이 완료될 때까지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다든가, 선출이 무산되면 검은 연기가 선출이 성공하면 흰 연기가 피어오르게 된다는 등 형식 자체만으로도 시선을 끈다. 유래도 흥미 있다.

13세기 교황 선출이 무려 3년을 끌어도 끝이 나지 않자 추기경들을 한곳에 모아 선출이 완료될 때까지 빵과 물만 공급하면서 감금했던 게 기원이다. 좀 불경스럽게 표현하자면 콘클라베에는 확실히 ‘흥행코드’가 있다.

교황과 황제, 추기경회의와 원로원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표면적 흥밋거리가 아니라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회의 자체의 의미다. 로마사에 다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마치 고대 로마의 원로원을 꽤 닮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추기경은 ‘교황의 원로원 의원’이라 불린다.

그러고 보면 교황은 명백히 고대 로마제국의 황제를 연상시킨다. 물론 “신분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이 독재적 주권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민주적”(칼 슈미트)이라는 점에선 황제와는 다르다. 하지만 어쨌든 로마 가톨릭의 시스템에서 고대 로마제국의 흔적을 느끼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사실 단순히 가톨릭만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그렇다.

기독교의 초창기 교회제도는 당연히 유대교의 회당제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 기독교가 로마 세계 전반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로마제국의 사회정치제도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도로망을 따라 전파돼 갔으며 그 조직과 위계는 점차 로마제국의 정치행정의 체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제국이 본격적으로 기독교 제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면서 그 같은 흐름은 더욱 결정적이 됐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체계는 그 이후 수많은 역사적 굴곡을 거쳐 이뤄졌다. 하지만 그 기본 틀은 로마제국의 행정체계에서 왔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복음을 제공했고 로마제국은 기독교에 행정체계를 제공한 셈이다.

로마제국이 기독교에 제공한 것은 ‘행정’만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이라는 세계의 존재 자체가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민족종교를 뛰어넘어 보편적인 종교로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수운동’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그치게 될 수도 있었다. 이 운동이 유대공동체의 울타리를 확실하게 넘어서기 시작한 것은 바울과 베드로가 이방선교에 나서기 시작하면서였다.

로마 세계의 “땅 끝까지” 펼쳐졌던 ‘전도’ 과정은 뒤집어 보면 ‘예수운동’이 세계화 즉 로마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보편주의’를 자기화시키게 됐다. 칼 슈미트의 말을 빌자면 그렇게 해서 기독교 특히 “역사적 복합체, 행정장치로서의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보편주의의 후계자”가 됐다.

기독교화, 로마화, 문명화의 삼중주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는 로마의 기독교화 과정을 그리스-로마 고전문명 쇠락으로 간주한다.

이른바 ‘중세 암흑시대’를 기독교 탓으로 돌리는 시각도 팽배하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계몽주의 이래의 통속적 오류로, 역사적 사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기독교 문명은 그리스-로마 고전문명의 상속자이자 보존자였다.

기독교는 자신의 뿌리였던 유대교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책’ 즉 문자의 종교였다. 교회는 ‘경전’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의 고전도 스스로를 위해 보존했다.

그리스의 철학은 ‘신학’을 위해 그리고 로마의 법학은 교회법으로 살아남았다. “교회는 로마 법학의 진정한 상속인이었다.”(칼 슈미트)

게르만족은 대이동으로 기독교 로마와 조우하면서 처음으로 문자생활을 시작했다. ‘책’의 종교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자신들의 연대기를 ‘서술’하기 시작했다.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부족적 관습법을 넘어 성문화된 법률생활이 시작된 것도 교회법을 수용하면서였다. 게르만족이 본격적 의미에서 ‘국가’를 형성시키기 시작한 것은 모두 기독교와 만나면서였다.

폴 존슨의 지적대로 게르만족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로마화를 의미하고, 로마화는 문명화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중세는 기독교로 인한 암흑시대가 아니라 야만으로서의 게르만이 기독교를 매개로 오랜 과정을 거쳐 문명화해 나간 과정이었다.

기독교는 암흑의 원인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종교적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문명사적 의미 그대로 암흑에서 밝음으로 인도하는 등불의 역할을 했다.

물론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의 역사에는 수많은 굴곡은 있었다. 교회의 타락도 있었고 갖은 혼란이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언제나 ‘문명을 보존’하고 있었다. 르네상스에서 시작해 계몽주의까지 이어진 ‘중세 기독교’에 반발한 일련의 흐름도 사실은 교회 자신이 보존하고 있었던 ‘고전’이 널리 퍼져 나간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서구문명은 그 시작은 물론이요 중세든 근대든 어쨌든 기독교가 주조한 것이며, 고대 로마 문명은 그 기독교에 실려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美 건국자들, 공화국 로마를 부활시키다

미국의 정치 시스템이 고대 로마의 공화정을 닮았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상원은 고대 로마의 원로원에 하원은 민회에 해당한다. 미국의 상원 Senate는 고대 로마 원로원 Senatus의 영어식 표기에 다름 아니다.

미국식 정치제도의 고유한 발명품으로 간주되는 ‘대통령 President’는 고대 로마의 제도에서 착안한 것이다. 공화정 시대 로마는 평상시에는 임기 1년의 집정관을 전시와 같은 국가 비상시에는 임기 6개월의 1인의 독재관을 뽑아 전권을 위임했다. 대통령은 이 집정관과 독재관을 합쳐 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미국의 파운딩 파더(Founding Father)들은 고대 로마를 동경한 로마사 마니아들이었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인물들을 자신들의 별명으로 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워싱턴은 킨키나투스나 파비우스로 불리곤 했다. 해밀턴을 비롯한 몇몇은 푸블리우스라는 로마식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곤 했다.

그런 만큼 미국 정치의 도처에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상징이 숨어 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독수리가 미국의 문장인 것은 잘 알려진 예다. 파스케스(Fasces)는 더욱 독특한 사례다.

자작나무 막대기를 묶은 원통형 다발에 도끼를 꽂은 것인데 고대 로마 집정관의 통치권의 상징이었다. 파스케스는 미국 상하원에서부터 링컨의 좌상에 이르기까지 도처의 조형물에 장식돼 있다.

미국은 이렇게 건국 초부터 의식적으로 거의 모든 면에서 고대 로마를 본뜨려 했다. 물론 오늘날 미국의 위상이 고대 로마의 지중해 세계에서의 위상과 닮았음도 물론이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신성동맹

그런데 미국은 이렇게 공화정 로마를 철저히 재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문명을 기초로 한 나라이기도 했다. 미국은 청교도 필그림(Pilgrim)들을 늘 스스로의 정신적 뿌리로 간주했다.

미국의 이러한 ‘공화정과 기독교’가 ‘또 다른 기독교’와 국제무대에서 역사적 조우를 한 때가 있었다. 19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미국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시대의 가톨릭의 만남이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요한 바오로 2세와 그에 ‘못지않은’ 반공주의자인 레이건이 한편에 서게 됐다. 이 상징적 연대는 소련을 정점으로 한 국제 공산주의 진영을 거세게 흔든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

폴란드 출신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련 동구진영에 대한 압력이었으며 레이건은 소련에 거센 압력을 계속 가해 나갔다. 그리고 결국 장벽은 붕괴하고 소련 진영은 차례로 무너졌다.

당시 어떤 언론은 이를 두고 신성동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이 표현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신성동맹에 빗대 ‘레이건-요한 바오로 2세’의 연대가 보수 반동적이라고 비난하려는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평하자면 그 표현은 적절했다.

그리고 그것은 신성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적이게도 ‘기독교 문명으로서의 로마’와 ‘공화정으로서의 로마’, 두 개의 로마가 재결합한 모양이기도 했다.

기억, 역사, 이념

로마제국은 이미 오래 전에 역사가 됐다. 하지만 역사가 된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이 다르다는 건 이 경우에도 느끼게 된다. 서구문명이 로마와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세계가 그러한 서구문명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있음은 좋든 싫든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오늘의 이 시대는 여전히 로마적 세계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점에 이르러 무르익은 문명은 잠시 단절될 수는 있어도 결코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흔적은 남기기 마련이며 오랜 잠에 들어갔다가도 계기와 주인공을 만나면 또 다시 깨어나 살아 움직이게 된다.

기억은 역사가 되고 기억된 역사는 다시 이념이 된다. 그리고 그 이념은 다시 역사를 움직여 나간다. ‘다른 문명’들의 ‘또 다른 역사’도 마찬가지며 세계사는 그렇게 형성된 여러 이념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살아남고 어떤 것은 퇴장한다. 앞으로 세계 문명은 무엇을 자기 이념으로 하게 될 것인가?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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