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경제의 ‘양적완화’ 정책, ‘아프다’고 모르핀 맞는 격
유럽경제의 ‘양적완화’ 정책, ‘아프다’고 모르핀 맞는 격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3.02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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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경제는 과연 회복될 것인가. 최근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동안 유보해왔던 양적완화를 결정하자 유럽증시를 중심으로 경기회복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긴축을 통한 구조조정이 먼저라는 방향에서 적극적인 유동성 공급으로 숨통을 좀 트자는 결정이다.

지난 2월 8일 월스트리트저널, 파이낸셜타임스 등 여러 외신에 따르면 지난달 ECB의 양적완화 조치가 유럽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럽 증시도 상승세를 타는 분위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해 12월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2%까지 떨어지고, 11월 실업률이 11.5%를 기록하는 등 유로존의 경제 상황이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에 ECB가 예상보다 공격적인 경기부양책을 마련했다고 배경을 분석했다.

 

ECB의 양적완화 규모와 방법은 기존의 자산매입 프로그램을 확대해서 올해 3월부터 내년 9월까지 매월 600억 유로 수준의 자산을 매입하는 방법이다. 이는 미국 연준위(Fed)의 양적완화 방법과 같다. 과연 그 효과가 있을까. 그 대답은 유럽중앙은행 드라기 총재가 했다.

이번 조치가 유럽경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감에 대해 드라기 총재는 조건을 달았던 것.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경기부양을 위한 금융정책이 할 수 있는 일은 성장의 기초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이 힘을 받으려면 (성장을 위한) 투자가 있어야 하고, 투자가 이뤄지려면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생기려면 구조적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유럽중앙은행이 아무리 돈을 시중에 공급하더라도 유럽의 정부들이 비효율적인 공공부문의 개혁과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결국 기업들의 민간투자가 일어나지 않게 되고 경기가 살아나기 어렵다는 고백이다.


양적완화보다 구조조정이 먼저 돼야

드라기 총재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 교수가 즉각 반박하는 주장이 포브스지에 실렸다. 스티글리츠는 ‘문제는 긴축이다’라는 요지로, 유럽 각국이 재정확대를 하지 않고 긴축에 매달리는 바람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 긴축재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ECB가 양적완화를 실시하더라도 경기가 살아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스티글리츠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이번 총선에서 포퓰리즘으로 승리한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에 힘을 실어줬다. 시리자의 총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는 ‘더 이상 그리스는 긴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유로존과 IMF 등의 해체마저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지난 1월 스페인에서도 대규모 반(反)긴축 시위가 열렸다.

영국 BBC방송과 스페인 현지 언론은 수만 명의 시민이 신생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Si! Podemos,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가 마드리드에서 주최한 ‘변화를 위한 행진’에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은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변화를 위한 시간이다’ ‘함께라면 우리는 할 수 있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포데모스 대표(36)는 “변화의 바람이 유럽에 불기 시작했다”면서 “그리스에서 (총선 이후) 지난 6일간 진행된 일은 많은 정부가 몇 년 동안 한 일보다 많다”고 평가했다.

포데모스는 긴축 조치와 빈부 격차에 항의하는 데서 시작한 스페인의 2011년 ‘분노하라 시위’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1년 시위 지도자들이 지난해 1월 포데모스를 창당했다.

포데모스는 창당 4개월 만에 치러진 지난해 5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8%의 득표율로 5석을 확보하면서 스페인 정치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포데모스는 이윤을 내는 기업에 해고를 금지하고 민간 병원을 국영으로 전환하며 최저임금을 크게 높이겠다는 것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남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좌파 정치세력의 득세가 이어져 오는 가운데 스위스는 9년 만에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독일은 최근 GDP가 10년간 성장률 평균치 1.2%보다도 높은 수준을 기록하면서 시장에 기대감을 주고 있지만 프랑스의 4분기 GDP는 전분기보다 0.1% 증가하는 데 그쳤다.

법인세를 인하해 고용과 투자를 늘리려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노력에도 프랑스 경제는 여전이 요지부동이다. 그렇다면 유럽 각국이 긴축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스티글리츠 교수의 주장대로 잘못된 것일까.

유럽의 유력한 금융기업 유라시안그룹 회장은 “유로존이 2015년에 심각한 ‘정치적 리스크’를 맞고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유럽 총선이 ‘EU와 유로존’의 운명뿐 아니라 20세기를 지배해 왔던 각국의 전통적인 중도우파-중도좌파 정당들의 몰락을 불러와 정치 지형도를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지적이다.

로버트 페스턴 BBC 경제 담당 에디터 역시 “2015년 유럽의 정치 지형도는 그리스 재정 위기가 촉발된 2010년보다 더 위험하다”며 “각국의 극우-극좌 정당뿐 아니라 전통적 주류 정당들까지 고통스러운 개혁보다는 인기에 영합하려는 ‘포퓰리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이 가장 큰 위기”라고 지적했다.


‘돈 풀어 경제 살리기’ 과연 성공할까?

유럽의 상황에 정통한 미국 최운화 유니티은행장은 “현재 유럽경제에서 가장 필요한 개혁은 국가건 은행이건 기업이건 경쟁력이 없으면 퇴출되고 경쟁력이 있는 자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방향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거품이 꺼지면서 거품 이전의 왜곡됐던 정부지출은 줄여야 하고 금융권의 무분별한 대출관행을 없애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개혁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현실적 고통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유럽은 구조조정보다는 일단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을 다시 양적완화라는 모르핀 요법을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이러한 ‘돈 풀어 경제 살리기’가 성공할 수 있다면 분명히 다행이다. 하지만 경제사적으로 그러한 처방이 근본적인 경기회복의 방법론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다.

불황의 극복은 민간 기업의 생산 혁신을 통해 새로운 공급의 방법이 등장하면서 이뤄지는 것이지, 수요가 늘어서 경기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의 주장은 여전히 그들이 유일하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할 수 있다.

숙취가 심하다고 해장술로 속을 달랠 수는 있겠지만 그런 방법이 숙취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왜 이번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가 유럽경제 회복에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 될지 예상할 수 있다. 유럽의 공공 사회복지 경제모델은 이미 그 유효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유럽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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