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론의 고전’으로 아베의 일본을 해부한다
‘일본론의 고전’으로 아베의 일본을 해부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11.2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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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국화와 칼> (2007, 루스 베네딕트 著, 책만드는 집 刊 )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 책은 문화인류학자인 저자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인들의 의식과 문화를 분석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쓴 책이다.

전쟁 상황이라 본토의 일본인들 대신 재미(在美) 일본인들과 일본군 포로들을 인터뷰해야 했지만, 일본인들의 의식구조를 연구하는 데 있어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저자의 주장 가운데는 지금의 일본에는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그 이유는 세월의 흐름에서 기인한다. 저자가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당시 20대 이상인 사람들이었을 테니, 거의 100년 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때문에 가부장제적 가족생활이나 군국주의 등 전(前) 근대적 유산과 관련되는 부분들은 초현대적이고 선진적인 일본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하다. 책을 읽다보면 행정지도, 이지메 등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이 이러한 의식의 소산이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대목들이 나온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저자가 일본인의 ‘제자리 찾기’라는 의식과 ‘수치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을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일본인들의 전시(戰時) 슬로건에 주목한다. 이것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표현되는 계급제도의 소산이지만, 군국주의 일본은 이것을 국가의 전략적 목표로 승격시켰다.

한 마디로 열강들 속에서 더 많은 자신의 몫을 달라, 일본은 이제 열강의 일원이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세계의 맹주가 되겠다는 요구였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이 선발 제국주의 국가에게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인들 특유의 ‘수치의 문화’

한편 일본인들의 문화는, 저자에 의하면 ‘수치의 문화’다. 수치심이 주요한 강제가 되는 ‘수치의 문화’는 남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크게 의식하는 문화다.

이는 도덕의 절대적 표준을 역설하며 양심의 계발을 크게 기대하는 구미(歐美)의 ‘죄의 문화’와는 다르다. ‘수치의 문화’도 사회 내부에서는 일정하게 윤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선악(善惡)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자신의 죄를 절대자 앞에 고백하고 회개한다는 개념은 없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해서 생각해 보자.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사고방식대로라면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은 그들에게는 세계질서 속에서 자신의 정당한 몫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건 일본인들에게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었다.

때문에 일본인이 죄의식 때문에 고개 숙여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 일본인들로서는 그게 왜 사과해야 할 문제인지 자체를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루스 베네딕트도 “일본은 패전 후에도 ‘대동아’ 이상을 부정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 포로 중에서도 그나마 맹목적 애국주의의 색채가 옅었던 사람조차도 대륙 및 서남태평양에 대한 일본의 계획을 규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일본은 무라야마담화나 고노담화 등을 통해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성의를 보였다. 그때는 일본이 ‘보통국가’를 지향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종군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게 일본에 국제사회가 기대하는 바였다.

국제사회가 일본에 기대하는 바를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수치의 문화’의 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그게 무라야마담화였고 고노담화였다.


지금의 일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럼 아베의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일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지금 동북아 국제질서 지형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에서 한 단계 내려앉았다.

저 아래 보이던 중국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굴기했다. 중국의 한계도 적지 않지만, 일본에게는 지금이 상황은 일대 사변이다. 당장 센카쿠열도 등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 심상치 않다.

일본이 20년 전 기대하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 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이제 일본은 이러한 국제질서 아래서 다시 자기에게 걸 맞는 제 자리를 찾아나서야 한다.

그것은 미국이 범세계적 차원에서 구축하고 있는 대(對)중국 포위망이라는 새로운 질서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거기서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수단을 통해 미국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No.2’의 자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보기에 그 질서 안에 한국이 동참해 주면 나쁠 것은 없지만, 굳이 한국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중국의 편에 선다면, 동북아에서 일본의 몸값은 더 올라간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일본은 굳이 과거사 문제를 가지고 한국에 유화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다. 19세기말 이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지향해 온 일본으로서는 자신들이 미국의 편에, 한국은 중국의 편에 서는 것이 각각 ‘제 자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행동 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 일본은 만약 사정이 허락한다면 평화로운 세계 속에서 그 위치를 찾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장된 진영으로 조직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것이다.”

물론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게 된다고 해서 그게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2중대’ 이상의 역할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20세기 초중반처럼 혈기왕성한 청년국가가 아니라, 노년국가다. 하지만 직접적인 군사력의 행사가 아니라고 해도, 외교적-전략적 역량을 이용해 일본의 제 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그러한 노력이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와 국익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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