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을 아십니까?
신해철을 아십니까?
  • 이원우
  • 승인 2014.11.2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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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의 블랙스완]
 

신해철 사망 이후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중에는 우파 어르신들도 계셨다. 그들의 질문은 간명했다.

“신해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그렇다고 말했다. 32세→33세로 넘어가고 있는 나는 ‘문화 빅뱅’ 시대로 회자되는 90년대 시절 음악에 미쳐 있는 초딩→고딩이었다.

점심 값을 아껴 CD를 사 모으던 그 시절 신해철은 분명히 90년대 음악의 한 획을, 아니 세 획쯤은 간단히 그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신해철(무한궤도)의 데뷔곡인 ‘그대에게’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신해철의 대표적 커리어인 밴드 넥스트(N.EX.T)는 활동 당시 정규앨범도 아닌 공연 실황(LIVE) 앨범을 수십만 장 팔아치우는 ‘괴물’이었다.

보수-진보가 뭔지, 좌파-우파가 뭔지 몰랐던 수많은 80년대 태생의 또래들이 그 시절 신해철의 ‘껍질의 파괴’를 듣고 ‘절망에 관하여’를 들었다. 열성팬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나조차도 신해철과 관련된 CD를 20장 넘게 소장하고 있다.

그런 그가 남긴 족적이 간단할 리 없다. 그는 1993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유하의 처녀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영화보다 더 중요한 건 90년대를 제패한 ‘아이콘’ 엄정화가 이 작품을 통해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여전히 가수와 배우를 병행하고 있는데, 이 포지션을 잡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한 사람이 바로 신해철이다(데뷔곡 ‘눈동자’가 그의 작품).

얼마 전 앨범을 발표해 음원차트를 휩쓴 가수 김동률이 친구 서동욱과 ‘전람회’라는 2인조로 1994년 데뷔했을 때 1집 앨범 제작을 이끌어준 것도 신해철이었다.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넘쳐난다. 지금 K-POP으로 불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어느 한 구간은 분명 신해철을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신해철에 대한 담론이 이 지점을 인지하지 않고서 온전히 진행될 리도 만무하다.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의 발자국처럼…

음악이 다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진짜 문제는 여기부터다. 90년대 후반부터 그는 타고난 언변을 활용해 라디오 DJ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했다.

‘음악도시’라는 프로그램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멘토’라는 단어를 몰랐을 때부터 청취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신해철은 그 방송을 하차하면서 당시까진 실력을 검증받은 바 없었던 작곡가 유희열을 후임으로 지목해 또 다른 ‘전설의 DJ’를 만들었다. 심지어 이 분야에도 공로가 있는 셈이다.

신해철의 달변은 ‘고스트네이션’ ‘고스트스테이션’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그저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마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식어가 신해철의 이름 앞에 붙는 이유는 신해철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그만큼 매력적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해철이라는 인물은 수많은 70-80년대 생들에게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 남은 발자국 같은 존재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렇다.

나중에 가서 ‘아, 신해철도 그냥 사람이었네’라고 생각된 순간이 있었을지언정 그 당시 그가 남긴 발자국만큼은 여전히 진짜인 채로 남아 있다는 의미다.

2000년대에 돌입해 그가 노무현 지지 선언을 하고 ‘폴리테이너’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만을 품는 모양이지만 하필이면 그가 지지한 인물이 ‘노무현’이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노무현 대통령 이전, 그러니까 DJ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좌우대립이 지금처럼 극심하지 않았다.

‘좌파’ ‘우파’ 같은 단어조차 통용되지 않았던 이 시절은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현 시대를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로 규정한 순간 종식됐다. 세상만사를 정치 갈등과 좌우 이념대립으로 재단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도 신해철의 전설 대부분은 이 시절 이전에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신해철의 음악과 언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폴리테이너 신해철과 ‘마왕’ 신해철을 어렵지 않게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2030 보수’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진솔한 슬픔을 표시한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타이밍과 완급 조절에 소질 없는 한국 보수

신해철이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을지언정 하나의 세력으로 변질돼버린 친노(親盧)의 하나로 섞이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는 드물다.

최근 송평인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신해철, 대중 가수의 철학’이라는 칼럼에서 2009년 노무현 추모 콘서트에 등장해 욕설을 퍼부은 신해철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도 신해철의 다음 인터뷰 내용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추모 콘서트에 나가서, 그를 죽인 건 나라고 말했다. 천주교에서 신부가 ‘내 탓이오’ 하면 신자들도 따라 ‘내 탓이오’ 한다.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2014년 7월 ‘시사IN’ 기사)

신해철은 집단보다 개인을 우위에 두는 인물이었다. 리버럴(liberal)이냐 리버테리언(libertarian)이냐는 어려운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적어도 집단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신해철이 개인을 중시하는 보수(Conservatism)의 가치와도 어느 정도 융화할 수 있는 부분이 열려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걸그룹 제작에도 관심을 보였던 그는 다분히 親자본주의적 인물이었다.

다만 노무현 지지라는 일종의 ‘스펙’이 감정적인 장벽을 쌓았을 뿐이다. 그 장벽을 끝끝내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그의 넋은 이미 피안의 저편으로 건너가 버렸는데.

신해철의 죽음에 대해 ‘어른 보수’가 “그에 대한 칭송이 아무리 죽음 직후라고 해도 어딘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든다(송평인 칼럼)”고 말한 건 실로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한편으로는 왜 한국의 우익이 문화 분야에서 9:1도 아닌 10:0으로 깨지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일본의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는 “절묘한 타이밍이 몇 분의 1초만 어긋나도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웃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때로는 타이밍이 전부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우익은 여전히 타이밍과 완급조절에 소질이 없다. 신해철의 터무니없이 이른 죽음에 대해, 그 수많은 질곡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추모부터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그 이전에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몇 분의 어르신들처럼 그의 대단함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는 노력을 했다면 어땠을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으나 이번 소동으로 한국의 우익은 또 한 번 이미지를 구기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고 생각한다. 죽은 신해철이 산 보수를 잡은 것이다.


이원우 기자 wonwoop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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