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정책, 고급 인재 확보의 기회로 삼자
다문화 정책, 고급 인재 확보의 기회로 삼자
  • 미래한국
  • 승인 2015.01.2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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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우리 역사 속에서 배우는 ‘다문화정책’
 

안전행정부 자료에 의하면 2014년 현재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156만9740명으로 전년보다 8.6%(12만3839명)가 늘었다. 이것은 전체 인구(5114만1463명) 대비 3.1%로, 광주광역시(147만 명)나 대전광역시(153만 명) 인구보다 큰 규모다.

국적별로는 중국인(한국계 중국인 포함)이 84만3655명(53.7%)으로 1위, 이어 베트남 18만5470명(11.8%), 파키스탄·스리랑카 등 남아시아 7만5645명(4.8%), 미국 7만1053명(4.5%) 순이다.

현재 서구 선진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심각한 저출산 고령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는 여성 한 명당 출산율이 1.19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한 나라의 인구를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 한 명당 2.1명의 아이를 출산해야 하는데(이를 인구 대체 수준 합계출산율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절반 수준이니 이대로 가면 인구가 계속 줄어 국가의 현상 유지도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지난 2세기 동안 전 세계는 인구 폭발을 경험했지만 선진국 인구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출산율 저하로 감소하는 추세다. 인구 감소는 국력 쇠퇴와 직결되는 데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은 아직까지도 이주자들이 자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21세기 중반이 되면 인구 감소 현상에 시달리는 많은 나라들이 각종 인센티브나 현금을 줘가면서 인재 영입 전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심각한 저출산 현상에 직면한 우리나라의 출산율을 갑자기 높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외국인의 유입을 통해 적정 인구를 유지해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국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배달겨레 단일민족이라는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면 중국인은 물론 태국, 자바, 수마트라, 여진, 아랍인(무슬림), 일본인, 오키나와(유구국)인 등 수많은 외국인이 이 땅에서 사는 모습들이 기록돼 있다. ‘광해군일기’는 “귀화 오랑캐들이 없는 곳이 없다(광해군 1년 4월 10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우리 역사 속의 다문화인들

흥미를 끄는 것은 수많은 아랍인과 중앙아시아 계통의 무슬림들이 조선에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고려 중기 이후 개성과 예성강 일대에는 유럽 상인을 비롯해 회회인(回回人)이라 불리는 무슬림들이 정착했다.

전문가들은 고려에 살던 외국인들의 수를 최소 4만 명에서 많게는 7만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이들은 개성에 ‘예궁’이라는 모스크를 지어 기도를 하고 코란을 낭송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고려 가요 ‘쌍화점’에도 무슬림 상인이 등장한다. ‘쌍화’란 투르크계 만두인데, 이 고려 가요의 내용은 쌍화점(만두 가게)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더니 무슬림 주인아비가 고려 여인의 손목을 잡으면서 은밀하게 유혹하는 내용이다.

‘쌍화점’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이 이역만리 고려에까지 와서 만두 가게를 열고 살아갈 정도로 우리 민족의 개방성과 대외지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슬림들은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이 땅에서 살았는데, ‘세종실록’은 세종 임금의 즉위식에 이슬람교도가 참석한 사실을 “종실과 문무백관이 경복궁 뜰에 늘어섰다.

임금(세종)이 근정전에 나오니 여러 신하들이 절을 올려 하례하고, 성균관 학생과 회회 노인, 회회 승도들도 모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조선 조정은 동북 국경지역의 여진족을 회유하기 위해 여진족 추장 집안 중 리더급 인물을 볼모로 서울에 보내도록 협약을 맺었다.

여진족 입장에선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문명국 조선에 보내 선진 문물을 습득하는 기회였고, 조선 입장에서는 말썽 많은 여진족들과 무력충돌을 방지하고 유사시 볼모로 삼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여진족 추장의 아들이 서울에 오면 시위대에 배치하여 임금 호위와 왕실 수비를 맡겼다. 말하자면 청와대 경호실에 소속시켜 대통령 경호 임무를 맡긴 셈이다.


고급 인재였던 조선의 다문화인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상륙한 왜군들 중 상당수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투항하여 조선에 귀화했다. 조정은 이들에게 성씨를 내려준 다음 군(軍)에 편입시켜 서북 변경지역에 배치하고, 이들을 ‘항왜병(降倭兵)’이라 불렀다. 인조반정 직후 발생한 이괄의 난 당시 한양으로 쳐들어온 이괄의 선봉부대는 대부분 항왜병들의 후손들이다.

조선 조정은 외국인이 귀화를 요청하면 선진 기술 보유 여부나 문명 수준, 외국어 구사능력, 품성 등을 엄격하게 심사했다. 일정 자격을 갖췄다고 판단되면 그 사람의 특성에 맞는 직종에 배치하여 1년 동안 근무시킨다.

그 후 해당 부서 책임자의 인사고과를 통해 적격자에 한해 귀화를 허가했고, 기술이 보잘 것 없거나 무능력자, 품행이 불량한 자는 추방했다.

귀화를 허가받은 외국인들은 양가집 처녀와 혼인을 시키고, 생활 안정을 위해 3년 동안 의복과 양식, 주택과 생필품을 지원했으며, 세금도 면제(토지 세금은 3년, 사역은 10년)해 줬다.

조선에 와서 살던 귀화인들의 직업은 나라별로 특징을 보이는데 중국 출신은 주로 사신들의 통역이나 외교문서 작성 업무, 이슬람 사람들은 광산업, 여진족들은 군인(왕실수비대), 일본인들은 의사나 군인, 오키나와 사람들은 배 만드는 기술자로 활동했다.

▲ 하멜 표류기의 표착지 삽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조선 조정이 귀화인들에게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여 국가 요직에 오를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귀환인이 급제하면 조선인과 차별 없이 등용했는데 귀화인으로서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으로 김상미(金尙美), 동청례(童淸禮), 동청주(童淸周), 낭삼파(浪三波), 태호시내(太好時乃), 김파다상 등의 이름이 발견된다.

조선 조정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귀화인은 여진족 출신의 동청례(童淸禮) 장군이다. 동청례는 조선에 와서 시위를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의 아들로, 조선에 귀화하여 성종 시절 무과에 급제했고, 연산군 때 왕실 경호대장에 발탁됐다.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방글라데시나 네팔에서 귀화한 외국인을 청와대 경호실장에 임명한 것과 비슷하다.

동청례는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에 참여해 전공을 세웠으나 정국공신(중종 쿠데타 당시 공을 세운 103인에게 내린 공신 칭호)에 오르지 못하고, 그 아래 등급인 원종 1등을 제수 받았다. 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가 밀고돼 중종 3년(1508) 12월에 사형을 당했다.

김해(우록) 김씨의 시조 김충선(金忠善)은 귀화 일본인으로, 그의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左)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한 지 1주일 만에 투항해 조선 장수에 임명됐다.

그는 조선군에게 조총 제조법과 사격술을 가르쳤고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후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을 아내로 맞아 우록골에 터를 잡고 김해(우록) 김씨의 시조가 됐다.

김충선은 이괄의 난 때 정부군으로 참전해 이괄의 부장 서아지의 목을 베었으며 병자호란 때는 조총부대를 이끌고 경기도 광주의 쌍령에서 매복작전을 펼쳐 누르하치군에게 대승을 거뒀다. 벼슬이 정2품(정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올랐고, 사후에 병조판서(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에 추증됐다.

이슬람 사람 삼가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공주의 시종으로 고려에 건너왔다. 그는 고려 여인과 결혼해 왕에게 ‘장순룡’이라는 이름을 받고 장군에 임명됐다. 이 사람이 덕수 장씨의 시조다.

임진왜란 당시 장순룡의 후손들이 행주산성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벌일 때 장순룡의 후손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권율 장군이 대승을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얼마 전 방영된 TV 사극 ‘정도전’을 통해 이름을 알린 청해 이씨의 시조 이지란은 여진족 출신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쿠룬투란 티무르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살다 공민왕 20년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이지란으로 개명했다.

이성계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었고, 조선 개국 1등 공신에 올라 청해군에 봉해졌다. 그는 경상도 절도사, 동북면 안무사, 좌찬성 등 고위직에 올랐다.

▲ 제주 용머리 해안에 하멜이 타고온 네덜란드 상선을 재현해 만든 하멜 전시관

다문화인들이 문화의 꽃을 피우다

조선 중기인 인조 4년(1626)에는 벨테브레와 헤이스베르츠, 페르베스트 등 세 명의 네덜란드인이 표류해 왔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소속돼 대포 제작과 포술을 지도했다.

효종 4년(1653)에는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로 표류해 왔다. 하멜은 조선에서 13년 간 억류생활을 하다가 나가사키로 탈출,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다.

이들이 타고 있던 선박은 유럽과 나가사키를 왕래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매년 수백만 점의 일본 도자기를 사다가 유럽에 판매했다.

그런데 유럽을 열광시킨 일본 도자기는 임진왜란 시절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 도공(陶工)들의 작품이었다. 이삼평이 빚어낸 아리타(有田)야끼, 심당길(심수관의 선조)과 그 후손들이 일으킨 사쓰마(薩摩)야끼는 심오한 미적 감각과 찬연한 색채감으로 유럽의 귀족들을 열광시켰다.

조선 도공들은 본국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의 최하층민으로서 모진 박해와 각종 노역에 시달렸지만 일본에서는 장인(匠人)으로서 예우를 받으며 재주를 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선 도공들은 포로 교환 때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정착해 세계사에 길이 남을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다.

조선 도공들 덕분에 일본은 100년 이상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해 국부(國富)를 축적했고 총포와 서적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문물을 수입했다. 동서양 도자기 무역을 통해 일본은 근대화의 결정적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같은 시기, 조선의 도공들은 고착화된 신분구조에 찌들려 양반들의 애완용 도자기를 빚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국가 발전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들의 천재적 재능이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시 다문화 가정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다문화 정책은 우리 사회의 다문화인들을 ‘한국판 오바마’로 성장하도록 도울 것인지, 아니면 ‘한국판 알카에다’로 만들 것인지를 가름 하는 중대한 이슈다. 미국은 인종이 우수해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사람들이 미국을 국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세계 최강국이 됐다.

서구 선진국들은 창의적 인재, 기술이 뛰어난 인재를 받아들이는 고급 인력 유입정책을 펼치고 있다. 반면에 우리 정부의 다문화 정책은 저임금 미숙련 노동인력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차제에 우리의 다문화 정책도 조선시대처럼 고급 인재 확보 차원으로의 대전환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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