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실체에 대한 섬뜩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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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4.12.19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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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著, 문광훈 譯, 후마니타스 刊, 2010
 

아서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은, 로버트 콘퀘스트가 고발한 스탈린의 대숙청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한때 독일공산당 당원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공화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투옥되기도 했던 아서 쾨슬러는, 이 책에서 N. S 루바쇼프라는 ‘올드 볼셰비키’가 대숙청의 와중에서 파괴돼 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루바쇼프는 흔히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부하린의 실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육체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

작중 인물 루바쇼프는 ‘그 어른’(레닌)의 측근이었던 원로 공산주의자. 내전 당시 연대장-사단장을 지냈고, 당 중앙위원회 위원, 인민위원을 역임했으며, 인터내셔널에서 해외공작을 지도하기도 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돌연히 체포, 투옥된다. ‘넘버 원’(스탈린) 암살을 모의하는 등 반당-반혁명 행위를 했다는 것이 그의 혐의. 그는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하지만, 혹독한 심문을 거치면서, 그리고 반쯤은 자신의 자의에 의해 결국 혐의를 시인한다.

더 나아가 그는 공개 법정에서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인민들에게 반혁명세력의 위험을 경고한 후, 처형된다.

루바쇼프의 이러한 행동은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올드 볼셰비키’들의 행동과 일치한다. 제정러시아 시대에 온갖 탄압과 고초를 이겨냈고, 평생을 공산주의자로 살아왔던 그들이, 왜 자신들의 잘못을 양처럼 고분고분하게 시인했을까? 잔혹한 고문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가족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물론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 법정에 나왔을 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그 물음에 대해 답을 준다.

루바쇼프를 비롯해 ‘대숙청’의 희생자들이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죽어간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북한 주체사상이 말하는 ‘육체적 생명’과 ‘정치적 생명’이라는 논리가 유용하다. 주체사상에서는 ‘육체적 생명’은 부모가 주었지만, ‘정치적 생명’은 수령이 주었다고 가르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평생 공산주의혁명을 위해 헌신했고, 당(黨)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육체적 생명’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치적 생명’이었다.

루바쇼프는 나치 독일에서 지하운동을 하면서 당의 지도노선에서 벗어난 젊은 공산주의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와 나는 실수할 수 있어. 그러나 당은 아니네. 동지, 당은 자네나 나, 그리고 자네나 나 같은 수천 명 이상의 존재야. 당은 역사에 나타나는 혁명적 사상의 구현체지. 역사는 망설임과 주저를 모른다네. 완만하지만 과오 없이 자기 목표를 향해 흘러갈 뿐이지. 역사는 지나는 경로의 모든 굴곡에 그것이 실어 나르는 진흙과 익사자의 시체를 남기네. 역사는 자기 길을 알고 있고, 결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 역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당원이 아니야.”


인간과 역사에 대해 성찰

이런 신념을 가진 이에게 ‘육체적 생명’은 ‘정치적 생명’의 원천인 ‘당’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었다.

더 나아가 자기 몸이 죽더라도 ‘당’의 요구에 복종하고, ‘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 그나마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는(그것이 정신적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길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루바쇼프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넌 대체 무얼 위해 죽고 있는 것이지?”
쾨슬러는 이렇게 답한다.

“그는 어떤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온 원칙(그 원칙의 이름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제는 그 자신마저 희생되고 있었지만),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모든 관습을 배 밖으로 던져 버렸다.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인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윤리라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아마도 악의 중심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류가 바닥짐 없이 항해하는 것은 부적절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성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나침반은 불완전하기에 목표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뒤틀린 경로로 이끌 것이다.”

루바쇼프가 아무런 고민 없이 그런 파멸적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감옥에서 그는 나름대로 인간과 역사에 대해 성찰하려 애쓴다. 어느 날 루바쇼프는 ‘나’라는 1인칭 단어의 존재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혁명가로서, 당원으로서, 그는 ‘우리’라고 말하는 데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과거 자기가 혁명운동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버리고 외면했던 인간들을 떠올리면서, 당시 자신의 모습이 지금 자신을 취조하는 비밀경찰 심문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혁명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나,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쾨슬러는 루바쇼프의 생각을 빌려 이렇게 항변란다.

“누구도 콘크리트로 낙원을 세울 수는 없다. 요새는 보존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메시지도, 세상에 보여 줄 본보기도 없었다. 넘버 원 정권은 마치 중세의 몇몇 교황이 기독교 왕국의 이상을 더럽혔듯이 사회주의 국가의 이상을 더럽혔다. 혁명의 깃발은 이제 조기(弔旗)의 위치에 걸려 있다.”

‘사회주의의 요새’였던 넘버 원 정권도, 소련과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 정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세운 낙원, 혁명의 깃발을 조기처럼 내건 또 하나의 넘버 원 정권이 우리 머리 위에 존재하고 있다. 이 책은 그들이 말하는 “사람 사는 세상” “해방세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올 것인지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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