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독립국가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국가가 되었음을 국제사회가 인정해주고 있는 국가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나라는 지독하게 가난하고, 국민의 80%가 문맹이며, 자유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 법치주의가 어떤 것인지도 몰랐고 자위력 조차 갖추지 못했던 분단된 약소국가였다.
분단과 처절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세계 10위권에 달하는 경제, 세계 6위권의 국방, 세계에서 대학교 졸업자 비율이 제일 높은 나라,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해양국가로 변모하면서 개방된 교역국가로 발전하고 다민족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세기의 역설
스포츠와 대중문화 불모지였던 과거를 뒤로 하고 스포츠 강국, 대중문화 (음악, 영화)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국가가 되었다. 세계 역사상 이처럼 짧은 기간에 눈부신 성공을 이룩한 국가의 예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을 두고 세계인들은 ‘한강의 기적’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적적 성공과 발전의 이면에는 미국의 역할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고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직·간접 도움이 있었다.
따라서 지금쯤은 일본과는 불행했던 과거를 땅속 깊이 묻어버리고 앞날을 함께 도모해가는 굳건한 동반자가 되어 있어야 하고, 미국과는 지난날 혈맹관계를 잊지 않으면서 미래를 향한 가치동맹 관계를 심화, 확대시켜가고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일본을 향해서는 외면하고 미국을 향해서는 눈을 감거나 뒷걸음질하려는 정치인들, 지식인들, 좌파 친북인사들과 민족주의 사학자들, 좌파 언론인들이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평범한 이성으로서도 수긍하기 어려운 모순이자 역설이다.
일본을 칭찬하면 친일 역적처럼 비판하고,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미국을 편들면 미제(美帝) 앞잡이로 매도하면서 북한을 떠받들고 중국에 아첨하는 모습들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이제 낯설지 않다.
1980년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다. 빵이 넘쳐나기 때문일까?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일까? 착각과 자만, 오만과 환상 때문일까? ‘한강의 기적’이 ‘세기의 기적’이라면 지금 남한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와 같은 현상을 ‘세기의 역설’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연출해내는 원동력이 반일 (反日), 반미(反美), 민족주의(民族主義)이며, 친북(親北), 친중(親中) 종속 사대주의다.
민족주의(nationalism)
‘민족주의(民族主義)’란 일본인들이 Nationalism을 번역한 단어다. 매우 추상적이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일한 보편적 용어로 정의하기 어렵다. Nationalism이 사용자에 따라 ‘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으로 표현되는 이유다.
근대 한일관계 전문학자인 김영작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Nationalism을 “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라는 새김말로 사용하고 있으나 각각 뉘앙스가 다르므로 내셔널리즘 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의 경우 ‘국가주의’는 Statism 의미가 강하고 ‘국민주의’는 익숙지 못한 용어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원어인 ‘내셔널리즘’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일반 대중 언어로서 이미 익숙해 있는 ‘민족주의’를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종족주의, 순혈주의가 무의미한 근대국가를 기준으로 하는 민족주의는 종족을 전제로 한 ‘종족주의(ethnicism)’와는 구분된다. 종족주의란 단일 조상을 둔 단일 종족, 순혈주의를 정체성으로 삼는다. 단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며 순혈(純血)주의를 절대시하는 북한이 이 경우에 속한다.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일대에 산재해 있는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쿠르드족이 분리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종족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Wikipedia)에 의하면 nationalism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844년이다. 민족주의는 주권국가 탄생과 더불어 생겨났으며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한 것은 19세기이다. 유럽에서 주권국가가 탄생한 계기는 17세기 가톨릭 세력(the Catholic Holy Empire)에 대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세력의 반란으로 야기된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며 대결의 주역들은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맺어진 평화조약(Westphalia 조약)에 따라 국가 간의 주권존중과 상호 불가침이라는 원칙이 수용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주권국가가 탄생하였고, 이들 주권 국가들에 의해 민족주의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산업혁명(1760~1820), 미국혁명(1776~1783), 프랑스혁명(1789~1799)과 20세기 초에 이르는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각국이 가치관, 역사, 언어, 종교, 문화, 관습과 전통 같은 요소들을 공유하는 집단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을 갖추게 되면서 집단적 소속감, 집단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 개념이 생겨났고 이것이 국가 공동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 가려는 민족의식으로 분출되는 과정에서 민족통합(national unity)과 민족단합(national solidarity)을 앞세우는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근대국가의 민족주의는 종족 중심이 아니라 국가 중심이기 때문에 국가, 곧 민족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것도 위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다. 민족주의는 태생적으로 배타적이며 경쟁적이다.
강자는 민족주의 정서를 고무하면서 침략과 정복을, 강자의 지배 하에 있는 약자는 민족주의 정신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유럽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민족주의 관련 사례는 기원전 5세기에 있었던 그리스-페르시아 전쟁(Greco-Persian Wars)이다.
그리스 반도에 산재해 있던 그리스 종족국가들(tribal states)이 그리스 반도를 수호하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기 위해 연합하여 강대한 페르시아 제국(the Persian empire)군을 격퇴시킨 것을 그리스 민족주의(Greek nationalism) 승리로 규정했다.
미국혁명이 영국을 상대로 한 대외적 반식민지 독립 민족주의 투쟁이었다면 프랑스혁명은 구체제(ancient regime) 타도를 위한 대내적 반봉건 민족주의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극적으로 상징한 것이 ‘국민군’ 탄생이다. 봉건영주 시대와 전제군주 시대는 대체적으로 용병시대였으므로 국가, 민족 수호와 같은 개념은 없었거나 희박했다. 국가구성원, 즉 민족구성원이 국가공동체, 즉 민족공동체를 수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은 루소(Rousseau)였다. 그는 “모든 시민은 직업이 아니라 의무로 군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역사적 주장을 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1793년 ‘징집령’을 발표하고 모든 프랑스인은 군복무 의무를 지닌다고 선포했다. 당시 프랑스 국민군은 프랑스의 상징이며 프랑스 민족주의 상징이기도 했다.
나폴레옹(Napoleon)이 자유, 평등, 박애(liberty, equality, fraternity)라는 기치를 들고 파죽지세로 유럽 국가들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은 국민군과 그들이 지녔던 민족의식, 애국심, 전제군주에 대한 증오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적 민족주의가 대세를 이뤘으나 종전 이후부터는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는 피압박 약소국들에 의한 민족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하는 반식민지 민족주의 정서와 투쟁이 확산되었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이 경우에 해당한다. 19세기 이래 20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민족주의 형태는 급진적 민족주의(extreme nationalism)와 反식민지 민족주의(anti-colonial nationalism)였다.
극단적 민족주의는 강대국에 의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imperial nationalism)와 인종주의적 민족주의(racial nationalism)로서 전자는 서구 식민지 정복국가들의 경우이고 후자는 독일 나치스 경우다. 反식민지 민족주의는 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윌슨 미국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self-determination)’ 원칙에 고무된 피지배 약소국들이 주권회복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민족적 저항과 투쟁을 하게 된 경우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주의 형태에서 극단적 민족주의는 죄악시되고 금기시되고 있으며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 종족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좌익 민족주의(left-wing nationalism), 종교 민족주의(religious nationalism) 형태를 보이고 있다. 시민 민족주의는 자유주의 원리에 입각한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선진국들의 경우다.
일반적으로 헌법주의와 법의 지배, 시민의 자유와 재산권을 절대시하는 것을 국가 정체성으로 하는 민족주의다. 국가는 독립성과 독자성을 갖되 상호존중, 상호의존적이며 개방적 입장을 지니기 때문에 자유 민족주의(liberal nationalism)라고도 한다. 종족 민족주의는 종족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로서 배타적이거나 폐쇄성을 지니고 있다.
좌익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주의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꿨던 전통적 맑시스트들은 민족을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반대했다.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
맑스-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는 조국이 없다(the working men have no country.)”고 했으나 레닌과 스탈린은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민족주의는 일시적으로 유용하다고 했다.
레닌은 2단계 혁명 전략에서 1단계인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반제·반봉건 투쟁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하지만 1단계가 마무리되고 2단계 사회주의 혁명이 이뤄지게 되면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위한 포고문에서 “국제주의자 입장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종족, 종교의 구분 없이 민족주의는 유효하다”라고 하면서 피압박 민족의 해방투쟁을 선동하고 고무했다.
그러나 민족이 해방되고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 이뤄지고 나면 민족주의자는 적대계급으로 전락하여 숙청되었다. 이처럼 좌익 민족주의는 사회주의 혁명 달성을 위한 일시적 통일전선 전략으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사우디, 이란, 이라크, 터키, 이집트 같은 이슬람 국가는 종교적 민족주의 국가들이다.
민족주의는 대중을 선동하고 조종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남용되어 왔으며 국가에 따라 지금도 작동되고 있다.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는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이후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하고 반일, 반미, 민족주의 접근에 있어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국제환경과 주변 정세를 살펴봐야 하며 조선왕조 멸망 당시의 상황을 뒤돌아봐야 객관적 이해와 합리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추상적으로, 감정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맹목적이 되거나 배타적이 되어 책임을 회피하게 되기 쉽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우리 선조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백성(百姓)’이라고 했지 ‘민족(民族)’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Nationalism’을 민족주의로 번역해 소개하기 전까지는 민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민족주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척사숭명복청 (斥邪崇明服淸) 사대 민족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원(元,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를 무너뜨린 신생 왕조로서 자청해 명 (明, 중국)을 받들던 조선에서 숭명반청(崇明反淸)을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그 추종세력이 1637년 신흥왕조 청(淸)의 무력 앞에 굴복한 후 1894년까지 속국으로서 청의 지배를 받았으나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과 사림(士林)들은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숭명사대(崇明事大)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이 끝나는 1945년까지 조선의 민족주의는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는 反식민지 민족주의였다. ‘민족,’ ‘조선민족’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결정적 계기는 1919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의한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에 고무되어 일어난 3·1 독립운동일 가능성이 높다.
그 후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1931년 발표한 한국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가 자주독립을 위한 항일민족주의 정신을 고양시키고 일반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45년 해방과 분단으로 한반도에서의 민족주의 성향은 남한과 북한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공산주의 체제 수립에 성공한 북한은 1980년 전까지는 맑시스트들의 정통적 노선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입각해 민족주의를 계급주의에 반하는 반동으로 규정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북한의 민족주의 성향을 객관성 있게 밝힌 것처럼 북한의 정치사전에서 “민족주의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민족의 이익을 위한다는 구실로 타민족과 반목을 조성하는 반동사상”으로 규정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은 계급적 본성에 있어 민족주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사회주의 애국주의를 위해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배타주의에 반대해 투쟁할 것을 강조했으나 1980년 6차 노동당대회에서 김일성이 주체민족관을 제시하면서 일대 노선 변경을 하게 된다.
북한은 노동당 대회에서 주체사상을 “영생불변의 지도이념”으로 못 박았고, 김정일은 1986년 7월 발표한 논문에서 ‘조선민족제1주의’를 제시했다. 김일성은 1991년 5월 ‘우리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룩하자’는 논문을 통해 주체민족관을 구체화했다.
북한의 이러한 노선 변경,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서 벗어나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일까? 종북세력과 북한은 일본이 만든 단어인 민족주의를 반미 반일 선전선동에 적극 이용한다.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당시의 내외정세 변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남적화 통일전략 변화의 필요성이다.
1980년대는 종주국 소련의 대서방 역량이 한계에 도달해가던 시기이고 동맹국 중국은 개혁개방이라는 수정주의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남한은 대내적 위기를 수습하고 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대외관계를 강화하면서 경제·국방 면에서 역량을 축적해가던 시기였다.
북한은 대남적화통일 전략 면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군사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인식한 나머지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남한에서 반일 반미 민족주의 정서를 심화시킴으로써 한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이간시키고 남한 내 적화통일 역량을 키워내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80년 이래 남한사회에서 반미, 반일 정서가 점증하고 친북, 친중 세력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 그들의 민족주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바로세우기를 계기로 전면에 등장한 주사파들에 의한 투쟁과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레닌과 스탈린이 사회주의 혁명 달성을 위한 전단계 투쟁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고 성공 후에는 이를 포기한 것과는 반대로, 정권 수립 초기 민족주의를 반대한 북한이 시간이 지난 후 민족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은 철저한 대남적화통일용 통일전선전략을 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을 따르는 김정은이 “민족자주와 민족 대단결”은 조국통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한 당의 투쟁방침임을 명확히 한 데서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체민족주의 노선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남한의 종북주사파들이 명심해둘 것이 있다. 남한 내 반일 반미 민족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적화통일에 성공하는 날이 오게 된다면 제일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 오염된 주사파들, 그리고 계급의 적으로 간주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레닌이, 스탈린이 걸었던 길이며 모택동이 걸었던 길이다.
현재 인터넷에 올라 있는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는 김정일이 주도자다. 2007년 발표된 ‘6·15 시대 통일운동의 과제’에서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영생불멸의 주체사상과 민족대단결 사상을 구현하시어 민족 공동의 통일리념인 ‘우리민족끼리’를 제시하시었다”고 명시되어 있다.이들이 ‘민족’을 들먹일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한의 자유옹호 국민들이 말하는 민족주의를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적대시하고 그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족주의와 구별해서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이란 남한 내 반일 반미 종북세력,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통틀어 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 본 남한 내 비종북세력, 반통일 보수세력, 반동관료, 매판자본가, 사대 매국세력, 지주는 반민족 적대세력으로 구분되어 제거와 타도의 대상이 된다.
반일 반미를 전제로 하는 주체민족주의 깃발 아래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하는 그들의 속셈은 민족 대 반민족 구도로 통일을 이룩하려는 속임수다. 자유주의 체제인 남한에서의 민족주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종북세력들은 북한의 주체민족관에 입각한 반일 반미 민족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고 종북은 아니지만 반일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사관을 지닌 자들은 일제 잔재 청산을 주장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친일세력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정통성이 없는 친일정부를 탄생시키고 독재정치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나아가 분단 책임자라는 구실을 붙여 반미 민족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반식민지 민족주의 특징을 지닌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는 1945년 해방으로 끝이 났고 북한과 남한의 종북세력에 의한 반미 민족주의는 주한미군 철수와 적화통일을 도모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하는 대다수 국민은 2차 세계대전 후 구축된 자유세계 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안에서 입헌주의(constitutio nalism)와 법의 지배(rule of law),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와, 자유자본주의(liberal capitalism),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다원주의(pluralism)를 수용하고 인류 보편가치(universal values)를 함께 추구하는 시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 즉 자유 민족주의(liberal nationalism) 입장에서 반일 반미 민족주의를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시민 민족주의, 자유 민족주의는 종족 중심이 아닌 가치 중심이라는 점에서 범민족적, 범국가적 특성을 갖기 때문에 가치 수호를 위한 집단안보 체제, 공동 번영과 평화를 위한 자유교역을 중요시하고 당연시한다.
2019년 독일 대통령이 자국의 외교관 모임에서 “민족주의는 독이다”라고 강조한 것도 오늘날의 국제사회 환경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일 우호관계는 가치 공유 관계이고 한미동맹 관계는 가치동맹 관계다.
따라서 반일, 반미는 무의미하고 시대를 역행하는 자해(自害) 행위다. 그러나 이 땅의 일부 정치인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와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반일, 반미, 민족주의 정서를 불러 일으키고 확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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