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바람은 어디로 부는가
‘무대’의 바람은 어디로 부는가
  • 이원우
  • 승인 2014.09.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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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解答)을 찾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공백에 꼭 맞는 ‘정답’을 얻기 위해 고민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정공법이라 한다면, 정답이 ‘확실히 아닌’ 것들을 제외해 나가며 답을 찾아나가는 방식은 소거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건국 이래 지금까지 넓은 의미의 우익, 그러니까 보수진영의 ‘정답’들은 대부분 정공법의 방식으로 채택돼 왔다. 조선 말기부터 이미 절대적인 명성과 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건국대통령 이승만부터 ‘언젠가 한 번은 대통령이 된다’는 대망론(大望論)을 결국 현실로 만든 18대 대통령 박근혜까지. 넓은 의미에서 보수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은 강력한 개인의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압도적 지지세를 확보한 후보들을 일찍부터 선별해 어김없이 대통령으로 만들어 왔던 게 역사의 흐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2014년 현재를 ‘보수의 위기’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 정공법이 여의치 않아진 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박근혜라는 ‘선거의 여왕’이 단임제 대통령으로 등극한 지금, 범야권의 박원순 서울시장에 필적할 만한 ‘오른쪽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은 ‘정공법이 안 된다면 소거법으로라도’ 인물을 가려내려는 절실함을 소환해 냈다.

지난 7월 14일 치러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김무성 신임대표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처음에는 소거법의 측면이 컸다. 뚜껑을 열어보니 ‘김무성 5만2702표 對 서청원 3만8293표’의 압승이었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감히 누구도 자신 있게 김무성의 승리를 점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무성 대표는 ‘소거법으로서의 대안’처럼 보였다.

정공법의 시간은 7월 14일 이후부터 시작됐다. 보수의 확실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상태의 공백을 메워가며 김무성 대표의 존재감이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에너지는 단순한 분위기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고 7·30 재보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하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그 실체를 증명 받았다.

2014년 여름을 통과하면서 당당한 풍채와 소위 ‘쿨한’ 성격으로 ‘무성대장’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던 김무성 대표의 포털사이트 연관검색어에는 이제 ‘대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산들바람 수준이었던 공기의 이동이 우연과 필연, 확률과 의지의 함수를 거쳐 태풍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셈이다.
‘무대의 바람’은 어디까지 뻗을 수 있을까.

   
ⓒ 미래한국 고재영

‘부산 출신’ 그 이상의 어떤 것

김무성은 1951년 9월 20일 부산에서 출생했다. 15대부터 19대까지 획득한 다섯 개의 금배지 역시 모두 부산 지역구에서 따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순한 ‘영남 출신 보수’로만 보는 것은 너무 많은 사실들을 놓치게 만든다. 그의 ‘성분’에는 좌우와 남북이 복잡하게 뒤섞여 다채로운 결과를 산출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친 故김용주 선생(1905~1985)은 대한해운공사 사장과 주일본공사관 공사를 거친 외교관 출신 기업인이다. 신한제분주식회사 회장과 부산의 대표기업인 전남방직 사장을 거쳐 1960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때 그의 당적은 민주당. 그러나 당선 1년 만에 5·16의 바람이 불어 국회는 해산되고 김 의원은 사퇴했다. 1968년 대한방직협회 회장, 1970년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회장을 거쳐 1974년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1980년 동해제강 회장이 된다. 1982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을 역임한 그는 1985년 눈을 감았다.

김무성은 故김용주 선생과 ‘온양 방씨’로만 알려진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말년까지 재계에서 활동한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화랑초등학교-경남중학교-서울 중동고등학교-한양대 경영학과를 거쳐 1976년 26세의 나이로 동해제강 상무가 된 그는 1982년 삼동산업의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공한 젊은 기업인’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던 그를 정계로 이끄는 데 영향을 준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김영삼 前 대통령이다. 김무성은 김영삼의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정계와 접점을 만들었다.

같은 해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돼 창당된 통일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에 김영삼, 김덕룡 등과 함께 옮겨 왔고,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199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지냈다.

국회의원이 된 것은 1996년 15대 총선에 신한국당으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부터였다. 2000년과 2004년 재차 당선돼 한나라당에서 활동했고 그 이후 2008년 잠시 당을 떠난 일이 있었지만 무소속으로 총선에 당선된 직후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이후 이름이 바뀐 새누리당에 소속돼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13년 4월의 보궐선거에 당선돼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고 2014년 7월 제3차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돼 현재 여권에서 손꼽히는 대권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통일민주당’이 상징하는 복잡성

그의 정치 여정을 돌아봄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지점은 다름 아닌 정계 입문이다. 통일민주당이 김무성의 첫 정당이었다는 점은 그의 정치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좋은 재료가 돼주는 까닭이다.

80년대까지의 한국정치는 지금과 같이 좌우의 이념대립이 존재했다기보다는 군사정권-反군사정권의 구도가 지배적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감행했을 당시 함께 반대를 했던 ‘동지’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한 배를 타고 있었던 셈.

통일민주당의 정체성은 안티테제의 성격이 강했을 뿐 하나의 이념적 동질성을 공유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후 통일민주당이 제각각 갈라져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선에서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는 점, 그들의 결별이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결코 상생할 수 없는 관계로 진화해 왔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이제 와서 김영삼 前 대통령을 ‘보수우파’로 규정하는 사람은 이념의 정교한 구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이념투사라기보다는 정치인이었고, 여론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입장을 바꿀 수 있는 한 장의 리트머스 종이였다.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에 입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바로 이런 김 前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면 지나친 단견일까.

어쩌면 새누리당에 속해서 당 대표를 맡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보수우파’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단견일지 모른다. 김무성은 정치적 성공 앞에서 누구보다 영리하게 행동할 줄 알았던 김영삼 前 대통령의 ‘성공한 제자’이기 때문이다.

김무성의 이념적 다채로움은 그의 인맥(人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부친이 정통 민주당 출신이었다는 점이 그의 야성(野性)을 암시한다면 그의 장인 최치환 선생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 시절 비서관을 지낸 인물이다. 태극무공훈장 추서를 비롯해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잠들어 있는 그에 대해서는 최근 ‘제주 4·3 진압 토벌대 작전 지휘참모’였다는 논란이 일며 때 아닌 역사논쟁이 불붙기도 했다.

김무성과 23세의 나이 차이가 나는 누이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의 경우에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모친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김무성의 호남 인맥으로까지 확장되는 지점인데, 현정은 회장의 증조부 현기봉 선생이 바로 전남 영암 출신의 유지(有志)이며 현재의 광주일고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광주일고는 현재 대한민국 정재계에서 막강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학교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부산저축은행 사건의 경우 광주일고 출신들이 대거 연루돼 있다는 정황이 포착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김무성은 어느 쪽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이것은 그에게 ‘운신의 폭’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옥죄는 덫이 될 수도 있다.

이념보다 카리스마, 21세기형 인물정치

김무성 대표를 바라보는 우파진영 내부의 시선은 복잡 미묘하다. 우선 새누리당 내부의 한 고위 당직자의 말을 들어보자.

“제가 보기엔 무대(무성대장)는 당-청과의 가교 역할보다는 새누리당 자체의 세력을 키우려는 생각이 많아 보여요.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건 ‘사람’에 대한 의리와 애정입니다. 본인이 대표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비주류로 포지셔닝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특이하고요.
친이와 친박 사이에서 오해 받고 소위 ‘팽’ 당했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어느 방향이든 한쪽으로 세력이 쏠리는 것에 대한 조심성이 느껴진다는 것도 유의해 볼 부분입니다. 주변에 어떤 참모들이 구성되느냐에 따라서 새누리당의 미래도 달라질 거라고 봐요. 그 부분은 사실 무대 자신의 카리스마가 워낙 강하다는 측면 때문에 좀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죠.”

한쪽으로 세력이 쏠리는 것에 대한 극도의 조심성은 언제든지 중도(中道)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포장될 위험성을 내포한다. 중도가 위험한 이유는 세간의 추세에 따라 중간(中間)의 기점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의 추세는 좌편향으로 가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의 2심 감형은 통진당 해산에 대한 의견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세월호 정국은 7·30 재보궐 선거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 마음 놓고 보수의 컬러를 발산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 사퇴 사건 또한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애국보수’의 입지가 얼마나 터무니없이 좁은지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이와 같은 결과들의 합산으로 김무성 체제의 새누리당은 정통 우파의 입장에선 도저히 우호적으로 봐줄 수 없는 노선을 채택해 걸어가고 있다.

지난 8월 20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 참석한 김무성 대표의 ‘아시안게임 발언’은 김 대표가 현재의 정국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한 마디였다. 이 발언은 북한 응원단이 아시안게임에 참석할 때 야기될 후폭풍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에서 350명 정도 선수단과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봤던 응원단이 오는데, 그에 대한 (남북) 협상이 결렬됐다. 우리 정부가 쩨쩨하게 놀았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그 협상장에서 우리 정부가 ‘국제관례’를 따른다고 했는데, 이것은 통 크게 해줘야 한다. 북한에서 원하는 대로 선수단과 응원단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부 해봐야 30억 정도 밖에 안 된다. 다 해줘서 다 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남북)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8월 3일 윤일병 사건과 관련해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국회로 불러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장관은 자식도 없느냐”며 책상을 내리치며 강하게 질타한 일은 사안의 세부 내용과는 별개로 ‘국회의원이 정부를 공격하는’ 모습으로 비쳐지며 아슬아슬한 여론을 형성했던 게 사실이다.

바람은 어디로 불어갈 것인가

흥미로운 점은 이런 김무성 대표가 때때로 좌파진영으로부터 ‘극우 인사’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 14일 김무성 의원은 한 강연회에서 “박정희 前 대통령이 5·16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라”고 말해 극우 발언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현재 김무성 대표의 존재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로 함축될 수 있다. 그는 한 번도 어떤 한 가지 이념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일관된 입장을 고수한 적이 없다. 또한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어 어디로든 불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4년 여름은 그런 그가 정공법과 소거법의 변주 속에서 새로운 바람이 돼 가고 있는 기간이다. 이 바람은 왼쪽으로 불어갈까, 오른쪽으로 불어갈까.

바람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불지 않는다. 기압의 차이가 바람을 만든다. 이 원리는 아무리 거센 태풍이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김무성이라는 바람 혹은 태풍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도 대한민국의 정국과 여론의 ‘기압 차이’일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정치인’이다. 그의 출신성분이, 그리고 그의 결코 짧지 않은 정치역정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배포 좋은 대장의 모습은 그의 캐릭터이자 겉모습일 뿐이다. 무대(무성대장)의 무대는 바람의 목적지만큼이나 예측하기 힘든 미지수의 방정식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결론은 무서울 정도로 간단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론을 잡는 자가 ‘무대’를 잡게 될 것이다.

 

이원우 기자 wonwoops@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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