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선례(先例)로서, 또한 가장 이상적인 롤 모델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독일 통일
2016년은 통일 원년으로 후일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4차 핵실험이 대한민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와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 즉 개성공단 폐쇄 조치라는 초강수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는 한반도 평화라는 대의명분에 기반을 두고 북한 달래기와 북한 비위맞추기에 주안점을 둔 햇볕정책을 천명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물론 중도실용노선을 천명한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감히 내리지 못했던 역사적 결단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 폭침-연평도 도발사태를 겪으면서 일단 햇볕정책을 청산했지만 개성공단의 가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는 통일에 대한 의지는 유보한 채 북한의 의중을 탐색하는 암중 모색기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대응과 반발과는 무관하게 통일시대를 열겠다고 과감하게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노골적 언급은 자제했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공산정권에 대한 레짐 체인지를 목표로 한 일종의 자유통일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향후 한반도가 어떤 방식의 통일로 행진할지는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정권과의 협상통일이나 남북한 연방제 통일방식은 실현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남북한 국력의 현저한 차이와 체제의 이질성, 그리고 가치관의 뚜렷한 차이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식의 통일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협상통일은 국력이 비등할 경우에나 가능하고 남북연방제도 이념과 체제가 유사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통일의 롤 모델, 독일
그렇다면 향후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는데, ①분단의 장기 고착화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우처럼 영구 분단화로 가느냐? 아니면 ②남한 주도의 자유통일(흡수통일) 방식인가? 이외에 다른 방도는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의 진행 방향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연구의 중요 목적은 과거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 불확실한 미래의 진로에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세 종류의 통일, 즉 베트남의 무력적 공산통일, 독일의 평화적 흡수통일, 그리고 예멘의 남북합의통일 등이 실현되었다.
아무래도 통일의 선례(先例)로서, 또한 가장 이상적인 롤 모델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20세기 독일통일이다. 그 이유는 20세기 독일 통일이 ①자유민주적 평화적 통일, ②주민들의 자결권 존중, ③다른 통일에 비해 내란 재발로 인한 인명손실이 없었으며, 정치 보복 및 숙청 등의 비교적 부작용과 후유증이 적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글의 목적은 20세기 독일 통일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추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서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일어날 시행착오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줄이려는 것이다.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동북아의 한반도와 중부유럽에 위치한 독일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과 서독의 공통점은 양국 모두 2차 세계대전의 종전 과정에서 미·영·소 등 강대국에 의해 강제 점령으로 분할된 분단국가라는 점이다. 동독과 북한은 소련의 막강한 간섭과 영향력 하에 동일한 스탈린식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로 출발했다. 동독은 소련군 전후(戰後) 점령지역으로 성립되었고, 서독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점령지가 합쳐지면서 건국되었다.
또 양국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안보협력관계 속에서 반공국가로 발전했으며,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한강과 라인강의 기적을 연출했다.
서독은 의원내각제로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로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했으며 양국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정착시킨 점 등에서 동일한 규범과 가치관을 지닌 분단국가다.
동독과 북한의 다른 점
동독과 북한은 다른 점도 많다. 동독은 건국 초기부터 영토와 인구가 서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정권의 정통성 논란에서 위축되어 있었고, 북한의 김일성처럼 처음부터 무력통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60년대 초에 동독은 서독 사회에 위협을 줄 만한 아무런 도전세력이 되지 못했다.
동독은 북한처럼 체제 유지를 위해 핵과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광분하지 않은 점, 김일성과 같은 지도자 우상숭배를 강화하거나, 권력의 3대 세습 독재체제를 유지하지 않은 점 등에서 비록 양국이 소련의 지배하에 놓인 위성국가로 출발했지만 동독과 북한은 차이점이 많은 공산국가로 출발했다.
동독은 북한처럼 처음부터 소련의 원조에 의존했지만, 1980년대 이후 소련 모델은 매력을 잃었고, 소련의 대(對)동독 원조도 감소되었다. 그에 비해, 소련과 중공은 북한의 건국 초기부터 서로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고 온갖 경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북한은 소련과 중공 양국의 라이벌 관계를 활용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최대의 실익(實益)을 얻었다.
더욱이 1980년대에 소련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소련은 동독 지원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중공은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대북 지원에 여력(餘力)이 있었다.
서독에 대한 첩보, 선무공작의 행태도 동독의 경우, 슈타지와 같은 비밀경찰을 운영하여 서독에 광범한 간첩망을 운영했지만 북한처럼 공공연하게 초대소를 운영하고 ‘기쁨조’까지 동원하면서 ‘성(性)’을 첩보공작의 무기로 삼아 남한 인사들의 코를 꿰어 북한의 대변인으로 삼는 야비한 수단을 부리지는 않았다.
전후 미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평가도 서독과 남한을 비교해 볼 때 천양지차가 있었다. 1949년 6월에 미군은 남한에서 600명 정도의 고문단을 남기고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기증 없이 아무런 안보의 보장 없이 무조건 철수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서 양군 철수를 줄기차게 주장한 모스크바와 평양의 프로파겐다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미 육군 참모부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 절하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극동에서 부동항을 원한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이 주도한 북한 공산정권의 수립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물론, 김일성의 대남 모험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소련의 대북지원은 현저히 줄고 그에 따라 소련의 대북 영향력은 감소된 반면, 중국의 대북지원은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대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G-2 국가로 행세하려는 막강한 중국의 변수가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통일이 늦어졌고 독일 통일에 비해 더욱 쉽지 않을 전망이다.
▲ 독일 통일의 경우 소련 설득이 중요했다면 한반도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어떻게 차단하는가가 관건이다. 사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반기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 |
독일의 쓰라린 역사적 경험
독일 통일의 경우 동독의 배후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종주국 행세를 해 온 소련의 영향력과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한반도의 경우 북한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독일의 쓰라린 역사적 경험과 유럽에서의 위상을 돌이켜 보자. 독일제국이 비스마르크의 호언장담에 현혹되거나 범죄적인 자만심에 빠져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했을 때, 혹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 후 이전의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서방국가에 의해 고립 상태에 빠졌을 때, 유럽 전체가 적대관계나 불안정 상태를 감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나치즘과 히틀러 같은 광폭한 독재자가 등장했듯이 전 세계에 전쟁의 공포와 참화를 안겨줬다.
그러나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으로 건국되어 유럽의 한 가운데 위치하면서 모든 이웃 나라와 확고하게 단결되어 힘의 균형을 상호 조정하면서 겸손하게 협조하고 교류를 강화해 나갔을 때, 항상 유럽의 국제적 평화와 질서, 안전이 보장되었다.
1949년 동서독으로 분단된 지 41년 만인 1990년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다. 독일 통일의 빗장이 열린 이유는 단일 요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또 갑자기 1~2년 만에 동독이 붕괴되면서 성사된 것이 아니라 꾸준한 상호 교류를 통해 점진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봐야 한다.
우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오면서 동서독인의 상호 방문이 늘고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 시 쇼핑이 가능해졌다. 동독이 서독 경제에 의존하면서 동독인들은 서독을 동경하게 된다.
1980년대 말 동독인들의 대규모 이주 사태가 초래되었을 때, 이웃 나라인 헝가리가 동독 국경을 개방하면서 서독의 통일정책에 협조했다. 또 동독인들의 대규모 반(反)정부-자유화 시위사태에 직면했을 때,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소련의 개혁파가 대외 모험을 자제하고 동서독 정치인들의 현명한 대처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솔직하게 서독의 지원을 요청했으며, 서독 정부는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다행스럽게도, 서독 정부는 통일비용을 적기에 마련할 수 있었다. 이유는 독일의 국민총생산량이 최고조일 때 통일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90년 서독 정부는 10억 마르크의 동독산 농작물을 소련으로 이송하여 소련의 식량 문제를 지원했다. 그러나 통일 후 연구조사에 의하면, 동독 내 반체제 인사들의 통일운동에 대한 기여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독 정부도 동독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공개적 지원을 기피했는데, 그 이유는 동독 정부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양해 및 협조
독일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양해 및 협조는 통일 달성의 불가결한 요소였다. 그렇지만 유럽의 주변국들과 미국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유럽의 영토에 대한 야심과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독일의 맹방(盟邦) 미국이 처음부터 독일 통일을 지지한 것은 독일에게는 행운이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독일 통일의 다섯 가지 원칙을 거론했다.
①독일 주민들의 자유가 신장되는 자유통일이 되어야 하고, ②독일인들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야 하며, ③향후 유럽 통합에 공헌함은 물론 유럽 안전보장 체제인 나토에 대한 독일의 기여가 포함되어야 하고, ④독일 통일에 대한 연합국의 권리와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하며, 통일은 평화롭고 점진적으로 이뤄야 한다. ⑤폴란드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었던 국경 문제에서 헬싱키 선언의 원칙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등이었는데, 이것은 콜 수상의 견해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헬싱키 선언의 역사적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헬싱키 선언은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유럽국가 35개국이 참여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1975년 8월 헬싱키에서 채택한 국제협약을 지칭한다.
이 회의에서 국가 간 모든 현안에 인권을 결부시켜 해결한다는 것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이 헬싱키 선언이다. 즉 인권 문제가 개선되지 않을 경우 인권조항을 근거로 상대국가에 대한 압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국제적 기준이 마련되었다.
헬싱키 선언의 역사적 중요성은 이 협약을 이행하는 과정(헬싱키 프로세스)에서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해체와 1991년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에 일정 부문 기여했다고 인정되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실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며, 독재정권 내 반체제 세력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하고 있어 북한의 상황에는 직접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또 헬싱키 선언은 당시 국제관계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미국과 소련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연 중국이 쉽게 동아시아판 헬싱키 선언을 채택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불투명하며, 이것이 제대로 한반도에 적용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가능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유럽의 강대국들, 특히 영국, 프랑스, 소련 및 폴란드 등은 독일과의 첨예한 이해관계로 인해 독일 통일 문제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이나,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카이저 황제의 제국, 또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재자 히틀러의 제3제국처럼, 통일 독일이 유럽의 불안정 요소로 재등장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고르바초프의 양보
영국의 대처 수상과 프랑스의 미테랑은 처음에는 독일 통일에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폴란드는 독일과의 국경선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독일에게 다행스럽게도, 소련의 고르바초프는 처음부터 협상의 여지를 남기는 유연성을 보였다.
그는 통일 독일의 나토 잔류를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부시와 정상회담을 갖고 “나토 잔류는 헬싱키 결의안에 의거하여 독일인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한발 물러나면서 협상의 여지를 남겨 콜 수상에게 일말의 안도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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