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국제유가와 국제정세 패러독스
[심층분석] 국제유가와 국제정세 패러독스
  • 고성혁 미래한국 군사전문기자
  • 승인 2022.03.14 1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70년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시대였다. 전 세계가 OPEC의 입만 바라봤다. 사우디아라비아 ‘야마니’ 석유 장관의 파워는 미국 대통령만큼이나 셌다. 그의 말 한마디에 세계 경제는 출렁였다. 4차례의 중동전을 치르면서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화했다.

특히 4차 중동전( 1973.10.6. ~25.)으로 인한 전 세계 경제적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그것이 바로 1차 오일쇼크다. 배럴당 2달러 내외이던 유가는 하루아침에 15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나마도 원유를 확보하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산유국들이 쿼터제를 적용해서 판매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 미국의 국내정치는 매우 어수선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고,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패전이라는 불명예까지 안게 되었다.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의 지위와 역할은 말이 아니었다. 반대로 브레즈네프의 소련은 그들의 영향력을 더 확대해 나갔다.

바르샤바 동맹국들에 대한 결속력은 소련이 가진 무한한 자원인, 원유에서 나왔다. 소련은 동맹국들에 원유를 거저 주다시피했다. 국제유가와는 무관했다. 70년대 초반 한국경제가 1차오일쇼크로 허덕일 때 북한은 느긋했다. 소련으로부터 무상공급받는 원유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은 2차 오일쇼크를 불러왔다.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은 2차 오일쇼크를 불러왔다.

2차 오일쇼크와 카터 대통령의 무능

1976년 미국 민주당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권을 내세운 카터는 동맹국 한국에도 압박을 가했다. 박정희 정부에 대해 카터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카터 행정부 시절 국제질서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자유진영 리더로서 미국의 지위는 흔들렸다.

그 가운데 1979년 3월 이란에선 호메이니가 이끄는 무슬림 원리주의자들이 팔레비왕조를 전복시켰다. 테헤란 미 대사관도 점거당하고 대관관 직원들은 인질로 잡혔다.

이로 인해 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배럴당 15달러 내외의 국제원유가는 30달러를 넘어섰다. 리비아까지 가세하면서 전 세계 경제는 또다시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2차 오일쇼크는 한국에 직격탄으로 날아왔다.

경제불안은 정치불안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 고도성장하던 한국경제는 1980년 사상 처음 마이너스 6%라는 뒷걸음질까지 쳤다.

카터의 외교력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란 대사관 인질구출작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친미국가였던 이란은 이제 반미로 돌아섰다. 소련이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친소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카터 미 대통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동에서 미국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라크가 이란을 공격했다. 중동 무슬림세력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이란의 시아파는 전통적인 수니파 중동국가와는 적대적 관계였다.

이란혁명이 번지는 것을 우려한 인근 중동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지했다. 2차 오일쇼크가 진행되는 동안 1980년 9월 브레즈네프 소련 당 서기장은 아프간 침공을 감행했다. 카터 행정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 당시 미국은 한마디로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70년대 월남전 패배, 중동전, 이란 팔레비왕조 몰락에 이어 이란.이라크전, 소련의 아프간스탄 침공 등에도 카터 행정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카터를 누르고 미 대통령에 당선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강력한 미국 재건을 내걸었다. 힘에 의한 미국은 국제질서 재편을 가져왔다. 그 계기는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은 친미국가였고, 반대로 이라크는 친소국가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에서는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국제정치의 불문율이 작동한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교묘히 이용했다. 이란, 이라크 양국은 전비를 마련은 석유뿐이었다. 그동안 OPEC를 통한 감산정책은 이란.이라크전으로 무너졌다. 이란과 이라크는 모두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OPEC의 감산정책을 무시하고 석유를 마구 퍼냈다. 그러자 국제유가는 급락했다.

이란·이라크 전에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은 무기를 팔면서 80년대 세계 방위산업체들은 호황을 맞았다. 이 같은 중동정세는 한국에도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80년대 5공화국 전두환 정부는 이 기회를 잘 탔다. 3저 효과(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는 한국 경제를 급성장시켰다. 80년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은 사실 이란.이라크전에 기인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란·이라크 전쟁, 뜻밖의 효과

레이건 행정부의 ‘힘의 미국’ 정책은 자유진영 국가를 똘똘 뭉치게 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총리, 서독 콜 총리,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 일본의 나카소네 총리는 환상의 콤비였다.

1983년 9월 1일 뉴욕발 김포행 대한항공 007기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다. 이 당시 한·미·일 그리고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자유진영 국가는 모두 한 몸이 되어 소련을 압박했다.

이란·이라크전이 촉발한 국제원유가의 하락은 소련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다. 1982년 11월 소련의 강권 통치자 브레즈네프 당 서기장이 사망하면서 소련의 공산권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했다. 브레즈네프 뒤를 이은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소련 및 바르샤바 동맹국을 결속시키는 데 실패했다.

폴란드 그단스크 조선소 자유노조 레흐 바웬사는 동구권에 자유의 바람을 일으키는 뇌관 역할을 했다. 저유가에 의한 소련경제의 몰락에 폴란드 자유노조 바람, 서구 자유진영의 압박에 소련은 결국 1989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에 충격을 줬다. 후진국으로 알고 있던 대한민국의 성장은 소련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란·이라크전에 의한 원유 증산은 국제원유가가 하락해 한국 등 자유진영 국가들의 경제에는 활력을,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에는 경제 몰락을 가져왔다. 결국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에 오른 후 소련(소비에트연방)은 붕괴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됐다.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을 승인하고 동독에서 소련군을 빼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것은 현찰 540억 달러였다. 독일 콜 총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독일은 통일됐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평양을 건너 태풍을 일으킨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란·이라크전에 따른 저유가가 결국 소련의 붕괴를 초래했다.

미국을 원유 수출국으로 만든 셰일 오일 혁명.
미국을 원유 수출국으로 만든 셰일 오일 혁명.

미국 셰일 오일 혁명과 트럼프

한편 이란과 휴전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란과 7년간 전쟁하는 동안 중동의 이웃 나라들은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잘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란의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이라크가 막았다는 것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바로 이웃 나라 쿠웨이트였다. 그러나 쿠웨이트는 거절했다. 그러자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원유를 도둑질했다는 핑계로 1990년 8월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또 한 번 중동이 요동치는 계기가 됐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화들짝 놀랐다. 쿠웨이트가 이라크 손에 넘어가면 중동국가 질서는 엉망이 되고 세계 경제 또한 수습 불가능의 지경까지 빠질 판국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탈환 전쟁을 펼쳤다. 이것이 1차 걸프전이다.

이 전쟁은 1991년 1월 17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벌어졌다. 이라크와 다국적군(Coalition Force) 사이의 전쟁이다.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침략한 이라크군을 섬멸하여 이라크에 강제 병합된 쿠웨이트의 독립을 회복하였다.

2013년 11월 16일(워싱턴 시각)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미국이 드디어 에너지 자급자족 시대를 맞았다고 선언했다. 주례 라디오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20년 만에 처음으로 원유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향후 200년간 에너지 걱정 없는 미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미국이 40여 년의 금기를 깨고 석유 수출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알려진 것처럼 비전통 자원인 셰일 오일 혁명에서 비롯됐다.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진흙으로 형성된 퇴적암 사이사이에는 원유가 숨어 있었지만 생산이 어렵고 경제성도 떨어져 외면받아 왔다. 하지만 수압파쇄, 수평시추 공법이 개발돼 채굴이 가능해졌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두바이유는 배럴당 최고 110달러까지 올랐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셰일 원유를 뽑아내자 2016년에는 배럴당 40달러 선까지 급락했다. 2016년 미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셰일 원유를 국제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중동에 더 이상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활용했다. 트럼프는 미국의 안보 1번지를 중동에서 중국으로 변경했다. 더 이상 페르시아만에 미 군사력을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경제는 트럼프 시절 셰일 원유에 힘입어 연평균 경제성장이 4%에 달하기도 했다.

바이든의 환경정책과 러시아

미국이 셰일 원유를 퍼올리자 몸이 단 것은 중동 사우디였다. 셰일 원유의 채산성은 배럴당 60달러 선이다. 사우디는 원유 증산을 통해 미국 셰일 원유 업체를 고사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신기술 개발을 통해 셰일 원유 생산단가는 더 낮아졌다.

저유가 불똥은 러시아로 튀었다. 국제원유가의 급락에 러시아 경제도 휘청거린 것이다. 트럼프는 셰일 원유 증산을 통해 중동과 러시아 두 곳의 목줄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력은 온전히 중국 봉쇄에 투입할 수 있었다. 트럼프의 효과적인 국제정치라고 평할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트럼프와 셰일 원유 업체에 치명타를 줬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트럼프와는 정반대 정책을 펼쳤다.

코로나로 인한 수요감소와 바이든의 친환경 정책은 미국의 셰일 오일 업체에는 사망선고와 다름 없었다. 이 업체들은 줄도산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면서 수요가 폭증해도 즉각적으로 원유 생산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국제 원유가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3월 8일 외신에 따르면 배럴당 200달러까지 올라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하면 러시아 경제 역시 살아난다. 전쟁에는 막대한 전비가 필요하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배경에는 국제유가의 고공행진도 없지 않아 영향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만약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었다면 과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하는 국제 문제 전문가도 있다.

카터가 미국 대통령이었을 때도 국제유가는 높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8일 현재 국제유가 평균은 배럴당 115달러를 넘어섰다.

공교롭게도 레이건이나 트럼프처럼 미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는 국제유가는 하락 안정세를 보인 반면 카터나 바이든처럼 미국의 민주당이 집권하면 국제유가는 고공행진을 한 경우가 공통적이다. 국제유가와 국제정치는 분명 함수관계가 있어 보인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