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
  • 미래한국
  • 승인 2013.02.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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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방송은 ‘기독교 방송’이다. 명칭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 CBS방송이 과연 그런 종교적 명칭에 어울리는지는 그 방송 종사 당사자들도 좀 머쓱할 것이다.

우선 직원들이 굳이 기독교 신자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방송 내용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보도 시사프로그램은 편향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반정부적이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시절에는 ‘친정부’적이었다)

그런데 CBS의 정말 큰 문제점은 이념적 좌편향이다. 지난 1월 8일 김지하 시인을 게스트로 해서 진행된 김현정의 뉴스쇼는 이런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진행자는 시종 좌파적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유도하려 했다.

화가 난 김 시인이 “여기 빨갱이 방송이요?”라고 일갈하자 나중에 진행자는 트위터를 통해 “반론 질문했다가 빨갱이 소리를 들었네요”라는 말을 늘어놓았다. 언론플레이였다.

그나마 종교색채도 민중신학 편향

명색이 기독교를 표방하기는 하는 만큼 종교적 프로그램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비중이 높지도 않은데다 그나마의 내용도 특정한 신학적 경향에 경도돼 있기 일쑤다. 이른바 민중신학이다.

민중신학이 처음으로 고개를 내민 때는 1975년이었다. 3·1절 기념예배에서 안병무가 신학적 해석의 틀로 민중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데 이어, 같은 해 서남동이 <신학사상> 4월호에서 ‘민중의 신학’을 제기했다. 영적 구원보다는 정치적 구원이 신학의 주제가 돼야 하며 민중이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주역이라는 주장이었다.

유신의 한복판인 시점이었다. 反유신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는 측은 민중신학이야말로 기독교적 양심의 진정한 구현으로 간주했다. ‘정통신학’은 시대적 문제에 맞서고 응답하길 포기한 화석화된 죽은 말씀이라고 통박했다. 이러한 경향이 CBS를 지배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 이른바 ‘민주진영’ 사람들이 교회 쪽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 정도는 기독교 신자들이 아니었다. 단순히 민주화에만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미 좌익으로 경도된, 장차 운동권이라 불리게 될 세력의 전신이었다. 이들의 교계 진입은 ‘투쟁’을 위해 종교적 외피를 활용하고자 함이 주목적이었다. 정권의 입장에선 종교계를 탄압하게 되는 모양새는 언제나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약점을 파고든 것이다. 때마침 기독교계에는 민중신학이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마치 레드 카펫처럼 준비돼 있었다. 민중신학은 반체제 투쟁을 목적으로 했던 자들의 입장에선 환영의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러저러한 여러 교회로 침투한 ‘운동세력’들은 이제 자신들이 똬리를 튼 기독교계를 ‘5가’라고 불렀다. 기독교회관이 있던 종로 5가에 빗대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거기에 있던 CBS방송이 이들의 접수대상 목표가 아닐 이유가 없었고 곧 그렇게 됐다.

최초에 민중신학을 제기한 안병무 서남동 등은 어떤 경우였을까? 이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을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게 옳다. 인간의 속내를 누가 알겠냐만 그럼에도 평가의 방법론상으론 민중신학이 순수한 신학적 입장에서 그 나름의 치열한 고뇌를 거친 결과였을 것으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의도의 순수성이 결과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없는 건 이 경우에도 해당된다.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아니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민중신학은 결과적으로는 운동세력 그것도 명백히 반종교적인 유물론자들의 ‘목적’에 활용됐다. 이것은 곧잘 한국 민중신학의 비교 대상이 되는 남미의 해방신학과 마찬가지의 경우였다.

전투적 메시아니즘 운동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사실 해방신학 민중신학과 같은 경우가 반드시 이 시대에만 유별난 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유럽 중세 시기 나타난 ‘전투적 메시아니즘’ 운동이 본질적으로 그와 유사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돌치노’파가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유럽 중세판 민중신학이요 해방신학이었다. 교황청과 기성의 수도회들은 이른바 고통 받는 민중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죽은 말씀의 박제된 집단이었다.

돌치노파는 그들과 달리 평등주의를 주창하고 고급 성직자들을 위시한 부자들로부터 재산을 모두 빼앗아 민중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교리를 내세웠다.

중세 때 유럽 도처에서 일어난 농민반란들의 많은 경우가 그런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는데, 1381년 영국에서 발생한 와트 타일러의 난도 그랬다. 반란의 지도자 와트 타일러는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하던 시절에 영주가 어디에 있었느냐?”고 외치며 농노들의 신분 해방을 주창했다.

중세 시기의 이 같은 전투적 메시아니즘 운동은 나중에 유럽 근대 시기에 등장하게 되는 공산주의적 사조의 일종의 프롤로그 같은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 앞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지만 그 치장을 별도로 한다면 공산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중세의 모든 전투적 메시아니즘 운동은 예외 없이 참혹한 만행으로 이어졌다. 진압군의 잔혹함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반란군이 자행한 짓들도 필설로 형언키 어려울 정도였다.

강간 살인은 너무나 흔해 빠진 일들이었으며 그 이상의 야만적 만행들이 줄을 이었다. 이 같은 만행과 와트 타일러의 짐짓 호소력 있어 보이는 외침은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의 화려한 가치가 결국 갖은 만행으로 이어진 것도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반드시 기독교의 역사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유토피아적 판타지를 내건 운동들은 사실은 유사 이래 동서고금의 역사 모두에서 발견된다. 따지고 보면 “왕후장상에 씨가 어디 있느냐?”고 외쳤던 진나라 말 진승·오광의 난, 태평도라는 유사종교를 앞세운 한나라 말의 황건적의 난도 다 그런 경우 아닌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 유토피아적 환상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해왔다. 그것은 때로는 아름다운 시가처럼 노래 불러졌고, 때로는 격렬한 분노의 고함과 난폭한 행동을 동반했다. 이것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 행위의 불가피한 한계점이다.

오만한 확신이 바로 거짓 예언이다

세계에 대한 메시아적 구원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진리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에 전면적으로 소유할 수 없다. 구원은 있다. 그러나 구원의 궁극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계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전면적 진리와 궁극적 구원을 자임하는 순간 폭주가 시작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 앞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자신의 이론이 절대적 진리임을 자임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의 필연적 도래를 외친 것은 세속에서 감히 메시아적 구원을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 결과가 수용소 군도와 킬링필드의 지옥도이며 최종적으로는 허무한 몰락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민중신학은 다를 것인가? 그런 신학적 해석이 진리라고 감히 누가 확인시켜주었는가?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마태복음 7장 15절이다.

진지한 그러나 오만한 확신이 바로 거짓 예언 그 자체 아닌가? 민중신학 패거리들이 어느덧 바로 거짓 예언자 노릇을 하게 됐다는 걸 부인할 수 있는가?

이강호 편집위원·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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