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개입주의’ 덫에 갇힌 YOLO 文정부
‘국가개입주의’ 덫에 갇힌 YOLO 文정부
  •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
  • 승인 2018.11.1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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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사회시민회의 세미나 발표자료

IMF(국제통화기금)는 ‘세계경제전망’ 보고서(10.9)에서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0%에서 2.8%로 0.2%포인트 내렸다. IMF 이외에도 골드만 삭스, 노무라, 금융연구원, ADB, OECD 등이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조정했다. 성장률 전망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세계성장률평균을 못 쫓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추경을 편성하면서까지 끌어올린 2017년 3.1% 성장률은 선방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세계성장률평균(3.7%)보다 0.6% 낮은 성장률이었다. 2018년 성장률을 2.8%로 가정하면 세계성장률(3.7%)과의 차이는 0.9%로 벌어진다.

IMF의 예측에 의하면 2019년에는 그 차이가 1.1%로 확대된다. 특별한 전기(轉機)가 없는 한 ‘저성장의 구조화’가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경제는 ‘쇠몰(衰沒)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봐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 전반에 걸쳐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사진은 청와대 국정감사장에 나온 대통령 비서실 장하성 정책실장, 김수현 사회수석, 윤종원 경제수석/ 연합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 전반에 걸쳐 문제점을 야기하고 있다. 사진은 청와대 국정감사장에 나온 대통령 비서실 장하성 정책실장, 김수현 사회수석, 윤종원 경제수석/ 연합

추락하는 경제성장률 전망치,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

경제는 정직하다. 화(禍)가 느닷없이 들이닥치지는 않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토대가 공공연하게 침식당하고 있다. 좌편향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향하는 목표와 가치는 국가개입주의에 의해 ‘몰가치’한 것으로 폄훼되고 있다. 기업가는 이미 정권과 대중의 표적이 되었으며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전락했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조의지’와 ‘경제 하려는 의지’(the will to economize)가 실종됐다는 것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국가’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녹아 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문제의 뿌리’(root cause)를 찾아야 한다. 문제의 본질을 천착하려면 ‘원점으로 돌아가’ 문제를 다시 봐야 한다. 이를 ‘원점회귀’(shift left)라고 한다. 우리는 글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따라서 문장을 수정하려면 왼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출발점으로 돌아가 문제를 다시 봐야 비로소 왜 실패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어떤 기업’이 최근 3년간 매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한계에 도달했다면 ‘비상 경영계획’을 세우고 위기관리에 나섰을 것이다. 여기서 말한 ‘어떤 기업’은 불행하게도 ‘한국경제’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제조업 매출액 증가율은 -1.59%, -2.99%, -0.47%를 기록했다.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2016년 11.19%)과 한계기업(2016년 32.3%) 비중은 감내하기 힘든 수준으로 치솟았다. 매출액이 줄고 인건비 비중이 높아지고 한계기업이 증가했다는 것은 우리 경제에 ‘고비용·저효율’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신호다. 이러한 ‘비상한 시기’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정치에는 임기가 존재하지만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 정치는 조각(組閣)을 통해 새로 출발하지만 경제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인수 받아야 한다. 경제가 처한 상황을 숙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SWOT 분석은 잘 알려진 위기 진단방법이다. 조직의 ‘강점(S)과 약점(W) 그리고 기회(O)와 위기(T)’ 요인을 냉정하게 짚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문재인 정부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의 경제지력(經濟知力)을 의심하는 이유이다. 조급한 마음에 ‘좌파 DNA’에 충실한 어떤 의미에선 ‘사전에 입력’된 대로 행동했다.

자가당착에 빠진 소득주도성장

최근의 고용 참사는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 한 가운데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확신편향’이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그리고 정책적으로 유효성이 확인되지 않은 소득주도성장에 함몰된 것이 비극의 단초였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의 파생정책 상품이다. 사용자가 ‘어딘가에 돈을 숨기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최소한 최저임금은 ‘시급 1만 원’은 되어야 한다는 자의적 해석 하에 덜컥 결정한 것이 시급 7530원이다.

고용 참사와 소득분배 악화를 겪은 이상 이제는 정책 방향을 바꿀 때가 되었지만 청와대는 꿈쩍도 않는다. 도리어 구태(舊態)적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청와대는 ‘포용적 성장’을 언급하면서 ‘신자유주의는 성장의 수혜가 소수에 그치고 다수가 배제되는 배제적 성장(exclusive growth)을 유발’하지만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은 성장의 과실이 많은 사람에게 두루 배분돼 많은 사람들이 두루 혜택을 누리게 된다고 했다. 이 같은 정책 사고는 문재인 정부의 전형을 이룬다. 주장은 있되 논거가 없다. 소득주도성장이 왜 포용적 성장이고 신자유주의가 왜 배제적 성장인지에 대한 논거가 없다.

시장은 계약을 통해 정보가 교환되고 이해가 조정되는 ‘비인격적’ 플랫폼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누가 다른 누구를 배제할 수 없다. 시장경제가 포용적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권과 독점 노조가 원하는 대로 시급 1만 원이 ‘실현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가를 생각해 보자. 노동생산성이 1만 원 이하인 근로자는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기존 근로자는 해고될 것이다. 임금과 생산성이 별개일 수 없기 때문이다.

목도하고 있듯이 최저임금 인상의 이익은 ‘정규직 근로자가 배타적으로’ 누리고 있다. 사전적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소득주도성장이 결과적으로 특정 계층에게 배제적 성장을 가져다줬다. 독점노조에 의해 추동된 최저임금 인상은 미숙련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치권력과의 결탁일 수 있다. 기저에는 소위 ‘촛불혁명’에 대한 지분 청구 행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소득주도성장를 포용 성장의 범주로 묶으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라고 출처를 밝히면서 포용적 성장의 ‘학술적 정의’를 내렸다. 김의겸 대변인은 “임금 등을 통한 1차적 분배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고 시장자유에 맡기지만, 세금·재정·연기금 등 2차적 분배에는 정부가 개입해 소득 재분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포용적 성장이라고 설명했다.

시장경제를 정상적으로 채택하는 모든 나라는 소득분배와 소득재분배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소득분배는 시장에서의 분배를 의미한다. 예컨대 시장에서 결정된 생산요소가격에 요소부존량을 곱해 요소소득이 얻어지는 것이다. 소득분배 과정에서 생산요소가격은 시장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국가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득재분배는 다르다. 소득이 사후적으로 개인과 계층 간에 크게 차이가 나면 국가가 개입한다. 누진세, 재정, 연기금 등이 소득재분배를 위한 수단이다. 지구상에 소득재분배 정책을 실시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것이 ‘시장경제 본래의 모습’이다. 김 대변인에 의하면 세금·재정·연기금 등 2차적 분배는 포용적 성장의 전유물인 것처럼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 논리의 자가당착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 해소 대책에서 발견된다. 최저임금 인상 충격으로 자영업자의 불만이 쏟아지자, 청와대와 정치권이 내 놓은 해법이 ‘임대료와 카드수수료 그리고 프랜차이즈 가맹비 등을 깎아 영세업자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임대료와 가맹비 등이 생산요소가격이다. “1차적 분배 과정에서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 자유시장에 맡기는 것”이 포용적 성장이라는 청와대의 설명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다. 최저임금 폭주의 후유증을 치유하려면 최저임금 인상률을 낮추고 노동생산성을 증진시키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다.

정책실패 인정하지 않는 정치권의 독선

정책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권의 독선이 가장 큰 ‘리스크’다. 소득주도성장을 밀어붙인 결과 고용과 분배가 나빠졌음에도 장하선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근 고용·가계소득 지표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속도감 있게 추진하라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취업자 증가폭 둔화를 최저임금 인상이 아닌 ‘생산가능인구(15~64세)’ 감소로 방어해 왔다.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해 취업자수 증가가 둔화되었다는 것이다. 생산인구가 감소했다면 구직에서의 경쟁 압력이 그만큼 완화되어 구직이 용이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직단념자 수가 감소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1년 이내 구직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구직단념자 수는 9월 55만 600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취업자수 증가폭 감소를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고용절벽이 중기화 되자 정부는 드디어 금선(禁線)을 넘었다. 기획재정부는 공공기관에 단기 일자리 확대를 지시하고 일자리 확대 실적을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청와대 의중을 따른 것으로 유추된다. 1년 미만 단기 일자리 확대는 고용동향 수치 개선을 위한 임시조치로 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이는 정부가 앞장서 ‘고용통계 분식’을 조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규직 채용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단기 체험형 인턴을 늘리면’ 예산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국가가 이들을 ‘소모품’처럼 쓰다 버렸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의 집착에는 통계 오독도 일조하고 있다. 장하성 실장은 ‘1990년부터 2016년까지 26년간 가계 총소득(186%)보다 가계 평균소득(90%)이 훨씬 적게 늘어나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는 통계 오독이다. 가계평균소득이 적게 증가한 것은,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가계소득 계층 간 불평등 확대의 근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가계소득 계층간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서울시교육청이 자퇴 또는 학업 중도 포기자 등 ‘학교 밖 학생’에게 매월 현금 20만 원씩을 통장에 넣어 주겠다고 한다. 시범 실시를 해보고 결과가 좋으면 점차 확대하겠단다. 학교를 떠난 뒤 연락처를 알 수 없는 아이에게 현금을 주면 ‘그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더 놀라운 것은 ‘돈의 용처’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제학에 ‘실패의 유인’(incentive to fail)이란 용어가 있다. 실패하도록 사회가 부추긴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학교 그만 두자, 그러면 20만 원씩 국가가 용돈 준단다”를 외치는 청소년이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다. 돈이 넘쳐나기 때문에 이런 정책이 착상되는 것이다. 학생수는 주는데 교육 예산은 매년 는다. 지난 5년간 서울의 학생 수는 14% 줄었지만 교육청 예산은 23% 늘었다. 올해 예산은 9조 원을 넘었다. 종부세, 소득세 등 내국세의 20.3%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또박 또박 떼어가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신’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교육청의 터무니없는 정책에 대해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풍요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의 ‘최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슘페터의 성찰을 반추해야 한다. 그는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1942)>에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성공을 견인했던 요인들이 오히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를 쇠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슘페터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풍요가 자본주의의 적이라면 60년대의 가난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복기(復棋)할 필요가 있다. 1960년에 한국이 빈곤했던 이유는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고 이를 토대로 어떻게 가난에서 벗어날까에 대해 국가적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가진 것이 없는 게 아니라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가난했던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맨주먹과 몸을 가진 것’을 축복으로 여기자고 설득한 것이 박정희였다.

박정희 정부가 절대빈곤에서 우리 경제를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가치중립적인 시장 중심의 정책사고’를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우리 모두 잘 살아 보자”고 했지, 성장의 혜택이 어느 계층에게 더 가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다. 일한 만큼이 내 몫이기 때문에 모두들 열심히 일했다. 박정희는 국민에게 땀과 눈물을 호소했다. 국민의 자조(自助) 의지로 가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국민의 삶을 책임져준다’고 하지 않았다. 고유의 재원을 갖지 않는 무산(無産)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허구다.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이 받아들여질 ‘사회가 십시일반으로 도움을 줘야 하는 계층’이 또렷이 들어난다. 국가에의 의존이 타성화 되는 것만큼 인간의 존엄을 허무는 것은 없다.

우리는 맨주먹에서 3만 달러 소득을 실현했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이 한강의 눈물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 비정규직을 제로(zero)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나라, 이때다 싶어 친인척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고용을 세습하는 나라, ‘학교 밖 학생’에게 묻지마 현금을 주겠다는 나라, 독점노조가 국가권력과 결탁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 오직 내 임기만 챙기겠다는 YOLO(you only live once) 정권이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굴지의 산유국 베네수엘라의 오늘의 처지는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베네수엘라는 자국의 고액권(高額券)을 가지고 여행상품을 만드는 나라로 전락했다. 베네수엘라는 원유를 싼 값에 팔고 정제유를 비싼 값이 수입하는 나라다. 반면 한국은 원유를 싸게 사서 비싼 값에 정제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발전했다. 장기계약을 통해 원유를 안정적으로 도입하면 그게 바로 ‘산유국’이다. 부존자원은 지정학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계약을 뒷받침하는 경제력 그 자체가 부존자원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나라, 국가가 최대의 고용주라고 자임하는 나라, 분배를 통해 성장을 꾀하겠다는 비이성적인 나라, 정책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독선의 나라. 우리의 자화상이다. 대한민국은 전지전능한 나라인가. 자기도취에 빠지는 것은 개인만이 아니다. 국가개입주의 사고를 벗고 ‘경제하려는 의지’를 살리지 못하면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
신시내티대 경제학 박사
전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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