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의 미완의 꿈
자유주의자의 미완의 꿈
  • 미래한국
  • 승인 2012.07.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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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헤겔은 “모든 철학자는 스피노자주의자이거나, 아예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고, 현대 철학자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의 왕자’라며 주목할 만큼, 스피노자는 독창적 사유와 철학적 업적이 남다른 사람이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17세기 합리주의의 3대 거두로 일컬어지는 그의 철학사상은 ‘이단아’로 낙인찍혔을 만큼 당시 주류사상을 전복시키는 독창성과 난해함으로 인해 일반 독자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철학적 자유의 고행(苦行)

그의 삶은 기구했다.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종교 탄압을 피해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이어서 당시 ‘자유의 공간’이었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온 유대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에게,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과 사유에 대한 갈구는 어쩌면 숙명적인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과 자연, 신을 동일한 반열에 놓고 만물 속에 신성(神性)이 깃들었다고 본 불경한 이단자이자 세속적인 삶을 부정한 신비로운 은둔자였다. 그의 범신론적 사상은 그를 유대교도에서 파문당하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게 했다. 나아가 당시 종교를 넘어 정치사회적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그리스도교 세력으로부터도 철저히 경원시됐다.

이런 환경이 그를 암살의 위협을 피해 철학의 자유를 찾아 여기 저기 떠도는 고된 삶을 살게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낮에는 렌즈 연마로 생계비를 벌면서, 물질적 쾌락을 멀리했고, 밤에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철학을 연마하는 검약하고 경건한 철학자의 표본과 같은 삶을 보여주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정교수로 초빙했을 때, 자신의 철학의 자유가 방해받을 것을 우려해서 거절했던 일화도 그의 철학자로서의 엄정한 자세를 웅변해준다.

그가 철학의 싹을 키우고, 꽃피울 수 있게 한 긍정적 배경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정치경제적 위상과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 뒤이어 경제적 번영의 중심지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고,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의 망명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네덜란드는 통치권이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아들인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에게 양도되면서부터 직접적 지배를 꾀하던 에스파냐와 맞서다 30년 전쟁에서 승리하고, 1648년 베스트 팔렌 조약에 의거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다시 쟁취한다. 그 후 1세기 간 네덜란드는 세계 해상무역의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정치, 군사, 예술, 학문 등의 영역에서 위대한 인물들을 배출하는 등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스피노자의 철학과 정치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을 꼽는다면 데카르트, 마키아벨리, 홉스를 들 수 있다. 특히 그는 마키아벨리와 토마스 홉스의 현실주의적 관점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받지만, 이상적 관념이나 공상론적 접근을 지양하고, ‘좀 더 실천할 수 있는 조화된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권을 갖는다는 관점은 홉스와 동일하지만, 개인과 국가 사이에 자연권의 소재와 권리 관계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다르다. 홉스는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가진 무제한의 자연권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야기한다고 보고,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자신의 권리의 일정부분을 주권자에게 ‘양도’함으로써, 즉 암묵적 사회계약에 의해 국가와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정치론’ 홉스에서 로크로

반면 스피노자는 사회 상태는 자연 상태의 전환이 아닌 자연스런 연장으로 보았다. 두 상태는 연속되는 것이므로 굳이 양도할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관점은 전작인 ‘에티카(Ethica)’에서부터 자세히 드러난다.

단일의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연권을 단념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서로 해주는 개인들의 확대된 집합체로서의 사회 자신이 공통의 생활양식의 규정이나 법률을 제정하는 실권을 갖게 되는데, 법률과 자기 보존의 힘에 의해 확립된 이 사회를 ‘국가’로 보고, 그 권능에 보호받고 있는 사람들을 ‘국민’이라고 규정한다.

결과적으로 리바이어던(국가)에 대해 국민이 복종의 의무를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양태일 수 있으나, 스피노자는 국가 상태 안에서도 개인의 자연권은 없어지지 않으며, 자기 본성의 법규에 따라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참다운 인식과 이성을 갖춘 개인의 경우에 그렇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의 필연성에 대해 보다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677년 사망으로 미완성 상태로 발간된 스피노자의 <정치론>은 20여년 전에 홉스가 ‘리바이어던’(1651년)에서 보여준 절대군주적 관점보다 현대 자유민주주의적 관점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런 사상은 10여년 후 발간된 로크의 ‘통치론(1689년)’에 고스란히 영향을 주었고,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1762년)’에까지 그 정신이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

개인과 사회, 국가에 대한 인식과 통찰의 변화와 진화를 보기 위해서는 홉스, 스피노자,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최소한 이 네 사람의 저작만은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들이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이들이 각자 처했던 정치사회적 환경이 그런 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울러 선행 사상가의 사유의 결과물이 어떻게 비판되거나 차용되는지를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은 난해한 일이지만 매우 흥미롭고 필요한 일이다.

스피노자는 <정치론>에서 자연권에 대한 이런 사상을 정립한 후, 국가의 권리, 최고 권력의 소관사항, 국가의 목적을 논한 후, 현실적 국가체제의 유형을 군주국가, 귀족국가, 민주국가로 나누어 각각의 통치체제를 설계하고 그 운영 원리를 제시했다. 그가 최선의 국가로 본 민주국가의 설계가 미완으로 끝나 아쉽다.

마키아벨리가 16세기의 분열된 도시국가들의 쟁투를 넘어 이탈리아의 통일과 부국강병을 염원하면서 강력한 군주를 바탕으로 한 절대군주 국가를 꿈꿨듯이, 스피노자 역시, 당시 강력한 국정운영 주체가 없이 느슨한 형태로 운영되던 불안정한 자유공화국의 의회파와,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고 군국주의적이던 오라니에파 사이에 벌어지던 끊임없는 정쟁과 대립, 반동적 정부 전복 과정을 보면서 약소국가였던 네덜란드를 영속적인 강소국으로 만들기 위한 열망과 대안을 <정치론>에 담으려 한 것 같다.

그의 <정치론>이 미완으로 끝났고, 사후에도 곧바로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과 국가운영 철학만큼은 현재까지 계승된 네덜란드의 통치체제인 입헌군주제의 형성과 유지에도 일정 부분 녹아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스피노자 著 <정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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