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6~17일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정상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채택하는 외교문제에 대한 사법자제(judicial self-restraint)의 원리에서 벗어난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한일관계는 불필요한 갈등관계를 수년 간 지속해왔다. 대한민국 국경을 벗어나면 통하지 않을 판결임을 이 판결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국제사업재판소와 같은 국제분쟁 해결의 장으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노무현 정부도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강제징용 피해보상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2007년 특별법을 제정하여 국가가 약 6500억 원의 보상금을 징용피해자들에게 이미 지급한 바 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아는 일본이 배상판결에 순순히 응할 리가 만무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동맹이 강화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이 상황을 방치할 수가 없었던 윤석열 대통령은 ‘제3자 변제’ 방식이라는 고육지책을 들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한일 양국 간 협력은 단순한 경제·문화 교류의 차원이 아니다. 세계 정세는 중국·러시아의 전체주의 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 간 대결구도로 명확해졌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에 더하여 북한이라는 공동의 적대적 국가들을 바로 머리 위에 두고 있다. 이 와중에 양국이 갈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새로운 적을 추가한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경제와 외교·안보가 분리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외교적으로 갈등이 있는 상황에서 경제협력이 원활히 되지 않은 시대인 것이다. 왜 그동안 미국이 한일관계 개선을 그토록 바랬을까. 한일 간 갈등 상황 속에서는 한미일 경제 및 안보협력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으로 존재하는 한 일본과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압도적인 일본의 부품산업 경쟁력
세계시장에서 일본의 소재·부품산업 경쟁력은 우리나라를 압도한다. 2018년 기준으로 소재·부품 관련 상품群에서 일본과 한국의 수출금액을 몇 가지 비교해 보면 반도체부품 관련 수출규모는 일본이 한국의 약 2.9배, 기계부품은 3.5배, 전자공업용 화학물질은 3배, 정밀공작기계는 7.7배나 더 크다. 이 같은 차이는 단순히 정부의 정책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일본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즐비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 일본 장수기업의 평균 존속기간은 197.8년이라고 한다. 일본의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자만 해도 20여 명을 훌쩍 넘는다.
우리나라의 최고령 기업의 존속연수는 120여 년이고 과학기술 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아직 없다. 이 차이가 지금의 한일 간의 격차를 만든 것이다. 단기간의 정책드라이브로 해소될 수 있는 격차가 아닌 것이다.
잠시 시계를 돌려 2013년 11월 어느 신문의 기사를 보자. “소재·부품산업, 일본 제치고 2020년 세계4강 목표”라는 제목 아래 “정부가 2020년까지 소재부품 분야에서 ‘타도 일본’을 선언했다. 소재산업이 튼튼해야…” 라는 내용으로 기사는 채워져 있다.
이렇게 이런 저런 노력을 하였지만 2020년이 바로 코앞인 상황에서 기사가 전하는 정부의 다짐과는 달리 우리는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라는 충격 앞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재·부품산업의 대일 의존성 해소는 장기적 목표가 될 수밖에 없고 현재의 일본과의 갈등은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다.
소재·부품산업의 경쟁력은 결국 중소기업의 경쟁력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중소기업 경쟁력 제고를 외쳤지만 크게 가시적인 성과를 못 낸 것과 소재·부품산업의 취약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소재·부품산업에서의 과도한 일본 의존에서 탈피하려면 지금까지의 중소기업 정책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쏟아내는 각종 정부정책은 대증요법으로 점철되다가 위기요인이 사라지면 다시 흐지부지되고는 했던 과거의 실패 사례를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까. 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는 ‘중소기업 보호’이다. 이 ‘보호’라는 단어가 강조되는 순간 중소기업 정책은 ‘기업복지’ 정책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며 ‘정책자금 나눠먹기’가 빈번해진다. 경쟁력은 ‘보호’ 보다는 ‘경쟁’이 강조될 때 생기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중소기업 정책은 과연 ‘보호’와 ‘경쟁’ 중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져 왔을까. 작금의 상황을 보면 최소한 ‘경쟁’ 중심의 중소기업 정책을 펴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필자가 참고한 몇몇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R&D 지원사업의 개발성공률은 95%인데 비해 사업화율은 20~40% 중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중소기업의 R&D 성공이 사업화와 연결되지 못하는 프로젝트에 많은 중소기업 R&D 지원금이 낭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소기업에 대한 R&D 지원과정이 보다 ‘경쟁적’이어서 실제 사업화의 성과를 내는 기업에 지원이 집중되는 과정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더라면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과거의 패러다임을 유지한 채로 소재·부품산업 육성에 자금을 쏟아 붓는다 한들 수년 뒤 기대한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랜 기간 누적된 기술격차를 따라 잡으려면 단순히 투자확대로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며 투자의 효율성을 높이는 패러다임 전환이 있어야 그나마 그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전환 없이 소재·부품산업의 취약성을 대기업의 책임으로만 돌리려고 한다면 소재·부품의 높은 대일 의존도는 한국경제의 상수 (常數)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한일 상호 윈-윈 해법 찾아야
과거처럼 산업 전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에 뒤처진 시대가 이제 아니므로 상호협력의 필요성은 더 크다. 특히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상품은 한국이 주요 제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필수적 요소이다. 소부장 부문의 일본 의존도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고정밀 핵심 부품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막대하다는 것이 산업현장의 평가이다.
특히 핵심 전략상품인 반도체산업에서 한일 간 보완관계는 더 뚜렷하다.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일본의 소재 부문 시장점유율은 24%로 세계 1위(2021년 기준)이다. 한국은 이 시장에서 7%에 불과하니 일본과의 분업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 외 다른 산업에서도 양국 간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이다.
또한 한일 양국 모두 저출산·고령화라는 사회경제적 난제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 징용배상 문제로 한일 관계가 어려워지기 전 2017년 양국은 인구문제에 대한 협력을 위해 인구관계장관회의도 가진 적도 있다. 한일이 이 같은 회의를 앞으로 정례화하고 양국의 경험과 정책아이디어를 공유하는 협력체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는 한일 모두 인구감소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향후 한일협력을 고도화시켜 인접한 양국 소비시장을 통합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축소되는 국내 소비시장을 확대하는 효과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자유무역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전 세계가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거래와 활발한 인적교류를 하는 시대가 그렇지 못한 시대보다 분명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결과를 보장한다. 하지만 세계의 패권경쟁은 순위경쟁이므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1위를 차지하기 위한 패권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가 보여준 현실이다.
세계가 진영화된 현 시점에서 경제적으로 최선의 선택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므로 결국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 선택은 같은 진영 내에서 최대한의 협력과 공생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 3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일본과의 협력을 배제한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포기한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한국 정부의 한일 협력을 위한 과감한 결단은 결국 미래세대를 위한 중요한 주춧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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