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이승만의 정읍선언, 자유통일의 논리였다
[심층분석] 이승만의 정읍선언, 자유통일의 논리였다
  •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 승인 2023.06.23 0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날 이승만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이승만이 한반도 분단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은 해방 후 미군정과 함께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다고 주장하며, 이것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승만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리고 정읍발언의 진의가 과연 한반도의 분단을 가속화하려는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승만이 한반도 분단의 주역이 아니라 오히려 소련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분단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런 주장의 핵심에는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이미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라는 지령을 내렸고, 이런 지령에 따라 북한 당국은 이미 1946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이 인민위원회는 사실상의 정부로서 1946년 3월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의 출발은 1946년 6월 이승만의 단독정부 주장이 아니며,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이미 만들어진 북한의 공산정권으로부터 남한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어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에 덧붙여 필자는 미국은 해방 직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만들어진 38선이 국경선으로 고착화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련 측에 민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북을 포함하는 중앙집권적 행정부를 만들 것을 제안했으나 소련 측의 거부로 실패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소련 측은 이 문제를 중심이슈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가 있다.

아울러 필자는 해방 직후 미군정과 함께 남한의 민족주의자들, 특히 안재홍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특정이념에 근거한 정부수립보다 한반도는 원래부터 하나의 공동체였음으로 38선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반대하고, 38선이 “진정한 민주주의”, 즉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6·3정읍선언 77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가 5월 23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됐다.
6·3정읍선언 77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가 5월 23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됐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그 의미

이승만의 정읍발언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남방에서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는 1946년 4월의 단독정부 논쟁에서 나온 용어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드월문서는 38선 이남에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서이다. 또한 위원회는 1945년 11월 랭던의 정무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새로운 정부를 남방으로 제한한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은 수없이 정부 수립을 이야기했다. 1945년 11월 그는 남북을 포함한 중앙정부 수립을 말했고, 1946년 2월 민주의원을 언급할 때도 자신이 직접 북한의 조만식과 협의하여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하여 민주의원이 남방에만 국한된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946년 4월 단독정부 수립이 논란이 될 때도 그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38선 철폐를 통한 정부 수립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같은 해 5월에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이런 점에서 6월 정읍발언의 ‘남방’ 정부 수립은 이승만으로서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중요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이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혹은 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이 이 정읍발언에서 ‘임시정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매우 중요하다. 원래 이승만은 임시정부라는 말보다 과도정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원래 한국인들에게 임시정부는 상해, 혹은 중경의 정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평생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하지만 미군정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미소가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 요소는 바로 미소의 합의에 의한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런 미소의 합의를 거부하고, 미군정과 함께 임시정부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이승만의 일관된 생각이다. 이승만은 소련은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고, 한국인이 원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부를 강요하기 때문에 소련을 독립국가 수립의 주역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미소공위체제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드월은 미군정과 마찰을 빚은 다음에 7월에 사임을 하고 귀국했다. 우드월은 신한공사의 창립에 있어 일본인의 재산이 조선인이 아니라 미국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조선인의 반발을 초래했는데, 이것을 이유로 우드월을 강등시키자 그는 스스로 전역했다.

1946년 5월 말을 기해서 보수주의자 굳펠로와 우드월과 같은 인물들이 떠나고, 버치 중위와 같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국무성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주한미군정의 방향도 단독정부 수립보다는 좌우 합작의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후 우드월은 이승만이 1946년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과 같은 팀이 되어 이승만의 대미로비 활동을 벌였다. 이 당시 이승만이 미국 정부에 대해 주장한 단독정부 주장 내용은 상당 부분 우드월의 것과 비슷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관할권을 하지에게서 빼앗아 맥아더에 넘길 것과 단독정부를 승인하고, 유엔 회원국으로 인정하여 스스로 소련을 축출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장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

소련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승만

이승만이 1946년 6월 정읍선언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언급했을 때 그가 어떤 정부를 구상했는지에 대해서 얼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1946년 4월 우드월과 미군정에 의해서 작성된 임시정부 수립계획이 이승만이 당시 계획한 임시정부 구상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우드월은 그 이후에도 이승만과 밀접한 관계 아래 활동했다. 

이런 배경에서 정읍발언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첫째, 이승만은 해방 직후 각국 정상에게 보낸 전보에서 하나의 통일민주독립국가 건설을 피력하였고, 공산화와 분단을 막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한 미. 영. 중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소련에는 한반도가 동북아에서 평화의 안전판이 될 것을 약속했다.

둘째, 이승만은 귀국하여 38선 철폐운동을 벌이는 한편, 이승만, 김구, 조만식, 김일성을 중심으로 남북지도자 모임을 개최하여 12월 초까지 중앙정부를 만들 계획을 했다. 이것은 랭던의 정무위원회 계획과도 비슷하다.

셋째, 이승만은 모스크바 결정 이후 남한에 북한의 인사가 참여하는 민주의원을 만들고, 이것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아 미소공위 및 신탁통치를 무효화하고 소련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민주의원의 역할은 나중에 미소공위에서 남쪽 대표의 역할로 축소되었다.

넷째, 미소공위가 시작되자 미군 당국은 국무성의 압력으로 이승만과 김구를 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김규식을 내세웠으나 소련은 민주위원이 우익인사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이유로 협상 대표 자격을 거부했다.

다섯째,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미군은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세웠고, 이것은 먼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미국이 이것을 인정해서 소련을 압박하여 통일정부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런 계획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 대한 논평을 삼갔다.

여섯째, 이런 상황에서 미소는 5호 성명에 합의하여 모스크바 결정에 동의하면 협상 대표에 참여시킨다는 새로운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이 결정을 받아들였고, 인원수에 비례한 임시정부 협의 대표 구성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일곱째, 하지만 5월 초 미소공위는 결렬되었고, 여기에 분노한 이승만의 독촉국민회의는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자율정부 수립과 38선 철폐를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김규식은 남한에 중앙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미군의 일부 세력도 당시 남한에 모종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정읍발언의 과정과 내용에 대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미소공위가 실패했다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이승만은 원래부터 미소공위를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통한 38선 철폐 및 통일정부 수립도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소련은 친소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려고 하고, 미국은 이것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

셋째, 당시 상황을 보던 국민들은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먼저 남한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것을 통해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고 소련을 압박하여 통일정부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단독정부 수립이 목표가 아니고,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임시정부 수립을 한반도 분열의 출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이승만의 임시정부 수립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는 1946년 4월 우드월에 의해서 수립된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안이 이승만의 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본다.

우드월은 나중에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이 안은 이승만의 정치고문 올리버의 수정을 거쳤다. 이 안에 의하면 남한을 맥아더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며, 먼저 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의해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미국이 이 정부를 인정하며, 미군은 이 정부를 지켜주고, 이것을 근거로 남북통일정부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946년 6월을 기해서 미 국무부는 새로운 대한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이 새로운 정책에 의하면 미국은 소련과의 대화를 위하여 김규식과 여운형을 내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하게 되고, 이것을 근거로 입법의원을 세워 다시금 미소공위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이승만의 정읍발언과는 정반대의 방향 전환이다. 이승만의 친구 굳펠로는 귀국하였고, 하지의 새로운 정치고문 버치 중위는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