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행위기준의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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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3.04.0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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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의 고전읽기] 키케로 著, <의무론>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키케로는 로마공화정의 최후를 지키려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세네카와 더불어 로마 최고의 철학자였다. 그는 제정을 향해 질주하는 카이사르에 맞선 공화주의의 상징이었다.

그의 저서 <국가론>과 <법률론>이 정치철학을 대변한다면, <최고선악론>과 <의무론>은 그의 실천적 도덕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의무론은 헬레니즘 이후 만개한 스토아 학파의 윤리사상을 전해줘 서양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최고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볼테르는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했고, 프레데릭 대왕은 “지금까지 쓰였거나 쓰일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은 어디에서 발원할까? 키케로는 4가지를 든다.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 신의, 고귀하며 굽히지 않는 정신의 위대함과 강직함, 절도와 인내가 내재한 질서와 온건함이 바로 그것이다.

호의를 베풀고 선행을 행하는 것, 친절을 베푸는 것도 도덕적 선의 영역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가 친절과 호의를 베풀경우에는 그것이 초래할 도덕적 성격이나, 친절이나 호의를 받을 사람의 우리에 대한 마음가짐, 그리고 공동체 및 사회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 등을 숙고해야 한다.

‘선의’와 ‘선행’은 베푸는 사람의 의도만으로 무조건 도덕적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의 태도와 상황, 그가 취하는 공동체에서의 행동에 따라 도덕적 선이 완성되거나, 아니면 양자가 모두 위선에 빠진다. ‘착함’과 ‘도덕적 선’은 명확하게 구별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부합되는 의무로 연결될 수 있어야만 진정한 ‘도덕적 선’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선 ‘착한 투표’, ‘착한 복지’, ‘착한 성장’ 등, 아무 것에나 ‘착함’의 이미지를 갖다 붙인다.

이는 가치중립적인 개념에 ‘착함’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얇팍한 언어 유희에 불과하다. 이런 현상은 ‘착함’이 곧 ‘도덕적 선’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은연중에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도덕적 선’의 윤리관념을 모호하게 하는 해악이 크다.

‘도덕적 선’의 진정한 가치는 도덕적 인식을 사회적 의무로 실행하는 데 있다. 키케로는 ‘도덕적 선’이 개인과 가정생활의 테두리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공동체에 투사되기를 희구한다.

도덕적 선을 행하려 할 때, 서로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키케로는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은 유익의 유무에 관계없이 추구돼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악한 것이 있는 곳에 유익함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무론이 서양의 <논어>라고 일컬어질 만큼 이 책은 인간이 부딪히는 다양한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기준으로 삼아야 할 올바른 도덕적 관념과 실천의 지침을 보여준다. 특히 사회생활에서 부딪히는 선택의 기로에서 취해야 할 도덕적 행위기준을 명쾌하게 제시해 준다.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물리적 지평을 넓혔다면, 키케로는 로마 시민의 도덕철학의 근본을 바로세웠다고 볼 수 있다. 로마시민의 인식과 행위 속에 공공적 덕성과 윤리규범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덕적 선과 실천규범에 대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정립해 준 키케로의 달관과 통찰의 덕분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 속에서 키케로의 큰 그림자가 읽히는 이유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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