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꽃, 사유재산
자유민주주의 꽃, 사유재산
  • 미래한국
  • 승인 2011.06.12 2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래교수의 세설직론

 

김정래 편집위원·부산교대 교수

지난 4·27 재보선 패배로 한나라당 지도부가 전면 사퇴하고 새로 선출된 원내대표를 탄생시킨 소장파 의원들이 현 정부의 감세정책과 초과이익공유제 철회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는 현 정권과 차별화를 꾀한 나름대로의 정치적 포석이지만 누가 보아도 수긍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감세정책 철회는 작은 정부와 시장의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지만 초과이익공유제 철회는 이와는 다시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 정부와 차별화를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일관성 없는 노선으로 민심을 수습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합니다. 한편 이번 재보선에서 승리를 거둔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듯 당초의 당론을 뒤집고 아예 한-EU FTA 비준 동의안 처리에 불참했습니다. 나아가 ‘민생’을 핑계로 다가올 한-미 FTA 비준 동의안 처리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는 자신의 경기도지사 시절의 정책과 정반대로 나가는 것이어서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엇박자, 모순의 연출입니다.

정책노선이 없는 대한민국 정당

정치세태를 다소 장황하게 거론하는 것은 여야 양대 정당의 정책노선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하는 의혹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책노선의 혼미는 작금의 일이 아닙니다. 현 정부의 중도실용 노선도 정체성을 찾기 매우 어려운 경우입니다. 무엇보다도, 양당의 노선이 과연 자유민주주의체제 아래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지 우려됩니다.

한나라당은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선동적인 인민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것은 아닌지, 과반수 의석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를 의식한 포퓰리즘의 행태에서 정체성 없이 소수당에 끌려가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보다는 민중민주주의에 스스로를 예속시킨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민주당도 자신의 노선이 스스로 내세우는 ‘중도’인지 아니면 좌파-친북노선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1야당이 군소정당인 민주노동당에 끌려다닌 결과 북한인권법은 국회 안에서 여전히 잠자고 있으며, ‘친서민정책’을 명분으로 주요국가와 체결해야 할 FTA 비준 동의안은 저지되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혼미한 정책 노선에 별다른 이상 징후를 뚜렷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대다수 우리 자신입니다. 주요 정당들의 모순된 정책과 당리당략에 얽매인 이전투구 정쟁 행태의 심인(沈因)이 무엇이며, 우리는 왜 혼미한 노선에 둔감한가를  반드시 짚어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러한 이상한 징후는 사유재산(private property)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철저한 믿음의 결여로 인한 것입니다. ‘사유재산’의 중요성에 앞서 우리 자신의 일그러진 자화상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말로는 안 그런 척 해도, 하는 행동을 보면 서로 부자가 되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합니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부자들을 욕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저주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성취하려면 이에 소요되는 재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이기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 남이 부자인 것은 타락한 인간의 징표로 보고 비난을 일삼는 이중 잣대입니다. 심리분석에 의하면 이러한 이중인격 형성은 시기심(envy)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시기심으로 치부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고 싶으면서 반(反)부자 정서를 갖는 이중인격은 정치적으로 반(反)사유재산 정책을 불러오고 이를 합리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재산은 도덕적으로 온당한 이기심으로 합리화하고 남의 재산은 탐욕의 화신으로 둔갑시키는 이중인격은 자유민주주의의 꽃인 사유재산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프랑스 혁명 테니스코트 선언

나는 부자되고 싶고, 네가 되는 건 싫고…

사유재산이 왜 자유민주주의의 꽃인지, 즉 ‘사유재산’의 개념 없이 자유민주주의가 왜 성립할 수 없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 개인이 어떤 한 형태의 노역(勞役)을 통해 재화를 생산한다고 합시다. 그 개인은 다른 형태의 노역을 포기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부(富)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기회비용을 치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개인은 그 시간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어진 삶의 한 부분을 희생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명의 일부를 희생한 대가로 부를 창출한 것입니다. 한 가지 형태의 노역을 택한 것은 그 개인의 ‘자유’의 문제이며, 자신의 생의 일부를 할애한 것은 ‘생명’의 문제이며, 그로 인해 얻어낸 결과가 ‘사유재산’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노직(R. Nozick) 교수의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에 나오는 논의처럼 보입니다만, 그렇게 보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논점은 사유재산은 자유의사에 따라 자신의 생명에 대한 대가로 얻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사유재산을 정당한 근거 없이 침해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살인행위가 생명 전부를 즉각적으로 앗아가는 범죄인 반면, 사유재산 침해는 생명의 일부를 점차적으로 앗아가는 범죄라는 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유재산권은 ‘불가침적(inviolable)’이고 ‘천부적(sacred)’인 ‘자연권(natural rights)’이라고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음을 설명하겠습니다. 사유재산권이 천부적 권리임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는 1776년 7월 4일 ‘미국독립선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 기초 작성 회의
미국 독립선언의 기본이념, 생명·자유·사유재산

미국 독립선언의 기본 이념은 ‘생명’, ‘자유’, ‘사유재산’입니다. 여기서 ‘행복’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이유는 이어지는 선언문의 대부분이 당시 영국 국왕이 미국식민지 주민들로부터 사유재산을 마구잡이로 거두어들인 예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사유재산을 빼앗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제퍼슨(T. Jefferson)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선언은 사유재산의 가치가 생명의 가치와 동일함을 대변합니다. 따라서 생존의 가치는 생명의 보존은 물론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생활과 함께 사유재산이 보장되고 보호돼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재산의 가치가 벌레가 과일을 파먹어 가듯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폄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로 알려진 프랑스혁명의 기본 이념은 제1조에 명시돼 있습니다.

제1조 :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

물론 프랑스 인권선언 제2조에 사유재산에 대한 불가침적 권리를 명기하고 있지만, 이에 앞서 ‘자유’와 더불어 ‘평등’, ‘박애’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박애(fraternity)’는 위 인용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동이익’, ‘전체이익’을 대변하는 이념입니다. 게다가 ‘박애’는 사유재산에 앞서 공공 이익을 우선케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개인의 사유재산이 공공이익, 공동이익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17조는 이를 아예 명문화했습니다.

제17조 : 하나의 불가침적이고 신성한 권리인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 필요성이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하고, 사전의 보상의 조건 하에서가 아니면 침탈될 수 없다.
 
오늘날 여러 국가의 헌법에서 이런 조항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인권선언의 수준에서 공공이익에 따라 사유재산을 제한할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은 실정법 차원에서 소유권 제한 규정을 둔 것과 같은 법리적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조항이 ‘역사적으로’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 점입니다. 사유재산 침해를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입법이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프랑스혁명과 프랑스 인권선언의 가치를 비하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유재산 침해 논거가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사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사회민주주의가 왜 나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사회’를 앞세우면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개인의 자유와 선택, 그리고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는 점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경계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이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첫째, 사유재산권, 달리 말하자면 소유권은 사회질서의 근간입니다. 소유권이 없으면 사회질서가 붕괴됩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체주의와 독재정권의 압제에 의한 강권질서를 ‘질서’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 속의 질서는 개인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을 보호하는 질서가 아니라 이 가치들을 원천적으로 말살하는 ‘형극(荊棘)’입니다. 소유권이 없는 또 다른 형태는 원시공산사회입니다. 몇몇 좌파 낭만주의자가 주장하는 것과는 반대로 원시공산사회는 문명 이전의 미개사회에 불과합니다.

둘째, 소유권을 존중하는 사회는 개인이 각각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회입니다. 소유권이 없으면, 개개인이 자신의 의무 이행을 게을리 하고, 모든 과실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무를 국가적 책무로 돌리는 사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지난번에 지적한 바 있는 사회적 운명론과 심리적 운명론을 제공한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과오가 이에 해당합니다. 소유권 부재 문제를 확대해서 보면 공기업의 실패, 공유지의 비극이 사유재산의 의의와 소중함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에 모순된 노선과 혼미한 정책이 간단없이 창궐하는 기이한 현상은 사유재산의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공공이익’, ‘박애’, ‘공동체 가치’를 명분으로 한 좌파 선동이 우리를 더욱 혼란에 빠뜨립니다. 이런 와중에 작년 발생한 북한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은 국민의 생존권 위협이고, 금년 농협 사이버 테러는 명백하게 국민의 사유재산권 침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부당국의 대응이 확고했고 적절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유권 없으면 사회 질서 붕괴

자유민주주의 가치, 즉 자유, 생명, 재산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실천 강령이 ‘주인의식’입니다. 나의 자유, 생명, 재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주인의식이 있어야 내 이웃의 자유, 생명, 재산을 존중하게 되고, 그 바탕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지와 국가관이 굳건해집니다. 지금처럼 여야 할 것 없이 혼미한 정국을 만들어낸 ‘노선 없고, 머리 없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계산에만 함몰하여 소아집적(小我執的)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주인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무장해야 합니다. 주인의식이 없으면 사유재산은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도 실종되고, 결과적으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도 위태로워집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