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였다
나는 북한 지하교회 성도였다
  • 김주년 기자
  • 승인 2013.03.19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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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세이브엔케이 기도회 탈북민 증언


나는 1960년 4월 20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외삼촌들은 당 중앙에서 일했고, 외할머니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 경력이 있었다.

출신 성분이 좋아 학생 시절엔 사상담당 부위원장과 학술담당 리더 등을 하다가 졸업 후에는 당 기관에서 문서를 담당했다. 이후에도 나는 조선노동당 청년위원장인 남편과 결혼해서 1남 1녀를 두고 풍족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나는 97년부터 신앙을 접했다는 이유로 2000년 1월에 체포됐다. 죄명은 ‘반동사상 유포죄’였고 조선노동당 역사에 없는 특대 간첩죄로 최고형을 받았다.

97년 우연히 성경을 얻었는데 땅속에서 파낸 즉시 가져온 것인데 푹 젖어 있었다. 첫 느낌은 종이질이 대단히 좋아서 놀란 것이었다.

성경책을 처음 보다

중국 모 교회에 있는 A모 집사가 내 사촌올케였는데 그 교회 물품으로 우리를 지원했다. 근데 이 분이 저녁상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봤다. 처음엔 ‘우리 집안에도 이런 반동이 있었는가’라며 놀랐다.

그 올케가 우리 집에 와서는 아픈 내 딸을 안더니 기도를 시작했다. 기도하고 나면 애가 깨어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거기서 복음성가 부르는 걸 따라 부르다 보니까 앓던 아이가 나았다. 97년 가을에 겪은 일이다. 이렇게 우리 형제를 중심으로 지하교회가 조직됐다.

우리 친지들은 국가 주요 명절 때마다 모여 기도를 했다. 땅속에서 나온 성경책을 비밀리에 돌려보면서 어떠냐고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이어 지하교회가 몇 개 더 생겨났다.

그 후로 나는 중국을 두 차례 방문했다. 98년 초에 첫 방문을 해서 ○○○ 집사라는 이름 석자만 가지고 △△교회를 찾아갔다. 주소도 없이 연길시에 갔을 때는 마음이 막막해 기도를 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어느 사람이 북한에서 왔냐고 하면서 길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연길로 갔고 때마침 그날이 연길시 교회에서 기도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그때 △△교회에서 후원금을 받아 북한으로 돌아가서는 성경책과 함께 북한 지하교회들을 지원했다.

이 사실이 북한 보위부에 고발돼 비밀수사가 시작됐다. 결국 나는 2000년 1월에 체포됐는데 6개월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피부의 흔적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너무 끔찍해서 간수들도 치를 떨 정도였다. 그들은 내게 인신매매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는데, 종교간첩으로 몰아세우면 겁을 먹은 지하교회 교인들이 모두 탈북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끝내 인신매매 경위를 불지 않자 우리 남편을 찾아가서는 “너희 아내가 인신매매죄를 인정했으니 재판에 증인으로 나오라”고 협박을 했다. 동시에 내게 와서는 “네 남편도 인신매매죄를 인정했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회유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하지도 않은 인신매매죄를 인정하고 재판정으로 갔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체포 후 6개월만인 2000년 6월이었다.

법정에서 남편을 만나서 따지니까 남편은 “나는 네가 인신매매를 한 내용을 모르는데 보위부에서 인정하라고 협박하고 그러면 보내주겠다고 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고위직이었던 남편과 친지들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상상 못할 끔찍한 고문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판결 이후 검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러면 왜 인신매매를 인정하고 재판까지 왔느냐”며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다”고 호통을 쳤다.

그후 보위사령부가 직접 와서 조사를 시작했다. 1차 재판 끝나고 정식 국가보위부가 실체를 드러내고 ‘사건명령확증서’라는 명령서를 가지고 다시 수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 당한 끔찍한 고문과 정신적 타격으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되고 안면신경마비까지 생겼다. 그런 상태에서 감방에 들어갔다가 이 사실이 외부에 노출될까봐 국가보위부는 수감자들을 단속했다. 나를 독방에 그 상태로 방치한 것이다.

그러면서 보위부는 내게 협상 제안도 했다. 북한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는 우리 집안에 있는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거부하자 더 지독한 고문을 당했고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후 2000년 7월 3일에 안면신경마비로 운신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철저 통제 하에 2차 재판이 진행됐다. 당시 내 체중이 28kg까지 줄고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살이 없어 엉덩이 골격이 확연히 나타나고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는 “가장 악랄하고 잔악한 종교간첩을 말려죽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를 “조선노동당 역사에 없는 특대형 종교간첩”이라고 규정했다. 당시 재판정엔 종교간첩활동의 증거자료로 성경책들이 제공됐다.

가족과 친척들을 살리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왜 반동이며 종교간첩이란 말인가? 북한의 형제국가인 중국조차 허가하는 기독교 교회에 갔는데 종교간첩이라 하면 평양에 대형교회 만들고 관광에 사용하는 북한 당국이야말로 종교간첩단이 아닌가?

2002년 봄에 남편과 어린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병상에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면회를 왔던 것이다. 남편이 결국 집으로 돌아가서 집과 살림살이를 팔아 안전위원들과 간수들에게 뇌물을 줬다. 결국 나는 2년여 만에 병보석으로 나왔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

6개월간 몸을 추스린 후에 결국 두만강을 넘었고, 다시는 아들과 헤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때 아들은 일단 중국 친척집에 맡겼다.

2005년 대한민국에 입국하고 2008년 4월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참여하러 미국 워싱턴DC에 갔다. 당시 수잔 솔티 여사가 마중을 나와 나를 미국 상원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영화 ‘크로싱’의 시사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사연을 들은 미국 정치인들이 나를 붙잡고 우는 바람에 시사회장이 울음바다가 된 일도 있다. 결국 2010년 국정원에서 아들과 7년만에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많은 지하교인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평화통일을 갈망하고 있다. 핵무기보다 더 위력적인 헌신과 봉사의 정신이 남한 국민들에게 있다. 통일은 가까운 시일 내에 생각지 않게 금방 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리 자체가 통일을 위한 염원이라고 생각한다.

증언 / 세이브엔케이 북한구원 기도회 (3/4)
정리 /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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