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됐다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최근 1년 새 11만 명이 자살을 시도했고 지금도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하고 있다면 믿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두 시간에 한 명꼴로 누군가 목숨을 버리고 있는 나라라는 의미다. 인구 10만 명당 31.2명이 자살하고 있는 한국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자살 대국’이라는 닉네임은 더 이상 ‘오명’이 아니다.
최근 발생한 대구 왕따 중학생 자살사건 때문에 학교폭력이 문제시되고 일부 언론의 깊이 없는 문제의식 때문에 엉뚱하게 게임업계가 비난을 받았지만 자살은 노년층에서도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됐다. 80대 이상 자살률은 20대 자살률보다 5배 높다. 이 팩트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자살이 결코 미숙한 자아의 순간적 충동 때문에 감행되는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너무나도 단선적이다. 특히 여야 할 것 없이 복지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요즘의 정치권에서는 이 문제를 종종 사회복지정책과 연결시킨다. 자살, 그리고 그 근간에 있는 우울증은 경쟁 위주의 한국사회가 출현시킨 병폐이므로 정책적인 수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루 43명이 자살 …유레카의 통찰력
한국사회에서 경쟁이 치열했던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치열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부에 의해 경제가 집중적으로 개발되던 60~70년대가 더 심하지 않았겠는가? 올해 서른인 내가 학창 시절에 주로 목도한 것은 어떻게든 경쟁의 강도를 낮춰 편하게 살아보자는 발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교과과정 난이도가 낮아지고 체벌이 사라지고 학교들이 평준화돼도 우리는 행복해지지 않았고, 자살률의 상승세는 보시다시피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다.
이것은 자살 문제 안에 경쟁의 병폐 이상의 뭔가가 숨어 있다는 의미다.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되는 책을 한 권 소개하고 싶다. 사회생물학자 레베카 코스타(Rebecca Costa)의 <지금, 경계선에서>다. 그녀는 이 책에서 지식이 폭발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템포를 우리 인간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우울증과 자살은 너무도 복잡해져 버린 세계를 이해하려 시도하다 지친 나머지 두뇌가 들어버린 ‘백기’라는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 즉 논리와 계산으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으며 다만 유레카의 통찰력(insight)만이 새로운 길을 찾아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작정의 복지정책이 아니라 두뇌의 복합적 활동을 자극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더 값진 의미를 가질 것이다.복지정책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인간 심리를 과소평가하고 있는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가치 있는 일이겠으나 그것이 정책화돼 강제성을 띠게 될 때의 결과는 최초의 의도와 매우 큰 괴리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은 돈이나 정책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레베카의 말대로 통찰력, 그리고 더 나아가 자발적인 삶의 의지가 갖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되살리는 일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자살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다소나마 미화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을 뿐더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얘기해 주는 걸 마치 망자에 대한 예의인 것처럼 착각하는 유감스러운 발상이 잔존해 있다.
죽은 자에 대한 이상한 예의…자살은 ‘자기 힘으로 살기’ 줄임말
한 술을 더 떠 정치권에서는 전임 대통령의 자살이 갖는 의미를 각자의 이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마음껏 왜곡시키는 안하무인의 행태도 서슴지 않고 있다. 떠난 사람에 대한 감수성이 고작 이 정도니까 삶 속에서의 통찰력도 자극될 턱이 없는 것이다. 일련의 흐름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힘을 내서 살아보려고 열심히 노력 중인 ‘이름 없는 전사들’의 의지를 배반하는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번도 넘어지지 않는 인생이 아니라 넘어져도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일어나는 인생일 것이다. 경쟁에서 진다 해도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다. 왕따를 당한다 해도 어차피 혼자인 게 우리 삶인데 그게 죽을 일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살아라. 지금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어른은 몇이나 남아 있는가?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무작정 살라 한들 덧없을 따름이다. 애초부터 자살이라는 단어 안에 좀 더 깊은 의미를 넣어 두면 어떨까.
이제부터 자살을 ‘자기 힘으로 살기’의 줄임말로 부르기로 하자. 주변 정황의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 노력하며, 커다란 꿈을 품되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것. 서른 살의 자유주의자인 나 역시 자살의 의미가 바뀌는 그날까지, 이곳 <미래한국>에서 내 나름의 모든 통찰력을 동원한 사고의 산물들을 칼럼으로 펼쳐낼 것을 약속 드린다. (미래한국)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