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의 진실과 신념 사이
네티즌들의 진실과 신념 사이
  • 미래한국
  • 승인 2011.08.13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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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의 문화공감

 
타블로와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간의 4차 공판이 6개월 미뤄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법정 공방을 할 정도면 대단히 치밀한 집단이라고 해야 할까?

 지리한 진실게임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3인조 힙합그룹 에픽하이의 리더 타블로가 3년 반 만에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하자, 네티즌들이 의혹을 제기하며 타진요라는 카페를 개설했다.

이후 갖가지 의문이 중첩되면서 타블로와 그 가족들에 대한 ‘신상털기’가 이어졌다. 도를 넘은 사생활 침해로 활동을 접은 것은 물론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는 타블로가 타진요 일부 회원을 고소했고 현재 법정 공방 중이다.
워낙 시끄러운 사안이어서 언론에 수차례 검증기사가 나왔고, MBC TV에서도 2회에 걸쳐 학력 논란을 하나하나 짚었다. MBC 제작진은 미국 스탠포드대학을 찾아 관련 인사를 다 만났고, 타블로가 재학 중일 때 찍은 동영상까지 공개했다.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도 학교 담당자들이 정확하게 증언해주었다. 방송이 끝난 후 타블로 학력에 대한 논란이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방송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진요는 의혹 제기를 계속했다.

타블로와 타진요 논란이 시사하는 것

이제 대한민국에서 ‘사실’을 못 믿겠다며 ‘진실’을 요구하는 일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현상이 됐다. 천안함이 서해에서 졸지에 두 동강이 나서 46명의 해군 병사가 순직한 일을 생각해보라. 국가에서 각종 정황을 들어 북한의 소행이라고 밝혔지만, 한쪽에서 믿을 수 없다며 의혹을 줄줄이 제기했다. 연평도에 폭탄이 투하된 이후 천안함 의혹의 대부분이 유명무실해졌지만 여전히 국회의원의 입에서 “천안함 폭침이 북한에 의해 일어났다는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발언이 나오는 실정이다.

타블로는 확실한 증거를 대도 자꾸만 의혹이 불어나는 것에 대해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거예요”라며 낙담했다. 믿고 싶지 않은 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사실은 바뀌지 않건만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건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자세이다. 하지만 노력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대신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딴지 거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실을 부정하고, 의혹을 생성해, 진실을 요구하는 수순이 마치 매뉴얼처럼 정착되고 있다.

어떤 일이 생기면 재빨리 후속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분명한 사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세월 보내는 일은 지극히 비실용적이다. 그러다보면 자칫 결과가 비윤리적 것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면 결국 거짓과 음모가 판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엄연한 사실을 ‘못 믿겠다’며 의혹을 제기하는 건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남자들이 사석에서 군대 얘기를 자주한다면 여자들은 각종 문화 충격으로 휘청했던 대학 시절 얘기를 곧잘 하는 편이다. 필자가 대학에 다녔던 1980년대 후반에는 ‘못 믿을 정권’에 ‘못 믿을 뉴스’뿐이었다. 당시 대학가에서 결코 못 믿을 뉴스는 ‘KAL기를 북한이 폭파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내가 들은 건 이런 얘기였다.

“노동자와 농민을 사랑하시는 수령님께서 중동 노동자들이 가득 타고 있는 비행기를 폭파시키셨을 리 없어.”
그보다 더 못 믿을 얘기는 우리 정부의 조작설이건만, 오늘날까지도 KAL기 폭파 의혹이 망령처럼 떠다니고 있다.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은 인정해야 할 사안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과 대치시킬 수 없는 것이다.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고, 신념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굳게 믿는 마음이다.
신념은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사실은 천지가 변한다 해도 바뀔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을 거짓으로 둔갑시켜, 그 거짓을 강력히 밀고 나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면 그게 가짜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 신인류의 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유명 포털사이트에는 네티즌이 질문을 하고 네티즌이 답을 하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에도 사실을 믿지 않는 현상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질문에는 각자가 믿고 싶은 대로 답변을 달아놓았다. 정부의 조작이라는 의견부터 북한의 소행이라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과거 야당 지도자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했나?’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럴 리가 없다’와 ‘야당이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공장 건설도 반대했다’로 완전 상반된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이 아닌 역사적 사실조차 각자 믿고 싶은 대로 규정짓는 일, 과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사실을 믿지 않는 것까지 선택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진실을 외면하면 그 어떤 일도 진전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사회의 오래된 이념 대결에서 기인한다. 얄팍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더 나아가 교사들 가운데 일부가 역사적 사실을 학생들 앞에서 함부로 왜곡하는 상황이니, 걱정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인정한 다음 의견을 주고받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레이스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사회를 기대한다. 

본지 편집위원·소설가 www.rootl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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