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안전이 국가의 임무
국민의 안전이 국가의 임무
  • 미래한국
  • 승인 2012.09.1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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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편집위원

무상급식, 보편적 복지, 이 소동에 경제민주화까지 더해지니 매우 소란스런 상황이 펼쳐졌다. 온 사방팔방에서 이른바 ‘가진 자’들을 쥐어짜고 털어내고 그도 부족하다 싶으면 ‘해체’해야 한다는 고함소리가 난무했다.

만악(萬惡)의 근원은 오직 돈에 있으니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죄의 무게가 더해진다는 식이었다. 재벌을 때려잡고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더 거둘수록 이 나라의 앞날은 장밋빛이 되는 것이라 했다. 여야 모두가 그러니 누가 정권을 잡든 그런 장밋빛 ‘붉은’ 사회는 반드시 오고야 말 터였다. 상대를 향한 손가락질과 악다구니 가운데서도 여야 사이에 기묘하게도 합의 하나가 이뤄진 셈이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묻지마 칼부림에서 강간까지 흉악범죄가 줄을 잇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아동 성폭행 사건에 만삭 임신부에 대한 성폭행까지 일어났다. 지금 이 나라에선 우리의 여인들이 딸들이 길거리를 맘 놓고 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집에서 잠조차 안심하고 잘 수 없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랍시고 한다는 자들이 모두 무상에 복지에 경제민주화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며 ‘장밋빛 깃발’을 흔들어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런 게 바로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꼴 아닌가?

안이한 방치

한국도 한때는 적어도 치안만큼은 매우 잘돼 있는 나라로 자부했다. 외국인들은 한밤중에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라고 했고 우리도 그렇게 믿었다. 여성들도 별 두려움 없이 밤거리를 활개할 수 있는 지구상의 몇 안 되는 나라라고도 했고 우리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길가는 여성을 납치해 강간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지금 어느 여인이, 딸 가진 부모 누구가, ‘안심하고 나다닐 수 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가?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듯 ‘갑자기’는 결코 아니다. 오래 전부터 서서히 누적돼 온 문제가 드디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범인들은 하나같이 포르노물 중독자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런 포르노물의 범람을 마냥 방치해 왔다.

그러는 사이 아동 포르노물까지 창궐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도 지극히 미약했다. 범인의 나이가 어리다고 풀어주고, 술이 취했다고 하면 또 풀어줬다. 그리고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풀어줬다. 합의? 강간이 법정에서 사후 승인받으면 되는 합법적 매매춘이라는 것인가?

인간이 그렇듯 사회와 국가도 결코 무균체(無菌體)는 아니다. 인간이 때로 뾰루지도 나고 종기도 발생하는 것처럼 사회와 국가도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문제는 발생 자체가 아니라 안이함과 방치다. 세수조차 않으면서 뾰루지 하나도 안생기길 바랄 수는 없다. 최소한의 소독조차 않으면서 종기가 결코 곪지 않길 바랄 수도 없다. 이건 상식이다.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나라는 지금 바로 그 뻔한 상식을 소홀히 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마치 국가는 탁아소요 정부는 그 탁아소의 보모(保姆) 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국가가 그 어떤 결사체와도 다른 점은 물리력을 유지하고 그것을 행사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독점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그럴 수 있는 것은 그 물리력이 구성원의 안전보장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국가는 탁아소나 보모가 아니다

국가의 안전보장 기능은 두 가지 차원에서 수행된다. 안으로는 질서를 지키고 밖으로는 외부의 침탈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다. 내적 안전보장이 바로 치안이며 외적 안전보장이 바로 국방이다. 이 두 가지가 국가 탄생의 근본 목적이며 또 유지의 이유다. 그래서 만약 이 두 임무에 실패하면 국가는 존립의 명분이 부인되게 된다.

한국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선진’ 유럽에서 귀동냥했다. 국가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믿어버렸다. 선진국 이야기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하지만 그 ‘복지 선진국 놀이’는 사실 매우 허망한 것이었다.

복지를 구가하던 유럽의 PIGS 국가들은 지금 헤어날 수 없는 나락에 굴러 떨어져 있다. 과잉복지의 필연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이런 진단은 사태의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과잉복지가 문제라면 적절한 수준의 복지를 하면 된다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들 PIGS들 뿐만 아니라 유럽 어느 국가들도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 즉 자신의 돈만으로는 적절한 복지도 구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들이 자신이 지출한 듯이 간주한 돈은 사실 자신의 돈이 아니었다. 그 돈은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우산 덕분에 줄일 수 있었던 안보비용을 전용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 돈은 미국의 돈과 다름없었다. 안보를 저당 잡혀 그 돈으로 누린 복지란 방자한 나태일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누구보다도 먼저 자랑스럽게 내걸었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그러다가 결국 나라 전체가 거대한 싸구려 탁아소처럼 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그 탁아소의 누더기 요람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것도, 젖을 떼고 밥 먹는 걸 배우는 것도 싫어하고 계속 드러누워 우유만 보채는 식이 되고 말았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 오히려 국민 자체를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다.

범죄를 빈부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이 영국병은 대처 총리가 등장해서야 다소나마 치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찍 혹독한 매를 맞고 정신을 차린 영국과는 달리 PIGS 국가들은 계속 요람을 뒹굴었다. PIGS 국가들은 그렇게 망가졌고 지금은 EU 전체의 화근이 돼 있다.

유럽 최초로 복지제도를 도입한 사람은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그러면서도 “복지는 본질적으로는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하는 뇌물”이라고 했다. 뇌물과 공짜에 길들여지면 개인이든 국민이든 정신이 썩는다. 범죄는 단순한 물질적 부족함에서가 아니라 풍요에도 불구하고 고마움을 모르는 정신적 부패에서 더 많이 비롯된다.

담장 밖에서는 강도가 호시탐탐 노리고 마당에서는 양아치가 날뛰는데 방에서는 밥그릇만 다툰다면 결국에는 밥상마저 엎어지게 된다. 복지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등에만 몰두하는 것은 그런 꼴과 다름없다. 굶지만 않는다면 때로는 국방과 치안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수도 있어야 하는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실제 리얼리티다.

빈부가 어쩌고 양극화가 어쩌니 하지만 지금 이 나라는 적어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나라는 아니다. 하물며 성범죄가 어디 밥을 굶어 생기는 일인가? 범죄를 빈부 탓으로 호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망나니들은 끊임없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논밭의 잡초는 나타날 때마다 계속 솎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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