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일대기로 안정을 꾀하다
공자의 일대기로 안정을 꾀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1.0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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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의 고전읽기: 사마천 著 <공자세가‧중니제자열전>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공자(孔子)가 ‘포의(布衣)의 평범한 신분’에서 유가(儒家)의 성인(聖人)이자 사표(師表)로 숭상 받게 된 데에는 공자 자신의 탁월함과 제자들의 성인화(聖人化) 작업에도 기인하지만, 역시 중국 역사에 뚜렷하게 공자의 행적과 가르침을 드러내고 기려 준, 한나라의 독존유술(獨尊儒術) 정책과 사마천(BC 145?~BC 86?)의 공자전기가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았나싶다.

공자(BC 551~BC 479)는 사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한 것은 공자가 죽은 후 100년 정도 지난 때였다.

누가 편찬을 시작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공자와의 대화가 수집, 기록되기 시작했고, 그 발굴된 어록을 기반으로 2-3백년 뒤에 뛰어난 승계자 맹자(孟子)와 순자(荀子)가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시황(秦始皇)이 460여명의 유자(儒者)를 생매장한 ‘갱유(坑儒)’이후 유가의 씨가 마를 상황에 처했다가, 사회 안정을 위한 통치이념이 필요했던 한나라에 의해 유가가 부활되고, 공자가 존숭된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업고 사마천은 공자의 전기를 써서 공자 성인화의 시발점을 다졌다. <공자세가(孔子世家)>와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은 사마천이 쓴 130권의 ‘사기(史記)’ 중 <세가(世家)>와 <열전(列傳)>에 실린 것이다.

사마천은 어떻게 자신보다 400년 전에 활동한 공자의 전기를 쓸 수 있었을까? 현대처럼 다양한 유형의 기록이 풍부한 시대에도 가까운 선대 인물조차 일대기를 쓰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더구나 난리가 일상처럼 벌어지던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고대 중국 사회의 문헌과 자료의 멸실은 매우 심각했을 것이니 전기 작가로서의 저술환경은 최악이었던 셈이다.

400년이 흘렀으니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는 동시대 생존자의 생생한 구전(口傳)의 채록은 아예 불가능했다. 결국 그는 당시까지 남아 전해 내려온 단편적 문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마천이 지극한 공자 숭배자였던 만큼,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여러 대화의 기록에서 공자의 위신과 명예를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때로 과장하거나, 미화하는 창작적 기술을 한 부분도 적지 않아 조작과 왜곡 논란까지 낳았다.

예를 들면 제나라 재상 안영이 제 경공(景公)이 공자를 기용하지 못하도록 비판한 내용의 진위 여부, 공자가 벼슬을 구하러 간 위나라에서 임금인 영공(靈公)보다 호색녀로 치맛바람의 권세를 부리던 부인 남자(南者)를 먼저 따로 만난 대목을 민망하지 않게 윤색한 내용 등이 대표적이다.

사마천이 공자의 여러 대담과 일화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우호적으로 기술한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당시 치국적 차원에서 유가 부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한나라의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

그나마 이런 사마천의 기록 덕분에 유교 계승자들의 애독은 물론 현세의 우리도 공자의 교훈과 에피소드를 즐거운 고사로 읽을 수 있게 됐다. 물론 원전에 해당하는 <논어(論語)>의 해당 대목의 기술 내용과 뉘앙스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중니제자열전> 역시, <논어(論語)> 등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들과의 문답 사항 중심으로 77제자 중 31명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적을 짧게 기술하고 있다.

말미의 사평(史評)에 의하면, 공자 집안의 벽 속에서 나온 <논어제자적(論語弟子籍)>의 기록에 근거해서 기술했고 누구를 부풀리거나 왜곡하지 않고 제자들의 진면목을 보려고 노력했음을 밝히고 있다. 제자열전 중 공자 사후에 공자 성인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자공(子貢) 단목사(端沐賜)에 대해 일화가 가장 인상적으로 기술돼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와 <중니제자열전>의 말미에 각각 “태사공(太史公)이 말하였다”라며, 부친 사마담(史馬談)이 말한 것을 인용한 듯이 ‘사평(史評)’을 달고 있다.

이렇듯 사마천이 자신의 말이 아닌 돌아가신 부친의 말을 빌려 마무리한 것은 <사기(史記)>의 완성을 유언한 부친의 비원(悲願)을 풀어드리고자 한 또 다른 효심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싶다. (미래한국)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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