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만든 이건희
한국의 삼성을 세계의 삼성으로 만든 이건희
  • 최승노 미래한국 편집위원·자유기업원 원장
  • 승인 2020.11.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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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7일 삼성전자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권오현 사장, 이건희 회장, 최지성 사장, 이재용 부사장, 윤주화 사장, 정칠희 부사장(반도체연구소장),
전영현 부사장(D램 개발실장) (왼쪽부터)이 기공식을 갖고 있다. /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인이었다. 사람들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초일류기업의 꿈을 꾸고 실천해낸 선각자다. 초일류 기업문화를 만든 리더였으며, 가치를 창출해내는 데 성공한 혁신가였다. 우리 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사회 발전을 선도한 영웅이었다.

사업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대가 이룩한 사업을 지켜간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는 고 이병철 회장이 자서전에 나오는 말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지켜내는 것을 뛰어넘어 또 한 번의 창업과 같은 도약을 이뤄냈다.

1987년 이건희 회장은 선대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총수가 된다. 그는 그 막중한 자리의 무거움을 이겨냈다. 묵묵히 꿈을 현실로 변화시키며 약속을 지켰다. 그는 취임사에서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라고 말했고,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27년간 삼성을 이끌며, 실제로 그 꿈을 이뤄냈다.

27년 간 그가 이뤄낸 성과는 화려하고 위대하다. 매출은 34배, 자산은 70배, 수출은 25배, 시가총액은 350배 늘었다. 우리나라 수출 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3.3%에서 28.2%로 높아졌다. 브랜드 가치는 세계 10대 안에 들 정도로 초일류기업이 되었다.
 

이건희, 2세경영의 신화

2018년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취임 당시 10조 원이었던 매출액이 2018년 387조 원으로 약 39배 늘었으며, 이익은 2000억 원에서 72조 원으로 359배, 주식의 시가총액은 1조 원에서 396조 원으로 무려 396배나 증가했다.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으로만 봐도 대단하지만 질적인 면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뤘다. 선진 경영시스템을 체질화했으며, 도전과 활력이 넘치는 기업문화를 만들었다. 경영체질을 강화하며 삼성이 내실 면에서도 세계 일류기업의 면모를 갖추도록 했다.

그런 삼성이 있어서 우리는 세계 어디에 가도 뿌듯함을 느낀다. 삼성 제품에 만족해하는 세계인들의 호응을 듣고 삼성의 광고판을 보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1980년대 일본의 기업들은 우리 기업들이 도저히 따라가기 벅찬 상대였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믿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허황된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그는 당시에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그의 비전은 하나씩 하나씩 실현되었고, 우리나라도 놀랐고 세계도 놀랐다.

이건희 회장은 성공한 기업가다. 기업은 생존 자체가 성공의 필요 요건이다. 당대에 수익을 내 생존할 뿐만 아니라 후대에서도 생존을 이어가는 것은 더 큰 성공인 것이다. 무엇보다 창업자에 이어 2세 경영에 성공했고, 다시 3세 경영까지 물려준 것은 대단한 성공이다. 많은 기업이 당대에서 성공이 끝나거나 공기업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또 2세 또는 3세 경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극복하고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경영학적 관점에서도 놀라운 일이다.

이병철 회장은 처음부터 그를 후계자로 삼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선대 회장이 그에게 마케팅 공부를 주문한 것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3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택한 마지막 판단은 옳았음이 사후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병철 회장도 후계자 선정에서 성공한 기업가임이 분명하다.

이건희 회장은 어려서부터 일본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큰 나무 밑에서는 나무가 자라기 어렵다고 한다. 그 기간이 그를 강한 리더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혼자 외롭고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 집중하고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힘을 길렀다. 그런 힘은 삼성 총수라는 외로운 자리에서 그를 버티게 했고, 초일류기업으로 밀고 나가는 바탕이 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레슬링과 럭비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바 있다. 특히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럭비를 통해 배웠다는 말은 그가 경영에서 보여준 끈기와 돌파력의 원천을 잘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은 늘 뒤처질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며 경각심을 갖도록 주문했고 혁신을 밀어붙였다. 이 상태로 가면 최고가 될 수 없고 뒤처질 뿐이라는 위기의식은 늘 그를 괴롭혔다. 지금 아니면 늦는다는 절박감, 뒤처질 것을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는 그의 표현은 이어졌다. 이건희 회장은 1993년 오사카 회의에서 “작년 중순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해서 작년 말부터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밖에 잠이 안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했던 그의 외침은 호소력이 컸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의 위기의식은 삼성 공동체가 함께 변해가는 동력을 제공했다.

1996년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에 가입했다. 나라 전체가 성취감이 컸다. 삼성도 연평균 17%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 중이던 이건희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 이건희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의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했다. 경영 합리화와 사업 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 지 1년 후인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냈다.

때로는 충격요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휴대폰 불량품 15만대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다. 직원들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출퇴근 시간을 7.4제로 바꾼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근무시간을 바꾸고, 생활방식을 바꾸는 과정을 통해 삼성의 직원들은 새롭게 변화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공감했다.

그의 경영술은 지역전문가 제도와 디자인 경영에서도 빛난다. 지역전문가를 키워 글로벌 경제 수준에 걸맞는 인재와 키우고 기업 경쟁력을 높였다. 상품 분야에서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디자인을 주문했고 큰 성과를 냈다. 그가 제시한 디자인의 철학은 삼성제품에 잘 반영되었고 소비자들은 큰 호응을 보냈다.

삼성 반도체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면의 길로. 10월 28일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운구 차량이 경기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
삼성 반도체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영면의 길로. 10월 28일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운구 차량이 경기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나서고 있다. / 연합

위기를 뛰어 넘는 리더십

그는 기업가로 반도체 신화, 휴대폰 신화를 이룬 기업가정신의 본보기를 보였다. 이건희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지금이야 반도체 하면 삼성을 떠올리는 시대가 됐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반도체 인수는 말도 안 되는 공상과 같은 이야기였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했을 정도이다.

반도체의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어받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옵니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합니다.” 1995년 8월 마침내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모토로라가 시장 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나라 기업에 정치는 피할 수 없는 리스크이다. 국내에서 삼성 최대의 라이벌 기업인 현대는 정치 리스크를 넘지 못하고 1990년대 삼성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도 정치 스캔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몇 차례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후유증은 컸다.

“우리나라 정치는 4류, 관료와 행정조직은 3류, 기업은 2류다”라고 1995년 그가 한 말은 국민에게는 공감을 줬지만 권력자들에게는 한순간에 적대감을 유발시키는 말이었다. 이후 정치 스캔들은 계속 이어졌다.

1996년 그는 뇌물 제공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2007년 김용철 법무팀장이 터뜨린 비자금 및 로비 제공 의혹 폭로로 회장직을 물러났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고 이후 사면되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후 눈물을 보였다.

그가 떠난 삼성에는 아직 정치 리스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글로벌 초일류기업인 삼성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은 여전히 싸늘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비전을 제시하고 경영혁신을 실천해 내기 위해 애써야 하는데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의 정치적, 제도적 환경은 악화되었다. 삼성에는 시련의 계절이다. 변화를 허용하기보다 정치적 요구에 대응하는 데 시간과 경영자원을 쏟고 있는 상황이다.

이건희 회장은 운이 좋게도 선대 회장으로부터 큰 유산을 물려받았다. 인재 제일주의라는 기업문화와 무노조 경영이다. 이 두 가지는 지금 시대에도 탁월한 기업문화이다. 세계 최고 기업들이 추구하고 실천하는 기본이다. 다른 기업과의 격차를 벌인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런던 중심가의 삼성 광고. 삼성은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도 했다/. 삼성 제공
런던 중심가의 삼성 광고. 삼성은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도 했다. 삼성 제공

시대적 요구에 응하라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글로벌 기업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글로벌 기업을 이끈 리더가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이다. 두 총수 모두 2세 경영자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 글로벌 기업인 현대자동차를 이끈 정몽구 회장은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문화를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현대차에는 무노조가 아닌 세계에서 가장 이념적이고 반기업적인 노조가 있었다. 이제는 삼성에도 노조가 강제로 이식되고 있다. 앞으로 정치권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이 삼성의 혁신을 방해하지는 않을지 우려된다.

이건희 회장이 성공 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 신경영을 실천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을 실천하고 변화에 성공한 삼성에는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고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지배구조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해 변화하는 것이 좋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방향이 설정된 기업 지배구조는 기업 생태계를 허물 수 있다.

삼성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 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지배구조, 하도급 거래, 납품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부 비판론자의 주장처럼 형편없는 하도급, 일감몰아주기를 일삼았다면 그런 성과를 낼 수 없다. 삼성은 오너 주도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투명한 거래 방식을 만들었으며 선도하고 있다.

삼성은 또다시 혁신에 성공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 비록 정치적으로 어렵고, 경영환경은 악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탁월한 리더십을 통해 더 큰 성취를 이뤄내야 한다. 이것이 이건희 회장이 후대의 성공을 통해 뛰어난 기업가였음을 한 번 더 증명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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