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에서 촉발된 ‘가상화폐 혁명’
PC방에서 촉발된 ‘가상화폐 혁명’
  • 미래한국
  • 승인 2014.10.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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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문제작 ‘리니지’가 여전히 던지고 있는 질문들

“가상화폐의 가능성을 본 것은 2000년대 초 한국 온라인게임에서였다. 나는 매우 흥분했고, 가상화폐와 관련된 일을 하는 기회를 찾았다.”

▲ 팀 드레이퍼(Tim Draper)

팀 드레퍼(Tim Draper)는 인터넷 초창기에는 핫메일(Hotmail.com)에 투자했고 스카이프(Skype)의 성공에도 관여한 유명 벤처 캐피털리스트다. 부친 대에서부터 유망한 벤처를 찾아 투자를 해오고 있고 그의 아들까지도 벤처 캐피털리스트다.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3대째 벤처 캐피털리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팀 드레퍼는 ‘철학적 부자’로 통한다. 지난 7월 FBI는 3만 비트코인(당시 시세로 대략 1800만 달러)을 경매에 부쳤다. 비트코인을 이용해 마약류를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실크로드’로부터 압수한 비트코인의 일부였다.

워낙 거액이라 100개씩 묶어서 30번에 걸쳐 비딩했지만 팀 드레이퍼 혼자 모든 경매를 이겼다. 직전까지는 비트코인 가격은 크게 떨어졌는데 경매승자가 차액거래를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승자가 팀 드레이퍼로 밝혀지기가 무섭게 가격은 바로 회복을 했다. 그가 그저 단기 이익을 위해 비트코인을 시장에 내다 팔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레이퍼는 자신의 ‘비트코인 집착’이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들의 금융 발전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의 회사는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비트코인 사업에도 투자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아담 드레이퍼 역시 50개의 유망한 비트코인 기업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에 관심 가진 ‘철학적 부자’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 이 철학적 부자 팀 드레이퍼는 자신에게 가상화폐의 존재를 알려준 건 비트코인이나 사토시 나카모토(비트코인의 개발자라는 익명의 천재)가 아니라 한국의 온라인 게임이었다고 실토했다. 바로 ‘리니지’다.

한국의 비트코이너(bitcoiner)로서 그의 말은 놀랍고도 부끄러웠다. 비트코인의 창조자가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데 계기가 된 사건들 중에서 리니지가 언급된 적은 없었다.

▲ 팀 드레이퍼에게 가상화폐의 존재를 인지시켜준 것은 다름아닌 한국의 온라인 게임 리니지였다.

금을 이용해 온라인 송수금을 하게 했던 이골드(E-Gold)나 코스타리카에 서버를 두고 국제적인 자금세탁을 도왔던 디지털통화 브로커 리버티 리저브(Liberty-reserve)가 지목되긴 했다. 모두 나름 진지한 논리에 기반했던 시도들이다. 그런데 드레이퍼에게 가상화폐를 가르쳐준 게 한낱 게임에 지나지 않은 리니지라니.

리니지 이전까지 컴퓨터 게임은 일본산이거나 미국산이었다. 한국을 온라인 게임의 강국으로 만들어준 리니지는 일단 장르부터 새로웠다. MMORPG. ‘대규모 다중접속 온라인 역할 수행 게임’이라는 긴 뜻을 가진다.

리니지는 최초의 MMORPG는 아니다. 그러나 MMORPG가 중독성이 강해서 현실과 가상세계를 혼동하게 한다는 사실, 그리고 개발자나 피시방에는 수익을 안겨주는 ‘산업’이라는 걸 실증적으로 보여줬다는 사실에는 대다수가 동의한다. 프로야구팀까지 갖춘 오늘날의 엔씨소프트라는 알짜 기업의 기반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게임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은 국민들은 리니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뉴스만을 접했다. 사발면만 먹으며 리니지를 하다 굶어 죽은 중독자나 게임에서의 싸움이 실제의 싸움으로 번졌던 이야기들이다.

드레이퍼가 주목한 뉴스는 따로 있었다. 게임에서 전투는 가장 중요한 역할 수행이다. 전투를 잘 하기 위해서는 아이템이라고 불리는 무기를 잘 구비해야 한다. 그 무기들은 게임 속 세상에서 거래되는데 게임 밖에서도 현금으로 거래됐다. 그저 마니아들의 극성 정도로 생각됐을 이 현상은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리니지는 게임의 역사를 바꿨을 뿐만 아니라 경제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겠다.


리니지가 갖는 경제학적 함의

기억 저편에 있던 리니지를 다시 꺼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지난 6월 ‘데스나이트 불검’이라는 리니지 최고의 무기가 600만원에 거래됐다. 독자도 필자와 같이 이 문장을 다시 읽어볼 게 틀림없다. 게임머니가 아니다. 바로 신사임당이 그려진 돈 600만원이다.
두 가지 의문이 우선 떠오른다.

첫째, 리니지가 아직도 건재한가? 그렇다. 15년이 지났지만 리니지는 건재하다. 그래픽도 훨씬 뛰어나고 여러 면에서 우월하다는 리니지2도 나왔지만 15년 된 1편을 앞서지 못한다. 아이온, 블러이드 앤 소울, 길드워2 등의 베스트셀러 게임을 보유한 엔시소프트 매출의 30%는 아직도 낡은 리니지에서 나오고 있다.

둘째, 이런 거래가 과연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 아이템 가격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600만원을 주고 산다는 건 그만한 가격에 팔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리니지 바깥에 사는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나 리니지 세계에서 그 검을 가지면 부러움을 살 뿐만 아니라 리더가 돼 무리를 호령할 수 있다.

MMORPG는 다중이 동시에 접속해서 하나의 세계를 꾸린다. 컴퓨터를 끄고 밖에 머물다 다시 컴퓨터를 작동시키면 멈췄던 시계가 다시 돌아가거나 리셋을 하는 다른 게임의 단속적 시간과는 다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전문가들 말에 의하면 리니지는 엉성하다. 시나리오가 별도로 있지 않다. 리니지의 성공에 고무돼 개발된 미국 블리자드사의 MMORPG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일명 WOW)는 리니지의 지루함(?)을 극복하려고 많은 부분에 기획과 통제가 들어간다.

쉽게 재미를 얻기에는 WOW가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바 실제로 WOW는 세계를 휩쓸었고 한 때 토종 온라인 게임업계의 존립을 위태롭게도 했다.

현실과 닮았다는 것이 MMORPG의 매력이라면 가장(?) 엉성한 MMORPG인 리니지는 현실을 가장 많이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러했기에 때마다 메가히트 게임이 피시방을 지배할 때도 리니지는 꾸준히 10위권 언저리에서 15년의 세월을 버텨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온라인게임, 아직도 ‘놀이’만 보이십니까

불명예를 쌓아가던 리니지의 전성 시절에는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중국에서도 하루 종일 게임하면 돈을 버는 사람이나 공장들이 생겨났다. 게임 속의 캐릭터를 성장시켜야만 하는 MMORPG의 속성을 이용해 캐릭터를 대신 성장시켜주거나 아이템을 구해서 팔려는 사업이다.

시간이 싼 사람들은 시간이 비싼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판다. 법만으로는 이런 보편적 경제 현상을 차단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전혀 썩지 않는 내구성 강한 게임의 아이템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뚫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화폐현상의 전조였던 셈이다.

경제학자들이 게으르지 않았다면 이 때 알아 봤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눈앞에서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연구 성과는 커녕 관심조차 모아지지 않았다.

PC방에서 일어나는 일 전체를 ‘인생의 낭비’로 단정해 버린 것인가? 책 안에만 너무 오래 머물다 보니 책 바깥에서는 길을 잃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여전히 비트코인을 무시하듯 도구가 없다는 이유로 혜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나쁜 망원경을 쥔 천문학자의 오류’에 빠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중국에서는 한 달 30만원이 안 되는 돈을 주면서 ‘게임 알바’를 시키는 저임금 게임공장이 많다고 한다.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쯤 되면 우리는 리니지를 하나의 생태계로 봐야 한다. 주관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수많은 땀과 눈물이 모여 이룬 거대한 자산이다.

온라인상에서 잘도 움직이지만 썩지 않기에 부동산(不動産)이며 그 각각이 하나의 신종 화폐들이다. 가상현실에서의 죽음이 현실의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그 세계에서의 재산이 현실의 재산이 된 지는 오래 됐다. 현실 경제학으로는 난해한 가상화폐의 근원지는 바로 한국의 PC방이었던 셈이다.


오태민
'비트코인은 강했다' 저자
지식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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