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경 월맹의 59식 탱크가 베트남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베트남의 마지막 대통령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은 북 베트남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디오 연설을 했다. “나는 사이공 정부가 완전히, 전면적으로 해체되었음을 선언한다.” 베트남은 그렇게 공산화 되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현재 처음으로 미 해군의 핵 추진 항공모함 칼빈슨 전단이 지난 달 5일 베트남 중부 다낭 항에 입항했다. 미 항모전단의 베트남 기항은 군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완전한 군사교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 해군의 베트남 기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 일본, 베트남, 호주가 매년 함께 실시하는 다국적 훈련인 ‘퍼시픽 파트너십’(Pacific Partnership)에 참가차 미 해군은 드문드문 기항했다.
그러나 미 항모전단이 기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 항모전단의 베트남 기항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코 중국의 팽창에 대한 베트남의 경고다.
베트남 다낭 항은 남중해 영유권 분쟁 도서인 파라셀 군도(중국명 시사<西沙>군도, 베트남명 호앙사 군도),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南沙>군도, 베트남명 쯔엉사 군도)를 마주 보는 곳이다.
미군 기관지 성조지는 6일, 칼빈슨 항모전단장 소여 사령관(중장)의 말을 보도했다. “미 해군 핵잠수함 가운데 한 척이 베트남에 기항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것은 내가 제시할 사안 중의 하나”라고 전했다.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관계가 보다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CNN의 보도 역시 “칼빈슨의 다낭 기항은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및 군사화를 추진 중인 중국을 겨냥한 게 분명하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의 연합훈련에도 소극적이고 친중, 친북적인 외교 자세를 취하는 반면에 베트남은 반 중국 노선을 분명히 했다. 중국의 영유권 주장에 베트남은 일전불사의 결의를 다지면서 중국에 경고했다.
중국에 벌벌 기는 문재인 정부와는 정반대의 노선이다. 이에 미국은 실질적으로 베트남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6년 베트남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전면 해제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11월 베트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중국해 방위협력 의사를 재확인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서로 피 튀기는 전쟁을 치렀던 미국과 베트남이 중국의 대(對)아시아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손을 맞잡는 모양새”라는 분석이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 미국과 베트남은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웠다. 미국은 무려 5만이 넘는 전사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과 베트남은 혈맹이라는 ‘한-미’ 보다 훨씬 더 가까워지는 모습이다. 마치 데이트를 갓 시작한 연인의 모습이다.
반면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는 마치 ‘우리 행복해요’라고 말하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는 ‘쇼윈도 부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월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서경석 장군은 ‘전투 감각’이라는 명저(名著)를 남겼다.
서 장군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 공포를 이렇게 말했다. “전장(戰場) 제1의 적은 적군의 총칼이 아니라 스스로가 느끼는 공포감입니다. 공포는 전술교리를 마비시키고 작전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프러시아의 전쟁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도 그의 저서에서 ‘공포는 기본적인 전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공포심은 공격 때보다 방어 때, 주간전투 때보다 야간전투 때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한밤중에 참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보면 별별 상상을 다 하다가 지레 겁을 먹게 되지요.”
베트남 공산화의 주역인 호치민은 전쟁(전투) 수행의 근원적 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적에 대한 적개심을 강조했다.
호치민은 말했다. “군인은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전투를 하며, 지도자는 정치적 이념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이다.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다. ‘전우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면 두려움보다 적개심으로 총을 들고 앞으로 뛰쳐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적에 대한 증오심은 공포심을 몰아낸다는 말이다. 한국군이 용감했던 원동력이었다. 6·25 전쟁에서의 겪은 공산세력에 대한 적개심은 월남전에서 그대로 표출되었다. 적개심 측면에서 공산 월맹은 투철했다.
서경석 장군의 인터뷰에서도 “여자 베트콩이 죽어가면서도 눈을 똑바로 쳐들고 자신을 노려 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월남전의 결과 월맹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원동력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무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적의 개념이 모호한 군대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
적개심이 없는 군인은 공포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공포에 사로잡힌 군인은 오합지졸이 되기 마련이다. 월남전에서 남 베트남군이 그랬다. 현재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미북 대화를 앞두고 있지만 북한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최고조로 올리고 있다. 공산 월맹 호치민 전략을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북한뿐만 아니라 운동권 세력의 투쟁 원동력은 과거나 현재도 ‘반미’다.
그들에게 반미는 증오심이자 적개심이며 적화통일의 원동력이다. 1979년 2월 17일 새벽 5시 광저우 군구 사령관 ‘쉬스여우(許世友)’ 상장(上將:대장급)이 지휘하는 중국군 6개군 12개 사단 15만 8000명 그리고 전차 250여 대가 일제히 중국-베트남 국경을 돌파했다.
공산화된 베트남이 중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한 달 전 1월 등소평은 지미 카터 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 응징을 예고했다. “어린 친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엉덩이를 때려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股了)는 등소평의 말은 실행에 옮겨졌다.
1000년간 베트남을 종주국이라는 입장이 되살아난 것이다. 중국의 우선 목표는 접경 도시를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하노이까지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국경 도시 ‘랑손’에서 하노이까지는 약 140㎞다. 당시 주력군이 캄보디아에 있던 베트남군의 전략은 국경에서 강력한 지연 전술을 펼치면서 중국군에게 가능한 최대의 타격을 입힌 후 주력 부대를 수도 하노이 주변에 집결시켜 결전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유인 섬멸전이었다. 중국군은 17일부터 25일까지 약 1주일 동안 국경에서 겨우 16km를 진격했을 뿐이다. 베트남군의 사상자는 3000여 명에 불과한 반면, 중국군의 손실은 1만 명이 넘었다.
베트남군은 중국군의 대부대가 나타나면 결전을 회피하고 정글과 지하 갱도, 험준한 산속으로 재빨리 숨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닳고 닳은 베트남군의 전형적인 전법이었다.
중국군은 수렁에 빠져 들었다. ‘천년의 적’ 중국 상대로 한 베트남 전략 당시 중국군 지휘관들의 역량은 형편없었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식이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군사학교들을 장악하고 우수한 교관들을 쫓아내거나 감옥에 넣어버린 결과였다. 중국군은 통신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체 한국전쟁 당시 모습 그대로 전장에 뛰어 들었다.
중국군 병사들은 일렬로 서서 무작정 베트남군 진지로 돌격하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기 일쑤였다. 베트남 정부의 선전 매체인 하노이 방송은 이틀 동안 중국군이 35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전차 40여 대가 격파되었다고 발표했다.
그 와중에도 중국군은 계속 전진해 3월 6일 국경에서 40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쏜’을 점령했다. ‘랑쏜 전투’는 중월전쟁 중 최대의 격전으로 2월 27일부터 3월 5일까지 8일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증원부대까지 합해 4개 군, 12개 사단을 투입했다. 베트남군 역시 3사단을 비롯한 4개 사단, 1개 포병연대 및 민병대를 투입했다.
베트남 측은 중국군의 손실이 2만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고 중국 역시 베트남군의 손실이 1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중국군의 손실은 매우 컸지만 ‘랑쏜’의 함락으로 베트남의 최일선 방어선은 무너졌다. 랑쏜 35km 떨어진 곳에 있었던 베트남 1군구 사령부가 후방으로 철수했고 수도 하노이도 혼란에 빠졌다.
또한 베트남 지도부는 전국에 총동원령을 선언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중국 지도부는 “충분히 응징하였다”라면서 일방적으로 종전을 선언하고 현지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또한 베트남 정부에 협상을 제안했다. 베트남군의 저항이 예상 외로 강력한데다 본격적으로 반격으로 나올 조짐이 보이자 중국은 퇴각을 결정했다.
공산 월맹이 중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베트남 공산화에 성공했지만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뿌리 깊다. 호치민은 우방이라 하더라도 중국군이 베트남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국이 우리 땅에 들어오면 1000년을 머문다. 프랑스 식민주의는 죽어간다. 그러나 중국이 주둔한다면 그들은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논리는 만고불변의 군사외교의 원리다. 공산주의 이념을 떠나서 베트남이 철저히 고수하는 철칙(鐵則)이다.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중국과 손잡았지만 현재는 중국에 맞서기 위해 과거의 적인 미국과 손잡는 베트남이다.
2015년 김진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우파 모임에서 북한의 급변사태를 예언했다. 김정은에 대한 북한 상층부의 응축된 불만은 언젠가 터진다면서 우리의 10·26 사태 같은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했다.
고모부 장성택을 고사포로 죽이는 북한이 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작 급변사태는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발생했다. 바로 대통령 탄핵사건이다.
또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궁지에 몰린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월남이 패망하기 직전에도 있었다.
티우 월남 대통령은 1973년 미국과 월맹이 맺은 파리평화협정 후 “월맹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10년 내 망한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불과 1년 반도 안 되어 베트남은 공산화 되고 말았다.
군사외교 정책만으로 보면 공산 월맹이나 북한은 일관성이 있다. 그들은 ‘반미’라는 기치 아래 적화(赤化)의 목표는 절대로 바꾸지 않았다. 호치민이 말한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은 공산주의 통일전략전술의 핵심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미북 대화를 앞두고 문재인 정부는 들떠 있는 듯하다. 과거 공화당의 닉슨이 파리평화협정을 한 것처럼 공화당의 트럼프 역시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일부 우파 인사들은 트럼프가 북폭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이 싸우려 하지 않는데 미국이 대신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회담을 한다.
정치권도 언론도 마치 이번 회담으로 평화가 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 나온 처칠 총리의 말이다.
“평화 운운하면 약점만 잡혀요, 평화회담 한답시고 파국으로 끌려가는 바보짓은 하지 맙시다. 언제 정신 차릴 거요? 얼마나 더 많은 독재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비위를 맞추며 모든 것을 털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거요?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머리를 처박고 어떻게 호랑이와 대화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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