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동안 지원한 곳이 꽤 많다. 일일아르바이트, 자원봉사, 학회, 스터디, 공모전 등등. 그중 전화가 걸려온 곳은 딱 두 군데 뿐이다. 남은 것은 서른 통이 넘는 ‘자소서(자기소개서)’다.
컴퓨터에 저장돼 있는 자소서들을 다시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일당 5만 원짜리 맥주 시음행사에 지원하면서 '인생에서 큰 고비를 극복했던 나만의 노하우'가 왜 필요한지, 혹은 '사랑의 도시락 봉사활동' 면접에서는 도시락을 나를 자격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기준을 어떻게 가리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스펙의 부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펙, 즉 Specification. 물건의 사양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건담로봇을 사면 들어 있는 설명서와도 비슷하다.
‘본 제품은 1990년 생으로 3.30의 학점을 구사하며 오랜 공대생 생활로 밤새기 능력이 탁월….’
아쉽게도 마르고 빈약했던 내 설명서로는 30분의 2정도밖에 납득 받지 못했나 보다. 다음 방학을 보람차게 보내기 위해서, 아니 몇 년 후 다가올 취업시장에 발 담그기 위해서는 이 설명서를 채워 나가야 할 텐데 선배들이 열심히 써 놓은 자소서 속의 '글로벌', '지속 가능성', '자기주도형 인재' 등등은 도무지 와 닿지가 않는다.
이놈의 취업시장이라는 곳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갖가지 상품들이 오간다. 선반에 앉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재미 있는 것도 잠시. 옆자리 새로 들어온 녀석이 주인을 만나 완연한 미소를 지으며 시장을 떠날 때, 그리고 그가 다시 날카로운 눈을 가진 소비자가 돼 돌아올 때 우리의 불안감은 서서히 커져만 가고 활기차고 사람 냄새 나던 시장은 갑자기 커다란 감옥이 돼 목을 조여 온다. 그래서 우리는 차가운 유리 벽 너머의 시선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치장을 한껏 한다.
그 치장이라는 것은 가령 이렇다. 토익 학원에서는 KOREAN TIMES를 읽는 것이 얼마나 그래머(문법)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정기구독권 3년 치를 끊으면 파격 할인해 준다던 말에 혹해 신청한 New York Times는 읽지도 못한 채 점점 쌓여가고 있는데 말이다.
부동산투자를 설명하시던 모 교수님은 '국토일보' 정도는 매일 아침마다 꾸준히 정독하는 습관을 들이라 한다. 경제학 수업에서는 매주 경제신문의 한 꼭지를 주제로 삼아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는 쪽글을 쓴다.
각종 자격증 시험 문제집들은 아직 깨끗하고 인·적성 시험을 보기 위한 필독서 목록 중 동그라미 표시가 된 책들은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간간이 봉사활동을 하고 학회나 동아리에 얼굴을 비추고 공모전에 밤을 하얗게 새워 보다가 누가 '그거 하나 못해?'라는 말이라도 던지면 피로감은 더 누적된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훨씬 더 많이 누리고 상상할 수 없는 혜택 속에서 살아가기에 한 가지라도 더 한다기보다는 한 가지라도 ‘덜 하지 않도록’ 발바닥에 땀이 흥건하도록 뛰어 다녀 보지만 자기소개서 1000글자의 '살아온 배경'이나 '목표달성 경험'들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자기소개서는 하나의 질문과도 같다. 앞으로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이야기는 어려워진다. ‘썰’이라도 풀어 놓을라 치면 덧붙여야 할 변명이 너무 많다. 쓸데없이 길어지는 분량 속에 암시된 미래는 왠지 그렇게 뜨거울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청춘'을 쉽게 잃어버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호밀 밭의 파수꾼처럼 '위로'와 '착한 세상'을 약속하는 사람들을 쉽게 믿어버린 채 그들처럼 살기 위한 자소서를 또 한 편 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 착한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보면서. (미래한국)
김여진 (연세대 건축공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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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렇게 나를 위한 삶을 꾸준히 살다보면, 1000글자로 설명되지 않는 나란 사람이 사람들에게 읽혀지지 않을까.. 이런 가치를 발견하고 읽는 분과 일하고 픈.. 청춘 1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