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안두희, 박기서 … 암살의 트라이앵글
김구, 안두희, 박기서 … 암살의 트라이앵글
  • 정용승
  • 승인 2014.11.19 09:0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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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 추모’를 어떻게 봐야 할까

‘탕! 탕! 탕! 탕!’

네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동그란 안경을 낀 거구의 사내가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그의 이름은 김구. 그렇게 백범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일요일 안두희 당시 육군 소위에 의해 자신의 집무실에서 살해됐다.

백범과 안두희는 구면이었다. 안두희는 김구가 주석으로 있는 한독당의 당원이었다. 안두희는 김구 살해 후 김구가 대한민국정부를 전복하려 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있어 위험 수위에 올랐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해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장례식과 운구 도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백범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민족의 지도자’로 일컬어질 만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던 정치인이자 리더였다. 그의 자서전인 ‘백범일지’는 필독서로 지정될 정도다. 그렇게 아직도 백범 김구는 국민들의 마음 속에 민족 지도자로 남아 있다. 보통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영웅의 비극적 결말과 남겨진 그의 아름다운 족적들.


교과서는 말해주지 않는 이야기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또 다른,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백범을 살해한 안두희의 이야기와 그 이후의 상황들 말이다.

▲ 생전의 안두희

우선 안두희의 이야기를 보자.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백범 살해 후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석 달 후 15년으로 감형됐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처분을 받고 포병 장교로 복귀했다.

1951년에는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됐다. 백범을 살해한 죗값에 비해 가볍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백범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4·19혁명 이후 ‘백범 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가 발족된 것이다. 안두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했다. 하지만 1961년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그러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고 1965년에는 민통련 인권국장 곽태영이 칼로 안두희의 목을 두 차례 찔러 큰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당시 민족정기구현회장 고 권중희(2007년 사망)에게 몽둥이를 맞아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후로 안두희는 6개월마다 거주지를 옮길 정도로 불안한 생활을 했다. 이후에도 1992년 9월 23일 몽둥이로 다시 한 번 폭행을 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 일로 권중희는 ‘안두희 감시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두희의 아슬아슬한 도피생활은 1996년 10월 23일 끝이 났다. 평소 권중희를 존경하던 버스기사 박기서가 ‘정의봉’이라는 글씨를 쓴 몽둥이를 가지고 안두희의 자택으로 침입해 그를 살해한 것이다.

박기서는 바로 자수를 했고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하지만 후련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 일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으로 드러났고 안두희를 살해하는 날 아침에도 권중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권중희는 “박기서와 친분이 있을 뿐”이라며 둘의 관계를 일축했다.


안두희와 권중희

이쯤에서 권중희란 인물에 대해, 그리고 민족정기구현회라는 단체에 대해 집어봐야 할 것 같다.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와 관련된 인물로, 또한 두 번이나 안두희를 폭행한 폭행범으로 그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기사를 살펴보면 권중희는 1984년 안두희가 한 월간지에 실은 ‘안두희 고백’이라는 기사를 보고 그를 쫓아다니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목적은 백범 김구를 죽인 목적을 묻고자 했던 것이었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폭행 이유도 백범을 살해한 진상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안두희를 강제로 효창공원 내에 위치한 백범묘소로 끌고 오기도 했다. 여기까지의 정황으로 미뤄봤을 때 그는 백범 김구를 존경함과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민족정기구현회는 어떤 단체일까.

여러 경로로 취재를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정기구현회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몇 개의 기사만 보일 뿐이다. 검색되는 사이트도 있지만 이미 닫힌 지 오래돼 보인다. 그러나 검색되는 몇 개의 기사만 봐도 이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권중희

2005년 5월 27일 오마이뉴스 기사에 의하면 권중희가 대표로 있는 민족정기구현회가 인천시에 맥아더 동상 철거 촉구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5년이 지난 2010년 3월 18일 통일뉴스는 홍갑표 전 민족정기구현회 대표가 친북혐의로 경찰 조사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경찰이 ‘주체사상의 형성과정’ ‘김일성 선집’ ‘조선 침략사’ ‘이현상 평전’ ‘이주동포 100년사’ 등 서적류와 메모지, 집회 전단지, 컴퓨터 저장장치 등을 압수했다고도 썼다.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지금은 사라진 홈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올라왔었는지 짐짓 파악할 수 있다. 일부분을 옮겨본다.

‘민족정기구현회는 외세의 주의, 사상, 종교를 거부하고 한민족의 정기를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회장인 권중희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직접 운영하면서 김구의 어록 등 사상과 암살 사건 관련 기록, 한국 전쟁 자료 및 미군의 범죄, 대한민국 현대사와 친일파 관련 자료 등을 공개했다. 이 사이트에서는 2007년을 단기 4340년으로 적는 등 단기 연호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 박기서

박기서의 ‘두 가지 인생’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봤을 때 권중희는, 그리고 권중희가 운영했던 단체는 친북적이고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그를 존경했던 안두희 살해범 박기서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상당히 긴 시간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던 김구 암살범 안두희처럼 안두희 암살범 박기서도 조용히 살고 있을까.

박기서는 안두희를 살해한 대가로 1997년 4월 3일 징역 5년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다 채우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 후 그는 두 가지 인생을 살고 있다. 하나는 택시기사로서 다른 하나는 좌익의 영웅으로서.

박기서가 안두희를 때렸던 이른바 ‘정의봉’은 정의봉나누기 카페를 통해 아직도 판매 중이며 박기서는 매년 10월이 되면 안두희와 함께 거론되는 인물이 됐다.

또한 올해도 어김없이 인터뷰를 했으며 관련 행사에도 참여했다. 경향신문과 올해 10월 21일 했던 인터뷰를 일부분 옮겨본다.

<박 씨는 안두희 살해사건을 한 개인의 사건으로만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안두희는 성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반민족, 반통일, 반역사를 지칭하는 보통명사”라고 강조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되물었다. “권력의 이권 다툼, 역사를 기만하고도 응징되지 않은 세력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까. 세월호 참사는 또 어떻습니까. 이런 것들은 살인이 아닌가요.”>

안두희, 권중희 그리고 박기서는 백범 김구를 사이에 두고 다른 꿈을 꿨다. 안두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꿨고 권중희는 그런 꿈을 꿨던 안두희를 미워했다.

김구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민족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권중희를 존경했던 박기서는 민족과 통일의 그 어디쯤이라고 하자.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면, 권중희가 안두희에게 원했던 진상이다. 정말로 권중희는 안두희가 아무도 모르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고 믿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진실을 안두희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폭행했던 것일까.

그가 안두희로부터 진실을 원했다면 왜 그는 안두희를 죽이러 간다는 박기서의 전화를 받고도 그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듣고 싶었던 진실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승만이 암살의 배후’라는 것 말이다.

안두희의 그 말만 얻으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테니 말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의문점이 교차하는 가운데 아직도 ‘안두희 살해범’은 영웅이 돼 살아가고 있다.


정용승 기자 jeongy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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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6-09-20 21:51:03
민족정기구현회가 종북빨갱이단체라니.....!!! 미래한국 이러다가 그쪽에서 고소당할수 있다~!!!! 이 버러지같은 언론사야~!!!!

나역시 2015-01-12 05:43:19
가만두지 않았을꺼다... 미래한국? ㅋㅋㅋㅋㅋ 개씹으로빠진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