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의식’은 없다
‘계급의식’은 없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5.1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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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테제다. 사적 유물론에서부터 계급론 혁명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사회 정치 이론은 이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핵심 테제는 마르크스의 가장 충실한 제자를 자처한 레닌에 의해 일찌감치 부정된다. 레닌은 노동자계급 대중이 혁명적으로 되는 것은 목적의식적인 전위에 의해 그렇게 이끌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그렇게 썼고 그렇게 행했다. 전위의 목적의식이 대중의 혁명성을 이끌어낸다는 건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강남좌파’류는 언제나 있었다

러시아혁명의 주역인 소위 그 혁명적 전위들의 존재 양태 자체도 마르크스의 테제를 부정한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부르주아 출신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계급적 존재조건과는 어긋나는 길을 갔다.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역규정’한 것 아닌가? 이 모든 것 이전에 마르크스 자신부터가 하나의 역설이다. 스스로가 전형적인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낭비벽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화하기는 했어도 단 한 번도 노동자였던 적은 없다.

그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던 동료 엥겔스는 심지어 공장주였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마르크스 이전에도 그랬고, 러시아혁명 이후의 모든 좌익혁명운동이 다 그랬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주의의 원조는 대부분 <태백산맥>에 나오는 기층 민중들이 아니라 일본유학을 다녀온 부유한 지주들의 자식들이었다.”

“1945~1953년의 격변의 해방 8년사… 후도 마찬가지다… 좌파운동은 사라졌지만 민주화운동, 그리고 취약하나마 진보운동을 주도한 것은 강남좌파였다. 70년대 이후를 예로 든다면 DJ, YS로부터 재야지식인들, 학출(학생운동 출신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들), 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을 메운 사무직 노동자 등 운동을 이끈 것은 대부분 강남좌파였다.”

反마르크스주의자의 지적이 아니다.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자 중 한 명인 손호철(서강대)의 말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남좌파’의 존재를 변호하기 위해 예의 사례를 들고 있다. “강남좌파를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의 말이 맞다. 사실 언제 어디서고 급진적 주장을 들고 나와 뛰고 떠드는 자들은 늘 강남좌파 같은 부류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남좌파가 결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서도 “진짜 문제는… 강북우파”라고 개탄한다. 강북으로 상징되는 서민층은 ‘당연히’ 좌파이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좌파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왜 강북우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상투적인 답이 있다. 그들은 지배계급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이지만, 어찌됐든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기본 테제는 ‘강남북’ 양방향에서 부정되고 있다.

손호철도 “인간의 의식이 기계적으로 계급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의 테제는 기본적으로 맞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이쯤 되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교주의 독트린을 수호하고자 하는 안간힘일 뿐이요,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선언일 따름이다.

차라리 지식분자들은 늘 그렇다고 한다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그에 한해서만큼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회적 의식은 이미 더 이상 물질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분자들의 이념의 문제가 된다.

실제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의 논리든 혹은 저항의 논리든 그것은 언제나 지식분자들이 내놓는 ‘세계에 대한 이러저러한 해석’에 기대어 있었다. 계급이 이념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념이 계급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계급의식 아닌 관념의 유희가 있을 뿐

마르크스는 유감스럽겠지만 사실 이것은 헤겔의 복귀에 다름 아니다. 사적 유물론의 기반은 허물어지고 역사는 물질적 과정이 아니라 다시 ‘이념의 자기운동 과정’이 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정신현상학으로 환원되고 물질적 조건에 따른 계급의식은 실체가 없어진다.

객관적인 계급의식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앞세운 혁명론도 근거를 상실한다. 그런데도 혁명을 외칠 수 있나? 상관없다!

레닌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이상 그런 딜레마에 신경 쓰지 않는다. 레닌은 “혁명이론 없이 혁명은 없다”고 했고, 루카치는 레닌의 이 테제를 변주해 아예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적 범주”라고 했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으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을 경우엔 역사 변혁의 담당자를 이념으로서의 계급의식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없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요, 객관 없는 이념만의 혁명이다. 그런데 그런 혁명이란 결국 거기에 집착하는 자들의 관념의 유희일 뿐이다. 일종의 정신적 약물이다. 좌파지식분자들을 위한 약물 말이다.

한국은 어떤가? 후진국이라서가 아니라 충분히 성숙한 고도의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넘나드는 현대자동차와 같은 기업의 노동자를 무산자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부르주아 뺨치게 부유한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노동운동의 최선두를 이루며 “노동해방”을 외치고 있다.

루카치가 예를 든 경우와는 반대로 배가 불러 프롤레타리아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계급의식’을 앞세우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희롱인데 여기에 강남좌파적 지식분자들이 즐거이 편승해 있다.

구호가 아니라 문제 해결의 연속이어야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산업사회인 한 자연발생이며 헌법상으로도 권리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물든 정치적 농단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프롤레타리아는커녕 스스로가 비정규직에 대한 착취자의 입장인 노동귀족들이 그 점은 은폐한 채 위선적으로 계급적 정치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기에 종북성향 무리들까지 그 속에서 서식처를 구하고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부자를 질시하고 저주하도록 선동당하면 부자보다 더 확실하게 지옥으로 향하게 된다. 비유가 아니라 역사의 증명이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주의적 깃발은 예외 없이 민중을 도탄으로 인도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금 그 실패한 이데올로기에 기울어 있다. 민노총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공간에서 좌익에 반대하며 성립된 역사를 가진 한국노총마저 그렇다.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가능하다고 간주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 자신이며 어떤 이념을 갖느냐가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한다. 집단도 마찬가지다. 노조를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반체제적이지 않으며 반기업적이지 않을 수 있는 이념을 제시하고 그렇게 이끌 수밖에 없다. 어떤 이념이어야 하는가?

인간은 한계의 존재다. 그래서 이성을 과신한 낙원의 약속은 오히려 참화를 예약한다. 칼 포퍼의 말처럼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개인도 그러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더 그렇다.

그래서 거창한 설계의 구호가 아니라 공존과 공영을 위해 그때그때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 우리 노동운동에 필요한 것은 그런 이념이다.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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