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질서는 약속에 근거한다
사회 질서는 약속에 근거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8.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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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 著 <사회계약론>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사람이 태어나 자신이 아닌 사람을 최초로 인식하게 되는 대상은 대개 부모와 형제 등 가족이다. 가족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우는 게 된다. 가족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사회이자 유일하게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하지만 눈을 넓혀 보면 어느덧 자신이 더 많은 가족들이 존재하는 사회, 즉 국가 속의 일원임을 알아가게 된다.

가족처럼 혈연에 의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닌 인위적 사회인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형성의 논리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 자신의 관계를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다. 가정을 지배하는 어버이가 있듯, 나라를 지배하는 천자와 왕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므로 천명(天命)에 의해 당연히 지배권을 갖고 백성은 이에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양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오랫동안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지배적 관념이었다. 하지만 16세기부터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사상으로 자연법 사상이 주창됐다. 그로티우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이 중심이 돼 생래적인 인간의 존엄한 권리에 주목했다. 이를 연장해서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전개된다.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 사회계약론(theories of social contract)이다.

복종은 약속이다

사회계약론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지배자에게 당연하게 복종을 강요당하는 상황은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과 배치된다는 믿음이다. 이는 천명과 왕권신수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군주가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 충격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사슬에 매여 있다. 사회 질서는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가 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렇다고 이 권리가 자연히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속에 근거한다”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1762년)의 첫 대목이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사회계약의 양태는 인간이 타고난 권리로서의 신체의 자유와 재산, 가족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결합해 그들의 모든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일반의지(volonte generale)’의 최고 지도 아래 맡기는 형태로 개념화된다.

개인들의 결합에 따라 형성된 공적인 인격체는 양도할 수 없고, 분할할 수 없는 주권을 가지며, 우리는 이를 ‘공화국’ 또는 ‘정치체’, ‘국가’로 부른다. 홉스는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이름 짓기도 했다.

이 암묵적 계약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민(nation)’ 또는 ‘시민(citizen)'으로 불리게 된다. 이는 단순히 천명의 지배권과 복종의 의무를 갖는 군주와 백성(신민)의 관계와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루소는 인간을 억압하는 군주와 그 어떤 절대권력체도 아닌, 사회 공동체의 공동의 의지인 ‘일반의지’에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반의지’는 루소가 최초로 창안한 것은 아니고 그의 철학적 전유물도 아니다.

루소는 디드로(Denis Diderot)가 '자연법 전통에 따른 국제법‘을 의미하는 ‘인류의 일반의지(general will of human species)’라는 표현을 쓴 것을, ‘공동체를 지도하는 최고 원리’라는 혁신적인 의미로 전환해 정치·도덕철학의 중심적인 개념으로 ‘일반의지’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전체의지(la volonte de tous)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때때로 큰 차이가 있다.

일반의지가 공동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인데 반해 전체의지는 개인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개별의지들의 총합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주장처럼 ‘일반의지’가 개인을 초월해 오로지 공동체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숭고한 의지라면 언제나 올바르며 당연히 복종해야 한다.

일반의지에 의한 통치

그런데 루소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계약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단체에 의해 일반의지를 따르도록 강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은 공산 일당 독재자들에게 악용되기도 했고, 정치학자들이 루소를 전체주의와 독재의 옹호자로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루소가 주장하는 ‘일반의지’는 이상적인 만큼 애매한 점도 많다. 당연히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기적 인간이 모든 사안에서 자신이나 자신이 추종하는 파당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추상적인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일반의지’를 모아낼 수 있을까?

법이 ‘일반의지’를 대변할 때에만 주권의 정당성이 확보되는데 무엇이 ‘일반의지’인지 누가 판별할까? 또 모두가 수용하는 보편성을 갖는 ‘일반의지’를 어떻게 도출할 수 있을까?

물론 루소도 이런 의문에 부분적으로 응답하려 애쓰기는 했다. 그도 일반의지는 언제나 올바르지만, 그것을 인도하는 판단은 언제나 현명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인정한다. “일반의지가 충분히 표명되려면 국가 안에 부분적인 사회가 존재하지 않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의견만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종 이해관계로 묶여진 부분적 사회는 개개인의 사적 욕망과 파벌의 이익이 혼합돼 일반의지의 형성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대의정치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루소는 일반의지의 구현인 사회 규칙, 즉 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신들과 같은 지성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일반의지를 반영시켜 줄 이런 숭고하고 명철한 이성을 가진 자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루소의 이상성(理想性)이 두드러진다.

사회계약론과 직접민주주의

그럼에도 루소는 입법권이 인민에 속하며, 주권자인 통치자의 지배적인 의지는 일반의지 또는 법에 근거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통치의 집행자인 행정관이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인민의 일반의지에 따라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인민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 직접민주주의의 구현만이 일반의지의 실현에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인민주권의 각성을 불러와 자유·박애의 가치를 내건 프랑스 혁명(1789년)을 부르는 전주곡이 됐고, 혁명 중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회계약론>은 주권재민(主權在民), 평등 사상, 민주주의를 논한 또 하나의 이상국가론이기도 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덕을 조화시키려 했고, 직접민주주의의 구현을 이상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달성되기 어려운 과제를 제시한 근대민주정치사상의 탁월한 고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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